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馬
말이 있다. 눈밭 위의 하얀 달만큼 눈부시게 하얀 말.
화면 위 하얀 말이 꽃 밭을 가로지른다. 가로지르기도 하고 날아가기도 하고 그 영험함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부유한다.
그 말이 작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쓰으윽.
그렇게 들어온 말 한 마리는 작가를 태우고 달리기 시작한다. 여기로, 저기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 줄 아는 말은 작가의 꿈이라는 강을 넘기 시작한다. 말은 그를 자유롭게 했다.
말을 그리던 처음쯤 작가, 유혜정은 아직 말과 낯을 가리고 있다. 말은 작가에게 동경과 꿈의 대상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투영된 대상인 하얀 말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그것이 ‘지독한 사랑의 결실’이 될 것이라는 작가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을지 모른다. 부유하듯 달아나는 말을 잡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닐터이니. 혹은 말은 ‘꿈과 강’이므로 영원히 잡히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니. 우리가 타거나 혹은 자유롭게 달리는 말에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초월적 힘을 부여하는 것은 일종의 물신적 행위이고 근본적으로 이러한 대상에 부여하는 접근불가능함은 지독하고 환상적인 (종종 실패한) 사랑으로 끝나길 원하기 때문이다. 이 지독한 사랑의 끝에서 아마도 작가는 ‘꿈과 강’이라는 환상 혹은 욕망 앞에 서있게 될 것이란 걸 직감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쩌면 용감하게도 어느 순간 작가는 말에 접근한다. 접근불가능한 환상적, 물신적 말은 친근하고 친절한, 그리고 유쾌한 말이 된다. 혼자 꽃밭을 가로지르던 말은 이제 춤을 추기도 하고 소녀를 태우기도 하고, 다른 말을 태우기도 한다. 그리고 말은 대체로 웃고 있다. 이제 환상은 다시 속도를 낸다. 말에 대한 친밀성의 경험 혹은 인식에도 불구하고 말은 여전히 (미세하게 다른 경로로) 환상적이고 물신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작가가 ‘조야백’이라는 말에게서 받았던 ‘인상’은 이제 작가
의 세계 안에서 꿈과 환상과 현실을 넘나든다. 말은 더 장식적이 되고, 더 표현적이 된다.
마술과 꿈의 세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세계에 대해 어린아이가 처음 경험하는 것은 “어른들이 좀 더 강하다”는 깨달음이 아니라 “오히려 어른들이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깨달음이라고 말했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행복은 마술을 통해서만 얻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아감벤은 행복이 당위적이거나, 도덕적, 이성적 주체의 노력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인식대상이 아니며 주체를 초과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초자연적 힘 혹은 비밀을 품고 있는 마술의 알 수 없음을 통해서만 행복은 “우리의 것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린시절 알게 되는 슬픔, 즉 마술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슬픔을 내쫓기 위해 우리는 여전히 마술을 통과해야 한다.
어린 아이는 자신의 외부 세계를 마법이 걸린 세계처럼 바라본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는 아이가 하찮은 사물일지라도 그것에 “생생한 흥미를 느끼는” 생생한 인상을 갖는 개체이며 “아이가 형체와 색채를 마구 빨아들이면서 느끼는 기쁨보다 더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은 없다”고 했다. 생생한 흥미 혹은 의미 없는 호기심, 세상에 대한 ‘황홀한’ 시선이 주는 쾌락과 신비가 아이들에게 계속 마술이 존재할지도 모른다고 속삭인다. 그러니 우리는 영감을 얻는다는 것은 마술에 걸린 시선, 이 경탄하고 놀라는 어린아이의 기쁨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작가에게 쓰으윽 들어왔을 때, 작가는 마법에 걸린 듯, 경탄하고 놀라는 어린아이인 듯, 마술과 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말은 그에게 이러한 진입을 가능하게 한 매개이고, 그 자신과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들과 직면할 수 있게 해준 어떤 것이다. 말하자면 그러한 직면이 그의 자아, 그의 욕망, 그의 비의식의 지대들을 자유로워지게 한 듯하다. 그의 말들이 더 장식적이고 더 표현적이 되는 이유는 바로 이 자유, 그리고 그것으로 얻은 기쁨, 즐거움 혹은 행복의 발현이라고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 한지연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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