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생각과 치열한 논쟁이야말로 바이러스와 공존할 수 있는 인간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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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바이러스는 맨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흔히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사람이나 동물에게 질병을 일으키는 것을 병원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병원체는 다시 세균과 바이러스로 나뉩니다. 그럼 세균과 바이러스는 어떻게 구분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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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가 생물인지를 논하기 전에 먼저 생명이란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생명의 정의는 아직 합의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 철학 분야에서도 생명의 존재는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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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는 숙주의 생명이 다할 때 함께 죽습니다. 바꿔 말하면 숙주만 있다면 바이러스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마치 불사조처럼 말이죠. 어떤 바이러스가 있는데, 그 종이 계속 존재를 이어간다면 바이러스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곧 생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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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최근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평균기온이 높아지면서 모기의 서식지 또한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모기의 서식지가 확대된다는 것은 바이러스가 이동할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늘어난다는 뜻이겠죠. 기후위기와 바이러스로 인한 감염병의 확대를 결코 별개의 문제로 볼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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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도시개발, 지구온난화와 환경오염 등으로 살곳을 잃은 지구상의 많은 동물들이 점점 더 멸종위기로 내몰리고 있죠. 부메랑은 결국 우리 인간에게 돌아오고 있습니다. 지구상에서 다른 동물들이 사라질수록, 바이러스는 자신의 생존에 가장 유리한 타깃(target)으로 ‘인간’을 노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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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박쥐는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평소 적절한 양의 인터페론을 생성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우리처럼 과도한 면역반응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에 비하면 외부에서 침입한 바이러스에 대해 다소 느슨하게 대응하는 거죠. 그저 심각한 병원성만 통제할 뿐, 바이러스 자체를 죽이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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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 속에서 바이러스는 항상 함께해 왔습니다. 어쩌면 바이러스의 유구한 역사 속에 인간이 잠시 끼어든 것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겠네요. 무엇이든 간에 분명한 것은 인간이 말하는 역사의 발전은 바이러스가 쉽게 인간 사회로 들어오는 데 좋은 환경을 마련해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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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 장군이 겨우 180여 명의 군사만 이끌고 침략을 감행한 것도 실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당시 유럽의 기술력으로는 수많은 군사들을 배에 태워 그 먼 거리를 옮기는 데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죠. 식민지 개발이 절실했던 스페인이지만, 신대륙 진출은 한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승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승부의 결정적인 열쇠(Key)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존재가 쥐고 있었죠. 바로 ‘바이러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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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인지 첫 발견부터 수십 년간 에볼라바이러스는 단 한 번도 대유행, 즉 팬데믹으로 번진 적이 없습니다. 지극히 한정된 지역에서 잠시 유행하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죠. 그리고 한번 유행이 지나가면 희한하게 몇 년은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자들은 도대체 에볼라바이러스가 어디로 숨어드는지 알아낼 수 없었죠. 마치 유령이라도 지나간 듯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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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양과 태평양을 잇고, 남미까지 세력을 넓히려면 미국은 파나마 운하 건설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환경이었죠. 열악한 노동환경은 개선할 수 있지만, 감염병인 말라리아나 황열은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미국은 이 골치 아픈 문제를 꼭 해결해야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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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문제는 역시나 변종이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이미 바이러스의 생존 전략에 대해 같이 살펴봤습니다. 바이러스는 목표는 종의 지속이자 확장이죠. 이를 위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숙주, 즉 서식지를 넓혀가야 합니다. 서식지를 넓혀가려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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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에게 기생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 명의 주체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나 신념, 가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죠. 타인과 끊임없이 소통하고, 토론하며,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일관성 있게 가지고 가야 하는 가치와 신념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체적인 삶이며,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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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익숙함에 머물러 있으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그 익숙함을 넘어 새로운 것을 향한 도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때론 기존의 제도, 관습, 권력, 구조, 상식에 대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도전 때문에 좌절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난까지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이야말로 인간의 삶을 한층 가치 있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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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을 위해 목숨까지 건다는 것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의미가 없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만약 인간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사유하지 않았다면 바이러스 또한 발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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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사고는 비단 시험에서 과학 문제를 풀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법칙과 논리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자연의 법칙상 당연하다면 인정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 굳이 감정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죠.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이 세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법칙을 이해하고 순응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을 최소화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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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바이러스가 기존 숙주와는 다른 종인 낯선 인간의 몸에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숙주를 아프게 하거나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거죠. 그럼 그냥 익숙한 동물의 몸에서 편하게 살 일이지, 왜 굳이 적응하기도 힘든 낯선 인간에게 넘어오는 걸까요?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보면 목숨을 건 위험한 도박인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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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방패면역(shield immunity)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최근 유행하는 코로나19 감염을 비롯하여 어떤 감염병에 걸렸다가 완치돼 면역을 얻은 사람들이 사회에서 일종의 ‘방패’ 역할을 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얻을 수 있는 면역을 가리킵니다. 미국 조지아공과대학교 연구진은 최근 네이처메디슨 기고문을 통해 SIR 모형을 이용하여 방패면역 효과를 시뮬레이션한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 p.183
그런데 문제는 개개인의 자유를 무한정 허용하면 결과적으로 자유는 오히려 줄어든다는 점입니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을 정확하게 보여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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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코로나19는 이러한 성장 중심의 사고에 심각한 균열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는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고리들부터 파고들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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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폐물, 썩은 음식물 등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정을 특정 집단에게 투사하는 거죠. 이를 통해 특정 집단을 나와 다른 존재, 차별받아도 마땅한 존재로 만들어버립니다. 바이러스에 대한 혐오는 당연하지만,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에 대한 혐오는 ‘문화적 혐오’에 가깝습니다. 사람을 바이러스와 동일하게 생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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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은 개개인의 고유성을 보존하면서도 협력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앞으로는 봉쇄를 통한 국민국가(國民國家)의 강화보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이러스, 기후위기, 자원고갈, 인구증가 등과 같은 전 지구적인 문제는 한 국가의 역할만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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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드 바이러스의 시대에는 이러한 복잡계의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과거의 경험이나 지식만으로 미래사회에 제대로 대비하는 것은 힘들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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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일리치가 바라는 교육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그는 공부하기를 원하는 모두에게 나이에 관계없이 필요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야 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나누고자 원하는 사람들에게 그로부터 배우고자 원하는 사람을 찾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곧 ‘학습 네트워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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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단순히 교과수업만 이루어지는 지적인 배움의 장소만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지적인 갈증은 온라인을 통해서 충분히, 어쩌면 더 나은 방식으로 메울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관계의 욕구, 인정의 욕구 등은 충분히 메울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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