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하의 새벽안개를 헤치고
만약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에게 배터리처럼 똑같은 시간이 주어졌다면 세상은 어떻게 변했을까? 좀 더 혼란스럽고 각박해졌을까 아니면 안정되고 인정이 넘쳤을까? 그러나 인간은 불행스럽게도 자신에게 주어진 생존의 시간을 알지 못한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가 시간의 신 크로노스를 죽임으로써 올림포스의 신들은 불멸의 시간을 살게 되었지만, 인간에겐 시간의 지배를 받아 늙고 죽게 되는 운명의 족쇄가 채워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제우스의 아들 카이로스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시간을 상대적으로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이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아무나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전해지는 카이로스의 모습에서 기회의 속성을 알 수 있다. 앞과 옆머리는 길어서 쉽게 알아볼 수 없고 알아본 자만이 붙잡을 수 있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여서 지나고 나면 붙잡지 못한다.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양발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기회가 왔을 때 재빨리 판단해서 결단하라는 의미다.
인간이 카이로스를 붙잡았을 때 안락과 행운이 따르지만 거기엔 욕망도 꿈틀댄다.
창문으로 스며든 교교한 달빛마저 잔망스러웠다.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으나 왕치관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여름이 지났는데도 푹푹 찌던 습기 많은 공기는 한밤이 되어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금방 샤워한 몸을 데웠다. 밤 깊은 시간인데도 거리의 부산스러운 사람들의 발걸음과 수런거리는 말소리가 몹시 신경에 거슬렸다. 붕대 감은 팔마저 욱신거렸다. 오늘따라 예약하지 않은 손님들이 갑자기 몰려드는 바람에 정신줄 놓고 웍을 놀리다가 기름이 튀는 바람에 생채기가 났다.
비몽사몽 간에 문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는 링링이 분명했다.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2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치관은 황급히 바지를 꿰고 밖으로 나가 문을 열었다.
“이 밤중에 무슨 일이야?”
링링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숨이 거칠었다. 그녀는 문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치관의 손을 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치관 큰일 났어. 우리 여길 떠나야 해. 그것도 날이 밝기 전 당장.”
“아니 무슨 일인데?”
“공산당 군대가 몰려오고 있대. 가만히 앉아 개죽음당할 순 없잖아? 우린 이미 피난 준비를 끝냈어. 넌 어떻게 할 거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치관은 갑자기 가슴이 뛰며 머릿속이 환하게 비어감을 느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공산당이 득세해 대륙의 넓은 지역을 접수해 나가면서 국민당원들을 숙청해나가자 장제스(蔣介石)를 비롯한 국민당 간부들과 추종세력들은 본토에서 떨어진 큰 섬 타이완(臺灣)으로 본부를 옮겼다는 것을 왕치관도 소문 들어 알고 있었다.
링링의 아버지 양수이핑 씨는 국민당 요녕성(遼寧省) 간부였다. 강하(康河)에 살면서 열 척의 화물선을 운영하는 갑부였다. 그런 부르주아를 공산당원들이 가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미리부터 타이완으로 건너갈 계획을 세우고 재산을 정리하고 있다는 걸 링링에게 들었었다.
“왜 대답이 없어? 같이 안 갈 거야?”
생각에 골몰해 있는 치관을 보며 링링이 물었다.
“아버님께 말씀드렸더니 막무가내야. 그 연세에 어디 가서 무슨 영화 누리겠다고 고향을 뜨냐고….”
“그럼 우린 이게 마지막이야?”
금세 링링의 눈가엔 그렁그렁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어렸을 적부터 한동네에서 자라면서 쌓아온 우정은 사랑으로 변했고 결혼까지 약속한 링링이었다. 링링의 아버지는 부잣집 사위를 염두에 두고 치관을 무시했지만 링링의 마음은 치관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 링링을 놓치고 싶지 않았지만 노쇠한 아버지와 병든 어머니, 어린 동생을 두고 떠날 수는 없었다. 치관은 링링을 껴안으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미안해. 어디 가서든 잘 살아. 운이 좋으면 언젠간 만날 수 있겠지….”
“차라리 내가 남을까?”
“아니야. 공산당 패거리들이 가만 놔두지 않을 거야. 난 링링을 지킬 힘이 없어.”
링링이 치관을 밀치며 떨어져 나갔다.
“우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기로 맹세했잖아?”
“링링, 그건 맞는 말이지만 지금 형편으론 같이 갈 수 없어.”
“그럼 배 속의 아이는 어떻게 할 건데?”
