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목소리가 뭔지 진짜 알 것 같아요. 그건 자기 자신의 느낌인데 어떤 다른 사람의 언어에요.” 여기서 우리는 라캉이 대상 a의 외밀성extimite이라 부른 것을 목격한다. 목소리는 바깥(외부)에 있는 동시에 안(내밀)에 있어서 그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다. 목소리는 단순히 타자의 그것이 주체의 그것으로 내면화된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를 뒤엉키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말이 외부로부터 나에게로 묵직한 덩어리처럼 던져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 안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으며 아무런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공백과 같다. 그래서 목소리는 안팎이 뒤얽힌 공백의 덩어리 같은 특이한 대상이다. 라캉이 말하듯, “목소리는 공백에서 공명한다.” 보이스voice는 보이드void에서 울리는 것이다.
---「목소리」중에서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무언가로 한정하고 어딘가에 소속시키려는 모든 언어적 기획을 좌절시키고 도주하는 존재가 무명씨라면, 그래서 그를 언어로 묶어 두려는 시도가 필패할 수밖에 없다면, 거꾸로 무명씨의 정체는 그를 포획하기 위해 내리쳐지는 언어의 그물망을 간신히 빠져나오는 순간에만, 즉 언어를 통한 자기 정체화의 실패를 통해서만 언어상에 찰나적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명씨는 언어적 자기 규정 시도의 실패를 뒤집어 이 실패를 계속해서 시도해야만 자기 자신을 점멸하듯 현시할 수 있을 것이다.
---「무명씨 이야기」중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의 존재와 사연 그 자체가 아니라, “Je”의 자리에 이들이 빚어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도망침으로써 가까스로 드러나는 무명씨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도주의 방법이자 자기 증명의 주문은 “Je”의 자리 안에서 “지금 ‘나’라고 말하고 있는 자는 내가 아니야”라고 외치는 것이다. 무명씨는 “Je=○”이란 관계식에서, “나”를 한정 짓기 위해 우항의 빈 자리(이것이 결국 “Je”의 자리다)에 어떤 이름이나 속성을 대입하든 그 자리 바깥으로 달아나 등호를 베어 버림으로써 기어이 “Je≠○”을 만들어 놓고 마는 어깃장이다. 그가 “Je”의 자리에 마후드와 웜을 빚은 것도 결국 이들을 언어적으로 조형하는 과정에서 틈만 나면 그들로부터 선을 긋고 달아남으로써 자기 존재를 명멸하듯 빼꼼 내비쳤다 사라지기 위함이었을 수 있다.
---「무명씨 이야기」중에서
이성의 충고도 죽음도 망각도 잠재울 수 없는 비-존재의 되돌아옴 앞에서, 더 이상 죽을 수 없음 앞에서, “우리가 망각이라 부르는 것 그 자체를 잊는 것이 어떤 위로도 가져오지 않는 무한히 더없이 어두운 요구”, 글쓰기의 요구가 나타난다. 「목 메이게 하는 부드러움 깨어 있어야 하는 우정의 의무」.저 깊은 죽음 같은 침묵에서 살아남은 음처럼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의 부드러움은 침묵 속에서 깨어 있어야 한다고, 침묵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한다. 「깨어 있어야 하는 우정의 의무le devoir de l’amitie vigilante」, “이 아주 단순하고, 너무도 아름다운 단어들로부터 오는 전율”, 그것은 「끌림과 공포가 짝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오는 목소리」중에서
이제 시인은 그에게 사무엘 우드라는 예명을 준 자, 시인 안에 ‘그’, 혹은 ‘아이’를 불러내서 묻는다. 「내가 지금 듣고 있는 너의 목소리는/ 무덤 저 깊은 곳에서 오는 것이니?/ 문장들을 가지고 나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것이니?/ 아니면 나의 목소리의 그 거대한 궁핍을 반복하는 것이니?」
---「다른 곳에서 오는 목소리」중에서
“그것은 말해진다. 겨우, 간신히 말해진다”
이 하얀, 공허한 목소리를 블랑쇼는 우리에게 들으라고 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보다 침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소리는 우리에게 비밀스럽게, “눈물 없는 울음”처럼 도착한다. 하얀 글쓰기는 매번, 검은 글쓰기가 책 안에서 그 자신의 공간을 찾았으나, 발견할 수 없는 “거대하고 유일한 고통”의 흔적이 될 때마다 조심스럽게, 은밀하게 우리를 건드린다.
