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채소를 마주하는 일은 단순히 좀 더 건강하게 먹는 것과는 달랐다. 기존의 일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온전하게 시작부터 끝까지 만들어 가는 감각이었다. 회사에서 내가 하는 일이 극히 일부분이라면 채소를 사러 가고, 고르고, 손질하고, 요리하고, 플레이팅을 하고, 사진 찍어 SNS에 올리는 일은 스스로 독립적인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에 가까웠다. 나의 일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회색빛 무채색 일상에 총천연색 화면이 켜진 것만 같았다. 실제로 채소의 색이 그만큼 다채롭기 때문에 밥상의 색채도 다양해졌다. 그렇게 퇴근 후 매일매일 채소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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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 수프의 기운이 온 집 안을 휘감는다. 그저 채수 냄새라고 하기에는 깊고 진하고 풍부하다. 집 안 가득 토마토 베이스의 각종 야채들 향을 맡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 홀로 있는 이 공간을 무언가로 채웠다는 안도감 같기도 하다. 이렇게 끓여 두면 며칠은 두고두고 먹을 수 있다는 든든함이기도 하다. 차게 먹어도 데워 먹어도 몇 번을 반복해서 데워도 한결같이 맛있는 이 무적의 수프를 충전했다는 뿌듯함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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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달고 활기찬 맛이냐면, 무화과가 들어간 요리들은 그 이름에서 ‘무화과’를 빼먹지 않고 표기한다. 그 존재감이 언제나 주연급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무화과 요리는 무화과 두부 무침이다. 무화과 자체가 매우 달기 때문에 단맛을 해치지 않는 재료와 잘 어울린다. 이때 두부는 연두부보다는 단단한 두부가 좋다.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단단한 두부를 체에 올려서 물기를 뺀다. 물기가 어느 정도 빠지면 두부를 으깬다. 손으로 으깨도 좋고, 포테이토 매셔나 포크로 으깨도 된다. 으깬 두부에 매실청, 깨소금, 두유를 조금씩 넣고 섞는다. 거기에 조각낸 무화과를 버무려 내면 완성. 두부가 있어서 생각보다 든든하고, 치즈나 꿀로 맛을 더한 것이 아니어서 담백하게 달다. 저녁에 운동을 마치고 먹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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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채소를 살 때는 채소, 생산자, 소비자가 모두 각각의 점처럼 존재한다. 채소 꾸러미를 이용하면 각각의 점이었던 생산자와 내가 선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채소가 놓인다. 서로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이어져 있기 때문에 채소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이야기가 된다.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종이에 둘둘 말린 채소가 힘없이 도착해도 차가운 물에 담가 두면 금방 살아난다는 것을 안다. 긴 장마로 농사가 힘들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꾸러미를 보내 준 노력을 안다. 이 채소를 보낸 당신과 나 사이, 우리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자칫 구차해 보일 수 있는 것들을 다정하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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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채소를 가까이하면서 일상을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다. 채소를 조금 더 먹고, 더 맛있게 먹고, 더 건강하게 구매하고, 채소가 나에게 오기까지의 이야기를 궁금해하고,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이 줄어들기를 바라게 되었다. 기분 좋은 경험들 위로 완벽하진 않지만 단단한 시도들이 쌓인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가고, 자주 미숙하다. 하지만 모르던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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