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북한의 지배에서 해방되었다는 소식만이 들어왔다. 마을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이승만 대통령의 민주주의 시대로 바뀌었다.
--- p.55~56
아무도 가슴 아픈 전쟁 시절의 일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 전쟁으로 상처받은 것이 많았으며 부끄러운 일도 많았으니까 관용의 정신 같은 것이 몸에 밴 것이라고 생각된다.
--- p.58
그들은(중공군) 결코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무서운 소문과는 전혀 다른 좋은 군대처럼 보였다. 성폭력 같은 행위도 없고 오히려 부드러운 느낌이 들고 주민들도 차츰 친밀감을 갖게 되었다. 주둔 중에는 우리 아이들과 놀기도 하고, 병사라고 해도 15살 전후, 그 중에는 내 친구들과 싸우다가 운 병사도 있어 그때는 ‘무슨 군인이 이렇게 약해?’ 하고 어린 나이에도 비웃고는 했다.
--- p.61
이윽고 그 비행기는 낙하산을 투하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낙하산은 오색찬란했다. 그 장면은 웅장하며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전쟁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광경을 본 나는 전쟁이 마치 놀이인 것처럼 느껴졌다.
--- p.64
그런 가운데 마을 사람들에게는 미군 담배와 레이션(야전식)이 배급되었다. 레이션에는 통상 깡통 따개가 붙어 있지만, 없는 것들도 있어서 그 경우는 부엌칼로 무리하게 열었다. 이 레이션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하지만 가끔 맛없는 콩 통조림도 있었다.
--- p.66
폭격을 받고 있을 때는 모두 필사적으로 숨었다. 이제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에 떨지만, 그게 지나가면 꽤나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를 들면 헬리콥터 같은 것, 나는 그것을 ‘멋있다!’ 하는 느낌으로 바라보고는 했다.
--- p.69
습격당하는 것은 젊은 여성만이 아니라 소년도 습격당했다. 마을의 남자아이가 군인들의 오럴섹스(구강성행위)에 이용되는 일 등이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위인 열한 살 소년이 할머니와 함께 고구마밭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미군 병사가 성기를 꺼내어 그것을 핥도록 강제하였다.
--- p.74
내가 본 교전 중의 병사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총을 가진 자유로운 왕자가 된 듯한 극단적인 감정, 즉 양가감정兩賈感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를 가진 군인이 무제한의 자유와 극단적인 만족을 찾으려 한다. 거기서 무서운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이다.
--- p.75
전쟁 중의 군인들로서는 교전 뒤의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살육의 주인공이라는 극단적 감정의 교차 속에서, 단지 자신의 성욕을 채우고 발산하려는 행위였던 것은 아닐까? 지금은 비록 살아남았지만, 또 이어질 전투에서도 생존을 기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이른바 ‘위안부’적인 것이 그들에게는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 p.76~77
미군은 마을의 상징인 소나무를 베거나 묘비를 표적으로 삼아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다. 전쟁에는 살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도덕이 배제된 오락과 낭비도 범람한다. 그래도 최악은 마을의 여자들이 성폭행을 당하는 것이다.
--- p.78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매춘부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가족과 친족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밖에서 오는 매춘부는 타인이며 필요악으로 여겼을 것이다. 이러한 유곽은 군대가 주둔한 기지를 중심으로 해서 퍼져나갔고, 병영을 끼고 형성되었다고 해서 기지촌이라고도 불렀다.
--- p.81
미군 상대 매춘부는 ‘양갈보’나 ‘양공주’로 불렸다. 이 두 용어는 기본적으로 비하하는 말이지만, 전자가 그저 ‘매춘부’를 일컫는다면 후자에는 ‘공주’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다. 이렇게 단어 상으로도 부정과 긍정의 두 측면을 갖는 셈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때와 장소, 경우에 따라 멸시받기도 하고 영웅시되기도 했다.
--- p.85~86
마을 곳곳에 콘돔과 성에 관한 영어가 범람했다. 미군들은 파파상, 마마상 같은 일본어를 사용했다. 이들이 대부분 일본에 주둔했던 부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끔은 일본 노래도 불렀다. 축음기에서 리샹란(李香蘭)의 ‘지나(중국)의 밤’ 등이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도 영어를 열심히 외우려고 했다. 미군은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복싱도 했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당시 미국의 유행가였다.
--- p.87
미군을 상대로 한 매춘부의 수는 휴전 후 40년간에 걸쳐 25만 명에서 30만 명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 p.92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은 정조를 잃으면 결혼 시장에서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다. 그래서 매춘부들에게는 미군 혹은 서양인들이 자신들에게 이상적인 결혼 상대가 되는 것이다.
--- p.94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들은 ‘귀휴제도’ 등에 의해 일본을 경유하면서, 한국에도 일본에도 ‘양공주 경기(일본어로는 빵빵경기)’를 가져왔다. 미군의 주둔으로 인해 양주 나의 고향 마을은 매춘으로 번성했다. 미군과 마을 사람들은 항상 우호적으로 사귀었고, 미군의 이동에 대해서는 반대도 했다. 한동안 미군의 주둔은 계속되었으나 마침내 부대가 이동하고 말았다.
--- p.96
마을 사람들은 다양한 서양 문화와 접하게 되었다. 미군 철모에 긴 막대기를 가로로 걸치고 끈으로 연결하여 물을 긷는 두레박 바가지로 쓰기도 하고, 군용 천막이나 판초 우의(폰초poncho)를 펼쳐놓고 고추나 참깨 같은 농작물을 건조하기도 했다. 드럼통은 저수용으로도 사용됐다.
