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는 다채로운 매력을 뽐낸다. 나중에 자세히 살피기에 추려 말하면, 세대는 간편함과 가소성이 그 큰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탁월한 매력을 뽐낸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우리 세대’의 일원임을 밝혀주고, 그러한 우리를 역사의 흐름 속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돕는다. 다른 세대는 우리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 속에 서식하며, 그들의 시간의 서식처는 ‘너무 이르거나 늦어서’ 역사의 흐름을 방해한다. 말하자면, 세대는 차이를 만들거나 유사성을 찾는 데 유용한 정체성의 근거이자 도구다. 그 덕에 세대는 일상에 깊이 뿌리박은 최적의 정치 언어 그리고 정치적 게임의 도구가 된다. 쉽고 빠르게 우리 편과 상대편을 갈라내어, 지지자를 만들거나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내세울 수 있다.
--- p.22
최근 20대 후반의 기자들과 점심을 같이했다. 그들은 입사 때부터 ‘회사에서 적어도 국장 정도는 해봐야지’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들의 상사는 자신의 젊은 시절에 비추어 후배들을 대한다. “이 친구들, 내 20대와 마찬가지로 높이 오르고 싶을 거야.” 상사는 ‘내가 너희들의 미래다’라는 관점을 고집하고, 젊은 기자들은 ‘나름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이 선배의 길을 따르지 않거나 못할 거라(내가 충성한다고 회사가 나를 지켜주지 않아) 생각한다. 여기서 긴장과 잡음이 발생한다. 상사는 연령 세대의 관점에서 후배를 대하지만, 후배들은 동년배 세대의 입장에서 상사를 대한다. ‘내가 거쳐 온 길을 너희도 걸을 것’이라는 연속성의 입장과, ‘당신은 당신의 길을 걸었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차이를 강조하는 관점의 갈등이다.
--- p.41~42
청년성이 만인이 탐하는 상품이자 좇아야만 하는 가치가 되어버렸다는 것은, 곧 청년성이 더 이상 청년의 독점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젊은이로부터 청년성이 해방됨으로써, 청년은 청춘을 빼앗기고 노인은 청춘을 강요받는다. 사춘기 청년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그러한 사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바처럼 사춘기 청년들이 세상에 가득하다. 낮은 출산율, 높은 주거비용, 고용 불안의 측면에서 다른 OECD 회원국을 압도한다. 낮은 출산율은 부모 되기를 방해하고, 높은 주거비용은 독립생활을 어렵게 하며, 고용 불안은 안정적 직장을 취득하기 힘들게 만든다. 한국의 청년들은 사춘기 청년으로 지체되면서 성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사춘기 청년은 세대 전쟁의 훌륭한 명분이다. 물론 명분일 뿐이다. 세대 전쟁의 해결책은 승자가 편취한 패자의 몫을 승자로부터 박탈하기 위해 그들 특권의 근간인 제도와 규제와 기득권을 창조적으로 파괴하자는 것이지만, 그러한 개혁이 실제로 원하는 결과를 만들어낼지에 대해서는 매우 의심스럽다. 앞으로 살피겠지만, 기성세대나 노년 세대를 겨냥하는 세대 전쟁론적인 개혁의 예리한 창은 문제의 구조적 원인, 예컨대 자본, 기업, 그에 기생하는 정치권력과 같은 원인들을 겨누지 않는다. 그런 탓에 세대 전쟁론이 내세우는 청년에 대한 배려는 말잔치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청년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 차별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
--- p.79~81
개혁, 혁명, 정의, 불평등과 같은 개념들은 오랫동안 진보 세력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용어들을 기업이나 보수 세력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프랑크 눌마이어의 말에 따라, 이를 “개념의 점거”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 1970년대 보수 진영이 개념을 점거했다. 한 예가 바로 세대 형평성과 정의다. 그로써 계급이나 계층 또는 이데올로기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용어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투쟁 구호로 사용하였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 개혁 담론 역시 그러한 용례를 충실히 따랐다.
--- p.140
두 형식의 세대, 곧 나이에 따라 ‘분류된’ 세대와 ‘우리 의식’을 갖게 된 세대를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유명한 말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여성이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처럼, 세대는 그렇게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여성/남성이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처럼, 세대는 나이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 생물학적 성(섹스)과 사회문화적인 성별(젠더)이 다른 것처럼, 연령 세대와 사회문화(정체성) 세대도 다르다. 연령이 같거나 유사한 사람들을 세대로 분류할 수 있지만, 그렇게 분류된 세대가 고유한 우리 의식, 그러니까 ‘집합적 자기의식’을 자연스레 지닐 수는 없다. 말하자면 나이는 세대가 형성되는 데 매우 중요한 조건이지만, 나이가 비슷하다고 해서 스스로를 하나의 공동체로 생각하는 세대가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질문은 세대의 존재 유무가 아니라 ‘어떻게 세대가 만들어지는지’를 향해야 한다.