갑자기 치관은 머리카락이 곧추서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지금 그 말… 임신한 거야?”
“그래. 아빠한테도 말했어. 함께 가도록 허락도 받았단 말이야.”
“이걸 어쩌지? 미안해, 정말 미안해. 어디 건 살아만 있어. 내 꼭 찾아갈게.”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나 혼자 어떻게 하라고? 난 몰라.”
링링은 눈물로 얼룩져 엉망이 된 얼굴을 치관의 가슴에 묻고 떨며 울었다. 치관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링링의 등만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렇게 망연자실한 채 서 있는데 뒷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둘이 놀라며 떨어져 섰다. 치관의 아버지였다. 링링은 부친을 보자 인사도 없이 ‘난 몰라’를 연발하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치관이 따라가지 못하고 뻘쭘한 자세로 서 있을 때 아버지가 식탁 의자를 빼내 앉으며 무거운 분위기를 깼다.
“네 얘기 듣고 많이 생각했다. 창창한 네 앞길을 막는 게 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게 결론이다. 어서 짐을 챙기고 따라가거라.”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치관은 귀를 의심했다.
“예? 우리 식구들은 어쩌구요?”
“너도 이제 독립해야지. 우린 걱정 마라, 동생 있잖니. 치영이가 내년이면 졸업이니 그놈이 식구들 밥 굶기진 않을 거다. 링링 같은 애를 어디서 만나겠니. 눈에서 멀어지면 끝이야.”
그러면서 부친은 안으로 들어갔다. 치관의 마음이 요동치기 시작하면서 기어코 눈물 두 줄기가 떨어졌다. 사내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지만, 장남으로서 가족과의 생이별이라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부친이 두 손에 물건을 들고 들어왔다.
“남자 자식이 그렇게 함부로 눈물 흘리는 거 아니라고 했지?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고향을 지키고 있을 테니 세상 좋아지면 찾아오너라.”
그러면서 들고 온 도마 칼과 웍을 내밀었다.
“자 이거 가지고 가거라.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다. 어디 간들 네 실력이면….”
평생 뜨거운 불 옆에서 쇠를 다루어온 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게 분명했다. 치관의 얼굴에선 다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내미는 물건을 받아들며 슬쩍 훔쳐본 아버지는 무덤덤한 척했으나 검은 얼굴이 불그죽죽한 것으로 보아 울음을 참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서 짐을 챙겨라. 어머닌 자고 있으니 깨우지 말고 가거라. 나중에 내가 알아듣도록 얘기하마.”
“아버지. 고맙습니다.”
치관은 아버지를 와락 껴안았다. 품에 와 닿는 앙상한 뼈마디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멀리서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렸다. 부친이 살며시 몸을 뺐다.
“어서 가거라.”
치관이 안으로 들어가자 부친은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쓰윽 훔치며 걸음을 옮겼다.
행장을 꾸리고 밖으로 나오는데 물끄러미 치관을 바라보는 검은 물체를 발견했다. 치관은 도둑질하다 들킨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형! 가지 마.”
자세히 보니 동생 치영이었다. 잠도 안 자고 부친과 나누는 이야길 엿들은 모양이었다.
치관은 안쓰러운 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듯 치영의 손을 덥석 잡았다.
“치영아, 미안하다. 부모님 잘 부탁한다. 꼭 다시 돌아올게.”
치영은 혼자 떠나는 형을 야속한 눈으로 쳐다보며 대답 대신 눈물 두 줄기를 뚝 흘렸다.
치관은 그 눈물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닦으며 동생을 와락 끌어안았다.
뱃고동 소리가 걸음을 재촉했다. 커다란 배낭을 둘러맨 치관은 거리의 자욱한 안개를 헤치며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렸다. 부둣가에 다다르니 링링네 커다란 배 세 척이 안개 속에서 사람들을 삼키고 있었다. 링링을 찾아서 이리저리 한참을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맨 앞에 세워진 해상호 갑판 위에서 치관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링링이었다.
1949년 9월 무덥던 날, 해상호(海祥號)를 비롯한 세 척의 배는 기다란 뱃고동을 남기고 짙은 안개 속을 헤치며 강하를 떠났다.
해상호에는 링링네 가족과 친척 등 30여 명이 타고 있었다. 갑판 위에는 쌀가마니를 비롯한 살림 도구들과 짐들이 쌓여 있었고, 2층에는 주방시설이 있는 식당과 연회장, 고급 손님들을 위한 특실이 있었다. 1층은 대여섯 명이 생활할 수 있는 방이 여러 개 있었다. 배 안의 사람들은 인척간이어서 저들끼리는 화기애애하게 소통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지만 치관을 소 닭 보듯 했다. 치관은 가장이 된다는 기쁨보다도 미래에 대한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다. 장인의 배려로 침대 있는 방을 링링과 함께 쓰면서 식당 취사를 자원했다.