--- p.102
일반적으로 섹스를 판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 의견이 많다. 그러나 한편, 섹스를 노동이나 상품으로 보려는 의견도 있다. 섹스 자체는 범죄는 아니다. 복수의 남성에게 섹스를 파는 매춘부는 안 된다고 하지만 가정주부도 보기에 따라서는 1인의 남성(남편)에게 섹스를 팔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의견도 있다.
--- p.130
식민지 시대의 역사를 지명에 남기는 나라는 그리 많지는 않다. 하지만 한국처럼 완전히 부수어 버리는 나라는 드물다.
--- p.156
박정희의 비극적 최후 자체가 영웅 서사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서사의 인과를 알게 하는 요소들이 전면 누락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장 차림의 키 큰 신사로 변신한(?) 박정희 동상에 이르러서는 감동보다는 실망을 느꼈다.
--- p.165
나는 이러한 군내의 모순을 산더미같이 알게 되었다. 헌병은 군인을 대상으로만 검문을 하고 기율을 단속하는 것이 상식이자 복무 수칙이지만, 전쟁 중에는 그런 논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쟁을 군인끼리의 스포츠 경기 따위로 여긴다면 큰 실수라는 것이다.
--- p.183
지금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정치적·외교적 카드로 빈번하게 쓰고 있지만, 이것은 결코 좋은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전후 문제는 타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 p.211~212
1822년 매춘부가 처음으로 ‘범죄자’가 되었다. 그것은 왕족의 쾌락주의를 억압하는 영국의 프로테스탄트 운동에 의한 것이었다.
--- p.213
한국 사람들은 성을 억제하기 위해서 금욕은 아니고, 근신한다. 처녀의 정조는 결혼 상대를 위한 유보이고,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처럼 인간은 누구나 결혼해야 할 숙명으로 여겨지고 있다. 따라서 불혼不婚은 본인에게도 사회적으로도 불행한 것이 된다. 특히 미혼인 채로 죽는 것은 원한으로도 연결되고, 가족이나 사회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며 대단히 부정적으로 본다.
--- p.224
원래 한국인의 정조관은 서양적인 금욕주의와는 다르고, 부계제父系制에 의한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성차별 구조에서 온 이데올로기라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현재에도 강하게 남아 있다.
--- p.235
확실히, 대리모가 제도화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는 영화 〈씨받이〉에서 보듯이 사회적으로는 여성을 멸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에 의해서 지배되는 것이다.
--- p.251
성은 원래 동물적인 것이며 성 모럴 같은 것은 없어도 인류는 결혼했고, 가족을 이루며 살아왔다. 말하자면 성교 자체는 범죄행위는 아니다. 하지만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것, 상대에게 강요를 한다면 그것은 상대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도 그러한 ‘강제’나 ‘연행’의 유무가 중요한 관점이 된다.
--- p.255
한국 정부는 항상 섹스나 성 윤리의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오고 있고, 그것이 지금도 한국과 일본에 있어서 불화의 불씨가 되어 계속되는 것이다.
--- p.267
한국 사회는 정조를 잃은 여성을 ‘밖으로’ 내쫓으려고 했다. 그 때문에 일본이나 미국 등 그녀들이 해외로 탈출하는 것이 이상인 것처럼 여겨졌고, 실제로 정조를 잃은 한국의 여성들이 일본으로 흘러갔다. 그런 여성들을 이번에는 영웅시하고, 위안부상을 세운다.
--- p.268
나는 위안부상을 볼 때마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인습을 상기한다. 그것들은 예전의, 열녀를 일방적으로 칭송한 열녀문의 변신이자 전통의 탈을 쓴 즉각 철거해야 할 위선과 비겁의 상징조작일 뿐이다.
--- p.272
일본은 원폭에 의한 피해국임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내게는 있다. 물론 일본은 분명 피폭을 당한 국가이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피폭의 피해자라는 구실 로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의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 p.279
국가는 군대를 가지고 있다. 이후에도 전쟁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전제에 서서 국가는 군대를 필요로 한다. 폭력에도 정당방위가 있듯이 방어를 위한 전쟁 또한 어쩔 수 없다. 군대는 이러한 생명보험과 같은 성질도 있는 것이다.
--- p.281
나는 한국전쟁 중 공산주의가 민주주의로 바뀌는 상황을 체험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 맞추어 변신한 사람들을 많이 봤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그래서 출세하는 사람, 희생되는 사람이 나왔다. 상황 변화에 둔감한 농민은 오히려 안전했다.
--- p.285
전장에는 분명히 위안부가 존재했다. 일본군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일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 전장에서 동물 본래의 생식 본능이 소용돌이치는 장병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생사의 갈림길에 선 남자들의 번뇌를 받아주고 마음을 치유하는 존재로서 위안부도 있었던 것은 아닌가?
--- p.289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한국전쟁 때는 여성에 대한 적의 성폭행은 그다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목격한 것은 적이 아니라 자기 편에 대한 성폭행이었다. 유엔군의 경우, 적이 아닌 한국의 여염집 일반 여성에 대한 성폭행이 그것이다. 미군이 한국 여성에게, 한국군이 자국민인 여성을 성폭행한 것이다. 이 세계에는 ‘정의로운 전쟁’ 따위는 없다. 나는 그것을 통감한다.
--- p.291
반일과 친일의 동아시아에서 멀리 벗어나 해방되어 생각하고 싶은 끝에 나선 여행이었다. 식민지라는 비참한 역사는 나날이 멀어져 간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역사는 역사, 현실은 현실이라는 것을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 p.2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