--- p.157~58
베른트 바이스브로트는 독일이 20세기에 일으킨 첫번째 전쟁이 세대 형성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검토한 후에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중요한 것은 “전쟁 경험의 가공이다.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 고대했던 정체성의 경험 공간으로서 그것의 ‘신화’에 주목해야 한다.” 전쟁은 민족사회주의(나치)라는 청년 세대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는데, 그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의 본디 경험이 아니다. 나치 청년들은 나이가 어려서 전쟁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다. 그들을 결집시킨 것은 자신들이 원했던 모습으로 채색된 전쟁의 신화적 경험이었다. 이는 앞서 말한 표현 능력과 관철 능력의 문제다. 전쟁과 같은 트라우마틱한 사건은 분명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가공하여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관철시키는 능력이다.
--- p.171~72
제발트와 부데가 말하는 시간 고향은 사전적 의미의 고향, 가령 나고 자란 곳 또는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 아니다. 시간 고향은 하나의 “기억된 감정의 풍경”이다. 어떤 세대에 속해 있다는 감정적 느낌이나 자각이라 말할 수 있는 시간 고향은 특정한 장소를 지칭하지 않는다.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 곧 고향 친구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그들과 함께 살아낸 시간을 통해서 정의된다. 시가나 고향 친구들, 줄여서 시간의 향우는 공간 근접성을 통해 가까워진 것이 아니다. 시간의 향우들은 유사한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 공통의 감정과 감각으로, 가까운 또는 이웃한 느낌을 지니게 된다. 내가 “벗어날 수 없는 뭔가를, 그리고 나와 비슷한 연배들과 공유하지만 명백히 언급되지 않는 ‘우리’라는 감정의 토대인 뭔가”를 나는 시간의 향우들과 공유한다. 또한 시간 고향은 “망각에 대항하여 이의를 제기”한다. “제발트는 자신이 속한 세대에게 그들의 끔찍한 기원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시간 고향은 “역사의 단절”이다. 이전과 다른 역사에서 자신과 동년배들의 결속을 찾는다. 요컨대 시간 고향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우리 감정’의 토대이고, 망각에 이의를 제기하고, 단절을 통해 세대를 결속한다.
--- p.181~82
한국에서 노인이 겪는 나름의 고충이 있다. 그 고충은 사회적 고립과 함께 노인들의 삶을 힘겹게 한다. 그들은 또한 고유한 삶의 경험을 지니고 있다. 박정희 시대에 청소년기나 청년기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보수적인 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국정 농단과 탄핵을 거치면서 나타난 인지부조화 역시 활용 대상이다. 말하자면, 정치 세대인 맞불 어르신은 다섯 가지 요인들이 결합한 결과물이다. ①노인으로서의 고충, ②사회적 고립, ③시간 고향에서 비롯한, 세대 대상을 중심으로 응집한 공통의 경험, ④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의 역할, ⑤시간 고향의 상실이 야기한 인지부조화. ①과 ②는 사회적 맥락, ③은 세대 형성의 필요조건, ④와 ⑤는 충분조건이다. 요컨대 정치 세대로서의 맞불 어르신들은 세대 게임 플레이어들의 도움과 탄핵이 야기한 인지부조화 때문에 세대로 결정結晶되었다.
--- p.215~16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여주지만 두 가지 세대 원형, 곧 독일의 기젤라 베른젠과 윤덕수(「국제시장」)의 공통점은 이거다. “역사적 산증인들의 세대 경험 이야기는 자신들의 경험과 현재의 요구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청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대성 연구는 과거의 체험과 마찬가지로 화자의 현재적 삶에도 주목해야 한다.” 기젤라 베른젠이 현재적 필요를 독일 전후 재건기라는 시간 고향에 투사한 것처럼, 현실의 윤덕수들도 현재적 필요를 ‘1970년대’라는 시간 고향에 투사한다. ‘조국 근대화’를 위해 자신들이 희생한 것에 관심을 가져달란 말이다. 자신들의 공헌을 인정하라는 요구다. 그에 더하여 열악한 살림살이와 악화된 건강에 대한―사회와 국가의 보살핌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에 대한―관심을 원한다. 따라서 “한 세대의 시간 고향은 언제나 매우 시의적절하다.” 그들의 경험이 현재의 요구라는 필터를 거쳐서 시간 고향의 스크린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과거 경험이 지금의 요구에 따라 각색되어 시간 고향에 대한 추억으로 상영되기 때문에 시의적절한 것이다. 요컨대, 1970년대 향우회원들의 세대 이야기는 그들의 현재 고충과 시간 고향에 대한 기억이 결합된 요구이자 주장이다.
--- p.231~132
세대 갈등은 다른 사회집단의 갈등과 완전히 다르게 구조화되어 있다. 사람들은 전체 생애 주기를 거친다. 현재 노인은 과거에 청년이었고, 현재 청년은 미래에 노인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젊은이 역시 자신이 노인이 되었을 때를 현재의 노인과 함께 고민하게 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노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기에 젊은이의 고민에 동참한다. 바로 이런 점에서 세대 갈등은 다른 사회집단의 갈등과 확연히 다르다. 요컨대 세대 갈등은 다른 사회 갈등과 궤를 달리한다. 그러나 세대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세대 갈등을 온갖 갈등과 뒤섞어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래야 자신들의 말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의도가 은폐되고, 나름의 목적 실현이 수월해진다.
--- p.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