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붓이라고 하면 해방 이후부터 쭉 교육받아온 것이 서예하고 사군자 하는 거잖아. 화선지에 백모 붓으로 그리는 것이 유행하고 그랬고. 그래서 우리 붓이라고 하면 단순히 화선지에 작업하는 백모(白毛) 붓이라고 떠올려. 백모 붓은 염소털이나 양털로 만든 거야. 부들부들한 털이지. 그 붓 나름대로 개성과 장점이 있어. 붓에 먹을 많이 머금는 장점이 있거든. 단붓질로 이렇게 선필을 굵게 휘저을 수 있어서 사군자 같은 그림에 딱 맞는다는 특징이 있어. 그러나 이 신형 붓은 우리 붓의 주류가 아니야. 고구려 벽화를 한번 생각해봐. 가늘고 긴 장필로 흡사 침 같은 붓으로 그린 거거든. 그리고 그 붓털은 황모(黃毛)라는 것이고. 사냥에 나가 짐승을 잡아서 털을 뽑아 만든 붓이야. 고구려 기마족들의 벽화를 보면 나오잖아. 노루·사슴·순록·단비·족제비 등 숲속에 사는 동물의 털을 뽑아서 쓴 거야, 그게. 그 털이 갖는 특징은 백모하고 다르게 탄력이 아주 강하고 힘이 세.”
--- p.17~18, 1. 「푸진 미술의 신명」 중에서
“사실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비슷하지만 현실 의식을 둔하게 만들 수 없도록 모양을 바꾸면서 자극적으로 나타나지요. 자본주의가 지속되고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의 심리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불평등, 대립, 억압, 배제, 이런 여러 가지 인간 세상의 현실적 모순들은 계속 반복되는데, 그 가운데 사람의 삶의 양식이 새로운 기술문명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고 역사의 현실도 달리 나타나는 거죠. 70~80년대에 사회변혁 운동의 장에서 정치적 민주화가 달성된다면 경제적 민주화는 당연히 수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괴현상이 나타나리라는 상상은 하지 못했잖아요.”
--- p.132, 2. 「노원희, 담담하고 꾸준히 현실에 싸움을 걸다」 중에서
“서울미술공동체란 말을 주목해봐야 돼. 우린 ‘예술가 대중조직’을 표방한 거란 말이야. 우린 이때 얼핏 보면 소집단인 것도 같지만, 소집단을 표방한 게 아니었단 말이야. 소집단이 아니라 예술가 대중조직, 그게 민미협. 민미협이 그런 조직이라는 거야. 민미협으로 가는 과정에는 서미공이 가장 역할이 큰 거였지. 그건 확실히 그렇게 말할 수 있어.”
--- p.157, 3. 「둥글게, 낮게… 류연복의 길」 중에서
“1984년 『시대정신』의 발간 동기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요. 1980년대 이후 새로운 미술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났어요. 우리는 이것을 ‘민중미술’운동으로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을 기록하고 널리 알리면서 담론의 장을 마련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소집단을 넘어 연대하여 전시하고, 출판미술을 통해 공유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1권에서는 ‘민중미술운동의 생명력’이라는 특집을 엮고, 회화뿐만 아니라, 만화, 사진, 판화, 벽화에 관한 내용을 담았어요. 또 하나는 84년 『시대정신』을 창간할 무렵 이미 ‘민중문화운동협의회’가 결성되면서 문화운동 차원에서의 미술인 협의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어요. 기성 제도권 단체였던 ‘한국미술협회’가 하지 못한 새로운 미술인 협의체가 필요했어요. 『시대정신』은 그런 모임을 위한 다리 역할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발간사에서 시대정신기획위원회는 ‘힘의 문화’를 강조하면서 미술인의 연대를 기대했죠. 《시대정신》전 1회, 2회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소집단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두루 참여했어요.”
