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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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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 소설가의 쓰는 일, 걷는 일, 사랑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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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3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236쪽 | 276g | 128*200*14mm
ISBN13 9791166372667
ISBN10 1166372669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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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늪에 끝없이 빠져들 때는 “힘 내, 너라면 쓸 수 있어. 자, 용기를 내서 앞으로 나아가는 거야!” 하고 큰 소리로 기운차게 응원해주는 사람보다, 이요르처럼 한숨을 쉬면서 저 깊은 바닥까지 같이 내려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에너지가 넘치는 자신만만한 사람은 결국 늪가의 안전한 곳에 서서, 이쪽을 들여다보기만 한다. 그 사람의 격려는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허망한 거품이 되어 터져버린다. 아아, 저 사람한테는 멋진 원고를 계속 쓸 수 있는 재능이 있나 봐, 그런데 나는…… 하고 비교하면서 점점 우울해질 뿐이다.
그에 비하면 이요르는 얼마나 마음이 고운지 모르겠다. 도움을 청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잡아당기면 그저 아프기만 할 뿐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해야 같이 한숨을 쉬는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다.
--- p.18, 「이요르의 항아리 속」 중에서

“괜찮으세요, 오가와 씨?”
배급사의 홍보 담당 여직원이 내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한시라도 빨리 러브가 보고 싶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하반신이 약해진 러브는 자기 잠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뭘 하는 건지 옆얼굴을 나무 발판에 바짝 대고 혀를 쭉 내밀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오늘, 귀여운 개 영화를 보고 왔어. 너랑 똑같이 생긴 래브라도였어.”
그렇게 말을 걸어도 혀만 날름거렸지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잘 들여다보니, 나무 발판 틈에 떨어진 사료를 집으려는 듯했다. 겨우 사료 한 톨 때문에 그렇게까지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고서, 러브가 아직 조금은 더 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 p.55, 「그때가 오면」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는 뭐라 대답하기가 어렵지만, 가장 좋아하는 제목이 뭐냐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다. 존 맥그리거의 《기적을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1997년 8월 31일, 영국 북부의 어느 거리에 사는 사람들의 하루를 묘사한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일상의 사소한 장면 장면이 눈에 보이지 않는 위대한 힘에 의해 서로 이어지는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은 마룻대에 앉았던 비둘기가 일제히 날아오르는 것을 가리키며 딸에게 “새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는 걸 봤니?” 하고 묻는다. 그리고 이는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는 채 지나가는 특별한 일이라고 설명한다. 기적을 말하는 이가 없다면, 그것을 어찌 기적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이 책의 책등을 볼 때마다, 누군가가 내 귀에 소설을 쓰는 의미를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새들이 서로 부딪치지 않고 날아오르는 기적을 글로 쓰고, 거기에 제목을 붙여 존하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내게도 번듯한 역할이 있다, 하고 생각된다. 그리고 다시 쓰다 만 소설 앞에 앉는다.
--- p.89~90, 「책등의 비밀」 중에서

그러다 땀이 배어 나올 즈음, ‘언짢음’의 형태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한 걸음 흙을 밟을 때마다 몸속에서 발생한 작은 진동이 잔물결처럼 퍼져 가슴을 채운다. 그리고 ‘언짢음’의 원천에 도달한다. 비안개처럼 답답하게 끼어 있던 그것이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입자의 윤곽이 확실해지기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체에 거른 것처럼 투득투득 가슴속 으로 가라앉는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수풀을 헤치고 별을 올려다보면서 사냥을 위해 걸음을 내디딘다.
어느 틈엔가 ‘언짢음’은 조그만 자갈돌만 하게 뭉쳐졌다. 두서없었던 것이 손바닥에 쥐어질 만큼 조그맣게 응축된 것이다. 걷는 리듬에 맞춰 데굴, 데굴, 가슴뼈 사이에 굴러다닌다.
--- p.132~133, 「걷다 보면 괜찮아질 거야」 중에서

지칠 대로 지쳐 집에 돌아오면, 러브가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고 산책도 못 한 채 계속 방치되어 있었는데 불평 한마디 없고, 기다리다 지친 모습도 아니고, 오히려 ‘무슨 일이 있나요? 괜찮아요?’ 하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는 꼬리를 흔들어주었다. 산책하러 나가면 보통 때와는 다른 어둠에 겁을 먹지도 않고, 평소 이상으로 기운차게 걸었다. 내가 불안을 털어놓으면 그때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걱정거리는 제쳐놓고, 아무튼 산책을 하시죠. 산책이 최고잖아요’ 하는 말이라도 하듯, 매력적인 냄새가 숨어 있는 다음 수풀을 향해 고개를 획 돌렸다.
--- p.174, 「아무튼 산책을 하시죠」 중에서

걸으면서 늘 지금 쓰다가 막힌 소설의 상태를 정리하고, 다음 장면에서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정하곤 했어요. 또는 혼란스러운 현실의 문제를 풀었고, ‘뭐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곤 했습니다. 러브로부터 이렇게나 큰 힘을 얻었다는 걸 지금에야 깨닫는군요.
어쩔 수 없으니, 지금은 혼자 걷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다가 피곤해질 때, 기분 나쁜 일이 있었을 때, “아, 그래. 산책을 하면 되지” 하고 중얼거리고는 선크림을 바르고 집을 나섭니다. 러브와 함께 나설 때는 필수품이던 목줄과 비닐봉지는 이제 없어도 됩니다. 옆에서 같이 걷는 40킬로그램의 거구가 없으니 사실 손이 허허롭습니다. 걷는 길목의 모든 나무와 수풀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던 러브와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다. 허전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그러니 더욱 산책이 필요하지요.
--- p.216, 「작가 후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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