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초대 시장은 누구인가? 간단한 문제 같으면서도 조금은 복잡하다. 해방 직후 미군정 치하에서 임명된 부윤(府尹, 오늘날의 시장)이 있는가 하면, 정부 수립 후 임명된 시장, 시의회에서 선출된 시장, 시민이 뽑은 민선시장도 있다. 그리고 조직계층상으로는 경상남도 산하의 시장도 있고 정부 직할시장, 광역시장도 있다. 이와 같이 너무나 다양해서 언제 어느 시장을 초대 시장이라 해야 할지 시각에 따라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1945년 광복 이후 최초로 부산시정의 책임자였던 양성봉 부윤(시장)을 초대 시장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부 부산시장편, 양성봉 시장」중에서
필자는 부산시 34년간 재임 중에 18명의 시장을 모셨다. 그중에 훌륭한 시장은 너무 많다. ···(중략) 그중에서도 수많은 직원이 한결같이 존경하는 고매한인품의 시장이 있다. 그는 내무부에서 주사보 직급으로 처음 공무원을 시작할 때 ‘도시락 주사’란 얘기를 듣던 사람, 손재식 시장이다. 검소하고 절약하는 모습은 취임 후 첫 간부회의 때 드러났다. 그가 소매를 걷어 올리면서 두터운 내의를 드러내 보였다. “내복을 입으니까 웬만한 추위는 난방을 않고도 견딜만 한데…” 하는 것이다.
---「1부 부산시장편, 손재식 시장」중에서
동서고가도로 건설사업은 김영환 시장이 떠나기 한 달 전인1992년 12월 30일, 총 연장 10.6킬로미터 중 8.1킬로미터로 준공되어 제1단계 개통식을 가졌고, 전체 공정이 완전 준공된 것은 정문화 시장 때였다. 이 동서고가도로 사업비는 당초 2천169억 원으로 책정되었으나 최종 4천179억 원으로 늘어났으니 경부고속도로 건설 사업비인 500억 원의 8배가 넘는 금액이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너무나 엄청난 사업비가 투입된 셈이다. 그리고 이 사업의 추진은 계획에서부터 준공까지 9년이란 오랜 기간이 걸렸고, 거쳐 간 시장만 해도 7명이나 된다.
---「1부 부산시장편, 김영환 시장」중에서
해운대 신시가지 건설을 위한 구상은 1982년 최종호 시장 때부터 시작되었지만 그 후 6명의 시장이 거쳐 가는 동안 김영환시장 재임 시절 기공식만 가졌을 뿐 권역범위, 기존 마을의 제척문제, 아파트 간의 동 간 거리, 아파트의 층고 문제, 가로망, 도시가스냐 지역난방이냐 등등 여러 가지 난제들은 미결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골치 아픈 것이 도시가스냐, 지역난방이냐를 결정하는 문제였다. 당시 부산도시가스 사장은 홍승순 전 부산시 부시장이었고 감사엔 조삼규 전 내무국장, 상무엔 허규상 전 동구청장 등이 있었다. 그들은 지역난방을 하면 다이옥신 등 발암 물질이 발생한다며, 한사코 도시가스 난방을 주장했다. 그러나 정문화 시장은 도시가스 측의 끈질긴 주장과 요구에도 단호하게 지역난방을 지시하여 끝까지 관철시켰다. 2021년 현재 해운대 신시가지에는 10만이 넘는 인구가 거주한다. 신시가지 난방비는 여느 도시가스 난방비의 절반 수준이다.
---「1부 부산시장편, 정문화 시장」중에서
1945년 8월 광복을 맞았지만 그간 일본인 중심으로 운영되던 경남상공경제회는 그들이 즉각 철수하지 않아 우리 상공인들이 인수할 형편이 못 되었다. 이에 그와는 별도로 ‘상공위원회’라는 임의 단체를 설립했다. 위원장은 경남 피복공업협동조합장을 지낸 이춘옥이 맡고 3명의 부회장을 두었다. 김지태는 재정부장을 맡았지만, 위원장 이춘옥과 뜻이 맞지 않아 곧장 탈퇴했다. 그해 10월 미 군정 하리스 경남지사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경남상공경제회 조직과 업무 일체를 김지태에게 인계토록 통고해 왔다. 이어 간부들을 임명했는데 회두(會頭-회장)에 김지태, 부회두는 이춘옥과 이병희, 상무는 김낙제가 맡았다. 그 후 1946년 7월 임의 단체인 부산상공회의소 창립총회가 진행되었고 초대 회두를 선출했다. 김지태와 부산물자운영조합 문병주 이사장이 경합하여 김지태가 당선됐다. 김지태는 경남
상의 회두를 겸직했다.
---「2부 부산상공회의소 김지태 회장」중에서
강석진은 동명목재상사를 모기업으로 ‘동명산업’, ‘동명개발’, ‘동명중공업’, ‘동명식품’, ‘동성해운’ 등 수많은 계열사를 설립하여 동명그룹을 탄생시켰다.
기업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강석진은 여러 공직을 맡게 되지만 가장 대표적인 직함은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었다. 그는 부산상의 역사상 임기가 11년에 이르는 최장수 회장이다. 1967년 제6대 회장에 취임한 강석진은 그해 8월 서둘러 상의회관을 신창동 3층 건물에서 옛 부산시청 옆에 있던 미나카이(三中井) 건물로 옮겼다. 우선 전세였지만 이를 연고권으로 그 건물을 불하받게 된다.
---「2부 부산상공회의소 강석진 회장」중에서
1974년 11월 당시로서는 꿈만 같은 수출 5천만 불을 돌파하여 박정희 대통령에게 수출유공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 후에도 수출액은 76년부터 79년까지 매년 2억, 3억, 4억, 5억 달러로 급신장했다. 그때마다 2억 불 수출탑에서부터 5억 불 수출탑을 받았으니, 당시 국제화학이나 양정모의 위상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2부 부산상공회의소 양정모 회장」중에서
부산상공회의소 회장이라는 공인으로서 강병중 회장의 모습을 보면 먼저 부산지역 경제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삼성자동차 부산 유치를 위해 이미 YS(김영삼)가 불가로 결재한 것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끝끝내 그것을 뒤집고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중략) 그는 공과 사가 분명했다. 해외 출장을 가더라도 회사 일로 가는 것이냐 상공회의소 일로 가는 것이냐를 구분했고, 어느 곳에 화환을 보낼 때도 회사와의 관계 때문인지 상의와의 관계 때문인지를 확실히 했다. 당시만 해도 명절 때 상의 출입기자들에게 금일봉을 전달하는 관행이 있었는데, 그것도 반드시 사비로 지출했다. 그러니 강 회장의 판공비는 추경 한 번 올린 적이 없었고, 매년 증액하는 일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연말이 되어도 언제나 남아돌았다.
---「2부 부산상공회의소 강병중 회장」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