--- p.238~239, 4. 「박건, 예술은 고통에 맞서는 ‘무기’ 또는 ‘놀기’」 중에서
“단순한 비교지만 ‘실천’은 ‘현실과 발언’과 ‘두렁’의 중간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현실과 발언이 작가들의 작업 위주로 진행된 미술제도 안에서 작품으로 발화하는 소통 중심의 민중미술이라면 두렁은 현장의 집회, 공동체와 함께 공동 창작을 하는 실제 운동과 몸통을 같이 하는 운동이었다고 볼 때 실천은 어떤 성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는지요?”
--- p.279, 5. 「〈타! 타타타타타〉에서 ‘만화정신’ 이후」 중에서
“나는 임술년은 그 나름으로 새로운 미술운동의 한 방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장에서 운동 성격이 강한 두렁이 나왔어요. 두렁이 미술을 완전히 운동의 도구로 쓰고, 계속해서 어떤 전형을 만들려고 하는 것에 나는 부정적이었어요.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과연 운동과 투쟁의 목표에 부합하는 것인가. 그러면 개인은 무엇인가. 예술가는 거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 p.344, 6. 「탈조각의 여정」 중에서
‘목판모임 나무’는 《목-9인전》(관훈미술관, 1983년 5월 25일~31일)으로 공식적인 출발을 알렸다. 《목판모임 나무 7회전》(그림마당 민, 1987년 9월 18일~24일)이 열리는 1987년까지 전시와 모임이 이어진다. 한국적 이미지라는 외형적 전통을 따르는 것도 판화를 메시지의 전달 방식으로 삼는 것도 아닌, ‘우리’ 정서의 표출을 ‘목판’의 다각적인 재해석을 통해 추구하고자 했다.
--- p.403, 7. 「민중미술에서 공공예술로」 중에서
“마침 그때 ‘현발’이 창립을 했고 현발 활동 보니까 용기도 났습니다만, 사실 그때는 좀 무서운 시대였어요. 사회비판적인 그림을 그릴 때, 분위기가 전두환, 그야말로 억압적이라 좀 그랬지요. 젊긴 했지만 그래도 공권력이라든가 안기부의 네거티브한 통제라든가, 작가 작품들이 압수되고 그런 시대니까 조금 무섭기도 했어요. 하지만 의기투합을 하니까 용기가 났고, 우리 이런 창작을 한다, 세상을 그린다, 세상을 반영한다, 이런 구체성을 갖게 됐지요. ‘임술년’은 이제 가까운 친구들이 중심이 돼서 창립을 하게 되죠.”
--- p.455, 8. 「이종구, 땅의 땀과 눈물을 그린 일하는 화가」 중에서
“‘두렁’이 던진 삶과 예술에 대한 질문이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렸다고 생각했어요. 삶과 예술의 이 간극을 해결하지 않으면 나한테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 같다. 지금 피하면 나중에 숙제로 남으니까, 숙제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일단 해보자. 이 문제를 밖에서는 못 해결한다, 이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런 참여의식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아. 그때 내 눈에 두렁은 촌스럽지만 뭔가 삶에 예술을 밀착시키려고 하는, 좀 돌진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 p.522, 9, 「정정엽, 살아온 내력이 작품 되기의 당연함」 중에서
“나는 촌스럽더라도 자유라는 말을 꼭 붙이고 싶더라고. 그때는 운동의 시대잖아. 운동의 필요성이 있었거든. 왜냐면 유신 독재와 싸워야 했으니까, 억압 체제와 싸워야 되잖아. 그래서 나는 자유라는 말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열이는, 자유라는 말이 약간 전근대적으로 보인다는 거야. 나는, 우리 사회가 전근대적인 사회다, 이 압제가 무너져야 우리가 근대를 할 수 있는 거다, 자유라는 말을 꼭 집어넣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광주자유미술인회가 됐지. 회라고도 하고 협의회라고도 했어. 미술인회로 할 때와 협의회라고 할 때의 차이를 솔직히 몰랐어. 뒤섞어서 썼어. 짧게 줄여서 광자협이라고 하고, 길게 쓰면 광주자유미술인회라고 그랬어.”
--- p.583, 10, 「빛고을의 작가, 홍성담의 ‘증언과 발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