---「다른 곳에서 오는 목소리」중에서
하지만 생각해보면 텔레파시에도 두 개의 버전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거리를 지우는, 정말로 내 머리 안에 직접적으로 타자가 울리고 현전하는 그런 목소리로서의 텔레파시, 다른 하나는 목소리의 원격성, 지워지지 않는 거리감을 간직한 목소리로서의 텔레파시. 연애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전자를 무조건적으로 욕망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후자를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유한성의 무한한 체험이야말로 연애라는 사랑의 관계에 애당초 기입되어 있다. 수많은 목소리의 교환 속에서 결국 등장하고야 마는 ‘우리 지금 만나’라거나 ‘지금 만나러 갈게’ 같은 말의 사태가 목소리의 시원에 이미 기입되어 있는 이 불가능성을 고지한다.
---「우편적 목소리, 텔레-파시」중에서
현재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과거의 지층들은 미래라는 시간의 관점에서 탈구축됨으로써 재구축된다. 그러니까 데리다 자신이 에크리튀르의 고유성으로 새겼던 것, 즉 시간의 틈새와 공간화, 어떤 기원적 국부 안에서 펼쳐지는 기호작용들의 전개로서 길내기frayage라는 차이의 운동이 언제나 이미 목소리에 내재해 있는 것이다. “이 엽서를 보내기 전에, 나는 네게 전화를 걸었을 거야. [52칸] 그래,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방금 막 전화를 끊었어. 나는 길인데, 내게 네 목소리가 있는데, 어딘지 모르겠는데, 나는 길을 잃었어, 그건”
우리는 여기서 목소리voix(브와)와 길voie(브와)의 동일한 음가 사이를 비집어 내면서 존재하는 지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한 우편적 공간의 지층에서 목소리는 길을 잃는다. “그건telle est(텔레)” “원격tele(텔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간격은 52칸의 여백으로 표시된다. 이 여백은 삭제되어 사라진 부분들이다.
---「우편적 목소리, 텔레-파시」중에서
(D.S.- 영역, 무언가, 둘 사이의 선명한 간격이 아니라 그녀는 움직임 그 자체, 반사 순환, 재귀, 부정성 없는 부정의 여신, 나를 동하게 하는 잡을 수 없는 것, 가장 가까이에서 와 섬광처럼 빠르게 나를, 나 자신에게 불가능한 다른 (이)-나를 내게 주는 잡히지 않는 것, 다른 이와의 접촉에서 너-나-너인 나를 솟아오르게 하는 잡을 수 없는 것이다.) ‘D.S’는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무언가에서 다른 무언가로, 이곳에서 다른 곳으로, 영역, 간격과 거리를 무시하고 그것들에 주어진 특성들을 넘어서면서 여기서 저기로, 이 안에서 그 안의 또 다른 곳으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자아와 타자, 내 타자와 다른 타자, 나와 너는 동요된다.
---「꿈의 목소리, 목소리의 꿈」중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글쓰기를 향해 열려 있는 ‘무덤’, 식수의 언어의 목구멍, 목소리의 무덤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말을 뺏긴 죽음과 몸,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되돌아온다. 그녀의 아버지의 이름 ‘Georges’는 다양한 형태로 작품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무엇보다도 발성기관이기도 한 목, 목구멍과 혼동되거나 심연 어딘가에서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무언가 그 자체가 된다. “나는 그의 목(구멍)이 아프다, 피할 수가 없다. Georges의 목구멍. J’ai mal a sa gorge, je ne peux pas m’empecher. La gorge de Georges.” OR은 문장에서 반복적으로 소리를 내 리듬을 형성하며 나, 내 몸, 목구멍과 그의 목, 목구멍gorge, 아버지의 이름Georges을 꿰어 아버지의 목구멍을 그녀의 목구멍이자 어떤 목구멍 일반으로, 목소리를 글쓰기의 마르지 않는 값진 원천으로 표현해 낸다.
---「꿈의 목소리, 목소리의 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