아침과 점심을 각자가 해결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식사가 준비되었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들었다. 링링의 아버지는 주위를 환기하며 치관과 링링을 일으켜 세우고는 타이완에 도착하면 결혼식을 올릴 거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사람들은 그제야 치관을 왕 서방이라고 부르며 살갑게 대했다.
밤이 되면서 바람이 강해졌다. 술잔을 기울리고 춤을 추며 흥에 겹던 분위기가 배가 몹시 흔들리면서 두려움으로 변했다. 사람들이 술에 취하기도 했지만 멀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고 휘청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접시들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소리에 사람들은 비명까지 질렀다. 곧 선장이 내려오더니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고 선주인 양수이핑에게 보고했다.
“9월에 태풍이라니?”
양수이핑은 너그러운 인품만큼이나 태연했다. 그러면서 좌중들을 진정시킨 후, 가장 가까운 한국의 항구를 물었다.
“금방 지나친 인천이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 그럼 배를 돌려 인천으로 가자. 거기는 우리 배가 드나들던 곳이고, 우리 한족 마을이 있는 곳이다.”
인천 항구에 세 척의 배를 정박시키고 양수이핑은 측근들과 잠시 내려 마을을 정찰했다. 한족 마을(차이나타운)에는 중국식 건물도 많았다. 오래전 터를 잡은 화교들이 지나가는 동족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양수이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각자 자리를 잡아 짐을 풀라고 했다. 그제야 신양호에는 링링의 외가 쪽 사람들, 대양호에는 국민당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이들을 포함해서 족히 백이삼십 명은 되어 보였다.
돈이 있는 사람들은 세내어 집을 얻었고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선상 생활을 했다.
인천에 있는 화교들은 옷감, 피혁 제품, 수입품 잡화 등을 본토에서 구입해 와서 판매하고 있었다. 조선 토산품을 중국에 수출하거나, 정기 여객선을 이용해 행상을 하기도 하고, 음식점을 하거나 농사를 짓는 등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었다.
배를 타고 온 일행 중에 운 좋은 사람들은 화교가 운영하는 가게에 취업했지만, 건설 현장이나 뱃일, 농사일, 허드렛일, 행상 등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링링은 화교소학교에 취업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치관은 화교가 운영하는 음식점에 주방 보조로 들어갔다. 그때 한국 사람들이 춘장에 볶은 짜장면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장을 담그는 기법과 요리 기술을 습득했다.
어느 볕이 좋은 가을날, 치관과 링링은 화교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 양수이핑은 화교협회에 가입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미국, 호주, 유럽 등에 뿌리내린 한족의 강인함을 설파하고 상부상조하며 살아갈 것을 권유했다.
사람들은 질경이처럼 용케도 매서운 겨울 바닷바람을 잘 견뎌냈다. 봄이 한창이던 5월 장미꽃 향기를 타고 인천 산 아기가 태어났다. 양수이핑은 외손자의 출생을 기뻐하며 ‘고향을 잊지 말고 강하의 용이 되라’는 뜻에서 왕강룡(王康龍)이라고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피란생활이 안정을 찾아가던 6월 말에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38선 이북의 인민군들이 쳐들어왔다는 것이었다. 양수이핑은 강하에서 온 사람들 중 어른들을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했다. 그들의 의견은 극명하게 갈렸다.
“우린 국민당과 관계없으니 중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도 고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설마 죽이기야 하겠소?”
“원래 목적지인 타이완으로 갑시다.”
“우린 죽든 살든 그냥 인천에 남겠습니다. 이제 겨우 자리를 잡았는데….”
“공산당이 지긋지긋한데 차라리 일본으로 갑시다.”
“한국 사람들 따라 부산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자코 의견을 듣던 양수이핑이 결론을 내렸다.
“배 세척을 다시 띄우겠소이다. 타이완은 배가 낡고 멀어 갈 수 없소. 대양호는 고향 강하로 가도록 하고 나머지 두 척은 부산으로 행선지를 정하겠습니다. 필요한 살림살이만 정리하여 오늘 자정까지 배에 오르도록 하시오.”
강하로 가는 대양호는 재회를 약속하며 먼저 떠났다. 해상호와 신양호는 자정을 지나 인원을 확인하고 부산으로 향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