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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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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0월 09일
쪽수, 무게, 크기 316쪽 | 574g | 152*225*30mm
ISBN13 9791156122036
ISBN10 1156122031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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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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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그날, 장마철인 7월 5일 송산리 5호분과 6호분에 물이 스며드는 것을 막기 위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 그런데 작업하던 인부의 삽에 강돌 하나가 걸렸다. 김영일 현장소장은 무덤에 쓰는 돌이 있음을 의아하게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작업을 지켜보았다. …… 벽돌을 따라가자 드디어 무덤의 입구라는 것을 확신할 만한 윤곽이 드러났다. 역사적인 무령왕릉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p.29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단장에 임명되어 발굴을 지휘하게 되었다. 드디어 7월 7일 오후 4시 무덤의 입구를 막은 폐쇄 벽돌을 들어내는 작업을 했다. …… 단단한 입구를 본 발굴단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은 완벽한 백제 왕릉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 드디어 7월 8일 오후 4시 벽돌 한 장을 조심스럽게 빼내자 무덤 내부에서 응집된 공기가 분출되기 시작했다
--- p.30

무령왕릉에서는 무덤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묘지석과 12종 17점의 국보 등 5,200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백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 p.41

무령왕릉 묘지석은 왜곡이 심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일본서기》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묘지석에 나온 무령왕의 사망 연대를 통해 확인된 출생 연도가 《일본서기》에 기록된 출생 연도와 일치했다. 사마라는 무령왕의 이름도 《일본서기》의 탄생 설화와 연관되었다
--- p.56

왕릉에서 나온 화려하고 세밀한 금속 세공품과 고대 한?중?일의 교류를 여실히 보여주는 도자기, 관목 등은 무령왕 시대 백제의 역량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생전에 혼란한 백제를 수습하고 중흥을 일구어냈던 무령왕이 죽어서 다시 한번 잃어버린 백제 문화를 복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 p.60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이면서 뒤이어 왕에 오른 문주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그가 역사에서 주목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도 동성왕과 무령왕의 아버지라는 점이다. 그의 아들들이 연이어 백제 왕에 올랐고, 게다가 무령왕의 후손이 이후 백제 왕위를 독점하였기에 백제 왕위 계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 p.67

곤지는 형인 개로왕의 요청으로 461년 왜에 파견되었다. 그가 왜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개진되었다. …… 권력 서열 2위인 곤지를 시기하거나 그의 역량을 높이 산 사람들이 곤지의 왜국행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고, 곤지 또한 군사 지원책을 모색하는 동시에 백제계 도왜인들을 규합하여 왜에서 자신의 기반을 다지려고 노력하였으리란 것이 실상에 가까울 것이다
--- p.70

《일본서기》에 의하면 곤지는 4월에 백제에서 출발하여 6월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의 탄생과 관련된 행적을 보이고, 7월에 왜의 수도인 야마토에 입성하였다
--- p.71

《일본서기》에 의하면 그의 친아버지는 개로왕이고, 의붓아버지가 곤지다. 개로왕이 어느 날 동생인 곤지를 불러 왜로 갈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곤지는 수락조건으로 개로왕의 부인을 줄 것을 요청하였다. 상식적으로 보면 이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요구다. 그런데 개로왕은 이를 수락하면서 만약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돌려보내라는 조건을 달았다
--- p.76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에는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이고, 62세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이 작은 단서가 후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다. 먼저, 무령왕은 523년 사망하였는데 당시 62세란 점에서 461년 탄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무령왕 탄생 설화를 전하고 있는 《일본서기》 유라쿠 5년은 461년에 해당하여 묘지석의 무령왕 탄생 시기와 일치한다. 나아가 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은 그의 이름과도 통한다. ‘섬’은 일본어로 ‘시마’이고, 백제어로는 ‘서마’라고 부른 것으로 추정된다
--- p.76

《일본서기》에 의하면 무령왕은 각라도各羅島에서 태어났다. 각라도라는 지명은 현재 존재하지 않지만, 그 음운이 ‘かからしま’이어서 발음이 같은 현재의 사가佐賀현 히가시마츠우라東松浦군 가당도加唐島가 유력한 지역으로 거론되고 있다
--- p.78

무령왕의 탄생 설화를 전하고 있는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각라도(가카라시마)에서 태어났고, 이로 인해 아이의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였고, 이 섬을 주도主嶋라 하였다 한다. ‘시마’를 이름으로 하고 있고, 섬을 임금의 섬이라 하는 것이다
--- p.84

왜로 파견된 곤지는 치카츠아스카 지역에 정착하였다. …… 치카츠아스카는 세토나이카이와 야마토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야마토 정권이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관문에 해당하는 곳이다. 백제계 도왜인들이 이곳에 집중적으로 정착한 것은 그들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최적지였기 때문이다
--- p.92

461년 4월 백제에서 출발한 곤지는 6월 가카라시마에 도착하여 사마를 낳았다. 그런데 곤지가 야마토로 입성할 때에는 사마와 헤어진 상태였다. 그렇다면 사마는 왜 곤지와 헤어졌을까?
--- p.112

《백제신찬》에는 무령왕은 곤지의 아들이며 동성왕의 이모형異母兄이라고 기술하였다. …… 실제 무령왕과 동성왕의 나이를 계산해보니 무령왕이 곤지의 첫아들이고, 동성왕이 둘째 아들이라면 정황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무령왕이 18세면 그 동생인 동성왕은 유년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p.114

사마가 홀로 남았다면 당연히 그의 어머니도 곤지와 헤어졌을 것이다. 이는 사마의 어머니가 곤지의 정실부인이 아니라는 점을 의미한다. 가족을 데리고 야마토로 향하는 마당에 부인과 아들, 즉 직계가족을 홀로 섬에 두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동성왕은 곤지가 정착한 가와치 지역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이며, 그가 사마보다 먼저 왕위에 오른 것도 곤지의 적자임을 말해준다
--- p.115

무령왕을 개로왕의 아들로 연결하면 이를 해결해줄 뿐만 아니라 한성 시대의 계보와도 이어진다. 이는 무령왕 즉위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안이다. 더욱이 무령왕은 동성왕이 시해된 후 즉위하였기 때문에 그를 옹립한 한성에서 내려온 귀족들의 지지를 확보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얻게 된다. 이처럼 무령왕의 가계는 정치적 의도에 따라 정리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p.116

사마의 어머니가 규슈 일대를 배경으로 한 유력한 백제계 도왜인의 집안이었고, 곤지는 이들과 정략적으로 혼인을 하지 않았나 추정된다. 규슈는 백제와 야마토 교류의 통로였고, 백제는 이들의 도움이 매우 절실했기 때문이다. 사마 어머니의 가문도 백제의 확실한 실력자와 연결될 필요가 있었고, 점점 조여오는 야마토의 입김을 막기 위해서도 방패막이가 절실했다
--- p.135

사마 가문은 후쿠오카 일대에서도 활동했지만, 6세기 전후에는 구마모토 일대가 주 무대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유물과 유적에서도 그 흔적이 보이지만, 에다후나야마 고분의 입지가 마치 한성과 웅진처럼 강을 끼고 자리한 곳과 유사하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백제의 전란이 점차 격화되면서 살 곳을 찾는 백제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고향과 비슷한 곳에 터전을 잡았던 것은 아닐까. 요컨대 사마는 규슈 일대의 가카라해에서 태어났고, 주 활동 무대가 점차 아리아케해 연안으로 옮겨가면서 이곳을 기반으로 성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 p.137

문주는 신라의 구원병 만 명을 이끌고 한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성은 폐허가 된 참혹 그 자체였다. 개로왕이 참수를 당했다는 비보를 접하고 …… 문주는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였다. …… 문주왕은 혹시라도 있을 고구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로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터전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그해 10월 웅진으로의 천도를 단행했다
--- p.147

해구가 군사력을 장악하자 유약한 문주왕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문주왕은 자신의 힘으로 해구를 제어할 수 없음을 깨닫자,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안을 구상했다. 힘 있는 자를 불러들여 해구의 전횡을 억제하려고 한 것이다. 해구를 제어할 수 있는 인물로는 곤지가 가장 유력했다
--- p.159

곤지가 귀국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그가 477년 4월 내신좌평에 임명되었다는 사실만 전할 뿐 그 이전 곤지의 행적이 보이지 않으니 477년 4월 직전에 귀국한 것으로 추측된다. …… 마침내 17년 만에 모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 p.159

곤지는 어렵사리 귀국하여 내신좌평이 되었지만 귀국한 지 불과 3개월 만에 죽었다. …… 곤지의 죽음을 자연적인 사망으로 보기에는 그의 나이가 비교적 젊다. 큰아들인 사마가 당시 17세인 점을 고려하면 곤지는 아무리 많아도 50세는 넘기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 곤지가 귀국한 다음 달인 5월에 검은 용이 나타난 사실이다. …… 기사는 좌현왕이었던 곤지의 신상에 이상이 나타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권력에 의한 일종의 희생양이라는 것이다
--- p.162

《일본서기》 유라쿠 49년 조에 의하면 곤지의 아들 모대(동성왕)는 479년 4월 입국한 것으로 나온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모대의 입국 시기와 동성왕(재위 479~501)의 즉위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 동성왕 즉위년 조에는 479년 11월 삼근왕이 죽은 후 모대가 동성왕으로 즉위한 것으로 기술되었다
--- p.172

《일본서기》에는 모대가 츠쿠시국築紫國 군사 5백의 호위를 받으며 입국했다 한다. 이는 태자인 전지왕이 405년 귀국할 때와 유사한 상황이다. …… 모대는 곤지의 적자로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다.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던 곤지가 사망했고, 문주왕 또한 시해되어 그 아들인 삼근왕만 남은 상황에서 가장 왕위에 근접한 인물이었기에 왜에서 귀국할 때 각별한 대우를 받은 것 같다
--- p.175

사마는 곤지 혹은 동성왕을 수행하여 입국했다. …… 동성왕의 즉위에 곤지계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리고 사마 역시 곤지를 수행한 측근 세력의 일원으로 곤지의 사후 동성왕의 귀국과 즉위를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사마는 동성왕의 즉위 당시 나이가 18세였기 때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 p.186

동성왕은 왕족 중심의 정치 운영을 신진 세력으로 대처했고, 신진 세력들 또한 상호 경쟁시켰다. 이어 기반을 상실한 구 귀족들을 재기용하는 등 왕권에 대한 도전을 방지하기 위해 철저하게 보직을 순환시켜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 그렇다면 의심이 많은 동성왕이 사마를 계속 중용했을까? 당연히 그 또한 제거 대상이었을 것이다. 초기에 지방으로 파견된 왕족들처럼 사마도 이 무렵 왕?후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에 파견된 것으로 보인다
--- p.198

사마는 동성왕 정권 초기에 활약했으나 그 역시 왕족들처럼 전라도 지역으로 파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라도는 토착 세력이 강한 지역이어서 사실 백제의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사리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에 파견된 왕?후가 능력을 발휘하여 지역을 지배한다면 다행이며, 최악의 경우 실패하면 중앙 정계에 다시 복귀할 수 없다. 이처럼 동성왕은 잃을 것이 없는 조치를 택한 것이다
--- p.202

무령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평은 “인자하고 너그러워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따랐다”라고 했다. 포학하다는 동성왕과 달리 이러한 평을 듣는 사마가 중앙 정부에 있었다면 아마도 이를 위험시한 동성왕에 의해 바로 제거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중앙의 힘이 미약한 먼 지역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헤아려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면 그의 인기는 올라갔을 것이다
--- p.204

구휼을 받지 못한 한산인 2천 명이 고구려로 도망간 것이다. 이는 지역민뿐만 아니라 천도 정책의 추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이탈을 뜻하기도 했다. 또한, 백가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연돌이 승리함으로써 동성왕 정권의 핵심 세력이었던 백가의 이탈을 초래했다. 백가의 이탈은 그가 나중에 동성왕 시해에 참여함으로써 동성왕 정권을 무너뜨리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p.210

사마는 동성왕이 시해된 후 왕으로 추대되었다. …… 사마가 동성왕의 배다른 형 혹은 개로왕의 아들이라는 혈통이 맞다면 이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 동성왕의 시해 후 혈통적으로 가장 근접했다는 것은 명분이고, 사실상 사마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온당하다. …… 그 역량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중앙 정부의 통치력이 비교적 미치지 않은 외곽 지역인 전라도 지역이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령왕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에 ‘눈매가 그린 듯하였으며,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그를 따랐다’라는 평에서 드러나듯이 사마의 민심 수습은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덕목이었다
--- p.216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지키게 했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했다. 11월에 [왕이] 웅천 북쪽 벌판에서 사냥했다. 또 사비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막혀 마포촌에서 묵었다. 이전에 왕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했을 때 백가는 가지 않으려고 병을 핑계로 사양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왕을 원망했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을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
--- p.221

《백제신찬》의 국인과 《삼국사기》에 기술된 백가의 거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먼저, 국인의 실체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왕을 제거한 국인은 귀족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며, ‘나라 사람들’이란 표현은 거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명분으로 이해된다
--- p.229

무령왕은 집권하자마자 원년 11월 달솔 우영을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습격했다. 우영이 집권 직후에 활약한 사실은 그가 정권의 성립에 공헌한 인물임을 나타낸다. 그런데 고이왕 때 왕의 동생인 우수, 비류왕 때 왕의 이복동생 우복 등의 《삼국사기》 기록을 볼 때 우영은 왕족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동성왕 23년의 정변에는 귀족과 왕족, 그리고 신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 p.230

동성왕 대까지는 좌평이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무령왕 대부터는 직책을 가진 좌평이 등장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후인 성왕 대의 좌평은 상좌평, 중좌평, 하좌평 등 관등의 서열을 나타내는 성격으로 변화된 점이다. 따라서 무령왕 대에 관직의 성격을 가진 좌평 대신에 등급을 나타내주는 좌평으로 성격이 바뀌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 p.243

《일본서기》 부레츠 6년 조에 의하면 무령왕은 재위 4년(504)에 그 전해에 왜에 파견한 마나군麻那君을 자신의 골족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아군斯我君과 교체했다. 불과 여섯 달 만의 교체는 이 시점에 무령왕의 혈족이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 p.246

귀족들의 서열을 정하고 이에 따른 복색을 규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복색을 제한함으로써 신분제 사회의 틀을 확립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복색의 구별은 관등제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으므로 무령왕 때 이러한 신분제의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 p.249

무령왕은 재위 6년(506) 춘궁기에 백성들이 굶주리자 창고를 열어 구휼했다. 이는 선왕인 동성왕이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의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어도 구휼을 하지 않아 이들이 고구려로 도망간 것과 대비된다
--- p.252

무령왕은 재위 10년(510) 봄에 제방을 완비하게 하고 중앙과 지방의 놀고먹는 자들을 몰아 농사를 짓게 했다. …… 물을 통제함으로써 하천의 범람을 막고, 저습지를 활용할 수 있는 부수 효과까지 생긴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제방 축조사업을 국가에서 주관했다는 점이다
--- p.252

무령왕 9년(509) 백제의 백성으로 임나 지역에 도망가서 호적이 끊긴 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어 모두 백제로 옮기고 호적에 올리도록 한 것이다
--- p.255

《삼국사기》 온조왕 대 기록을 보면 비류의 백성들이 온조에 합류하면서 “백성들이 즐거이 따랐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다”라고 했다. 백제의 ‘百’자는 ‘백성 백’자가 되고, ‘濟’자는 ‘따를 제’자로 해석하여 백성들이 즐거이 따른, 다시 말하면 백성들이 원하는 나라임을 천명한 것이다
--- p.257

문제는 백성의 나라라는 이름이 언제 붙여졌을까이다. 여러 가능성이 있지만, 백성들을 위한 나라를 지향했고, 실제 이를 실천한 무령왕 때 나라의 이름을 새롭게 해석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 p.259

《일본서기》 게이타이 6년 조에 의하면 백제는 무령왕 12년(512) 임나 4현을 왜로부터 할양받았다 한다. 《일본서기》의 왜곡된 시각을 걷어내면 이 기사는 실제로는 백제가 4현을 취한 것을 말해준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 임나 4현은 현재의 여수와 순천, 구례, 곡성 등 섬진강 하류 지역권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통설이다. 따라서 무령왕은 동성왕 때 확보된 전라도 서남 지역을 넘어 섬진강 하류 지역으로 연결되는 지점까지 지배력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 p.269

무령왕은 불안한 북방으로의 진출 못지않게 조용히 내실을 기하는 남방 정책을 수립하였는데, 섬진강 유역으로의 진출은 이 정책의 일환이다. 먼저 금강 상류를 장악하여 고구려와 신라 그리고 가야에 이르는 교통로를 통제했다. 이어 섬진강 중류인 기문을 장악하고, 하류인 대사를 단계적으로 장악하면서 남방 정책을 완결했다. 그 완결은 남해안의 교역항 확보이며, 해로뿐만 아니라 육로로도 연결되는 영역화의 일환이었다
--- p.273

무령왕 13년(513)에 오경박사 단양이가 왜로 파견되고, 516년에는 한고안무와 교체되는 등 3년 주기의 빈번한 교류는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아마 인적 교류 등 물품 선적이 필요하지 않은 때는 섬진강을 통한 교역로를 이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선진 문물의 정수인 유학이 중국에서 백제를 통해 왜로 전파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 p.280

《양직공도》에는 백제 지방 통치제도인 22담로에 이어 바로 ‘방소국旁小國’이라 하여 주변의 소국을 열거하고 있다. 지방과는 다른 결이지만 주변의 소국을 거느렸다는 표현을 하여 백제가 대국, 즉 큰 나라임을 과시하고 있다
--- p.289

갱위강국更爲强國은 말 그대로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러한 내용이 《양서》에 기술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 무령왕은 체제를 잘 정비하여 백제를 중흥시켰고,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수차례 격파하였으며, 전선을 한강 유역으로 확대했다. 내부적으로는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이루었지만 한편으로 이에 걸맞은 국제 사회의 대우도 필요했다. 그래서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맺었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는 내용을 양나라에 전달하면서 백제가 고구려를 능가하는 강국이 되었으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 p.292

백제의 요청에 양나라는 빠르게 화답했다. 양나라 황제가 동쪽을 편안하게 했다는 영동대장군이라는 작爵을 내려준 것이다. …… 무령왕 당시 고구려 안장왕은 ‘영동장군’이란 3품의 작을 받았다. 무령왕이 중국으로부터 고구려보다도 더 높은 작을 받은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무령왕은 그의 묘지석에 영동대장군이라는 작을 가장 먼저 기술할 정도로 이에 애착을 가졌다
--- p.293

523년 2월, 한성으로 행차한 무령왕은 한강 북쪽의 백성들을 징발해 쌍현성을 쌓게 했다. 3월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돌아왔으니 오랜 여정이었다. 그리고 5월에 운명하니 이는 무리한 일정 탓일 수도 있겠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마지막 여정을 보낸 게 아닌가 생각된다
--- p.294

묘지석은 당연히 아들인 성왕이 지었을 것이다. 성왕이 아버지 무령왕의 생전 이름인 사마에 더하여 시호를 바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영동대장군이란 작호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시호를 바칠 때 ‘무령’이란 이름을 지어 바쳤다. ‘무령’이란 ‘무력으로 주변을 편안하게 했다’라는 의미다. 무장의 이미지에 편안하게 했다는 ‘령’을 더한 것이다. 바로 무령왕의 시호는 그가 왕으로 재위했을 적 자취를 담은 이름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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