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를 형성하는 섬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도시의 일상생활은 강을 끼고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표트르가 애초부터 의도했던 것이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주민들을 러시아에 늘 부족한 뱃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다. 네바강과 지류들은 노동자, 귀족, 병사, 정치가, 외교관들 모두 조악하게 만든 돛배를 타고 이동하는 대로가 되었다. 이 배들은 강한 바람을 만나 부서지기도 하고, 차르가 노 사용을 금했기에 좌초하기도 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러시아의 수도로 공식 결정되자 표트르 대제는 수백 명의 상인, 2천 명의 장인, 1천 명의 러시아 고위 귀족들에게 “가족 전체와 집 안에 함께 거주하는 모든 사람을 데리고” 이곳으로 이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p.43~44
적으로부터 뺏은 땅에 건설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새로운 세속적 권력의 물질적 표현과 새 제국이 거둔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자신이 원하는 러시아의 미래의 모습을 공유하는 외국인과 러시아인들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 모았다. 그는 다양한 배경과 문화를 가진 이 사람들을 초기의 제국 궁정에 뒤섞어놓았다. 표트르는 유럽식 생활양식과 의례,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러시아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만, [...] 서방을 모방하는 것을 이렇게 강조하는 것은 표트르의 가신들에게 외국인이 되기를 강요했다. 이들은 보통 어린이들이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우는 언어, 예의, 생활방식을 성인의 자리에서 새로 배워야 했다.
--- p.97
하지에 절정을 이루는 백야 때엔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떼를 지어 네바강둑과 공원, 정원에 모여들었다. 밤에도 해가 지지 않는 백야는 오전 10시 반에 해가 뜨고, 오후 4시 전에 해가 지는 긴긴 겨울을 보상해주는 마법과 같은 시간이었다. 백야 기간에는 삶이 다른 형태와 의미를 가졌다. 시인들은 백야 기간에 넵스키 대로에서 표트르 대제를 기린 청동기마상과 해군성과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의 금빛 첨탑이 절대 사라지지 않는 황혼 속에서 어떻게 빛나는지를 시로 표현했다.
--- p.116~117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산업 도시로 변하는 과정에 들어서 야포, 장갑 전함, 폭발물, 기관차, 철로, 증기엔진을 생산했고 이런 것들이 러시아 제국을 근대로 이끌었다. 기계의 힘에 매혹된 세계에서 진보의 상징이 된 수백 개의 공장 굴뚝 위로 검고 발그레하고 누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모든 근대 세계와 근대화되고 있는 세계 전체를 통틀어 발전기는 인류의 핵심 영감이 되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공장들의 수많은 굴뚝으로 이뤄진 환상環狀 고리 지대를 창출하여 푸시킨, 로시, 예카테리나 여제의 귀족적 도시를 더없이 꽉 틀어쥐어 짜냈다. 숨길 수 없는 높다란 굴뚝들이 실리셀부르크 도로를 따라 수없이 생겨났고, 한때 도시 외곽지역에만 있던 빈민가는 그 굴뚝들 주변으로, 썩은 나무 둥치에서 솟아나는 버섯처럼 곳곳에 생겨났다.
--- p.215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근대 산업 도시로 첫발을 내디딘 것은 니콜라이 1세 시대였다. 러시아가 고대 로마의 제국적이고 군사적 유산을 상속했다는 인식이 가장 강할 때였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제국을 로마의 영광의 자랑스러운 상속자로 간주했고, 현상 유지를 정책과 정치의 핵심 목표로 삼았다. 모든 러시아인은 황제에게 복종해야 했고, 황제는 신에게만 복종했다. 새로 지은 이삭 대성당과 카잔 대성당, 수천 명의 관리들이 군주의 명령을 제국 구석구석까지 전달하는 제국 정부 건물을 가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 현재와 미래의 이미지를 반영했고 정교회, 전제정, 민족성(nationality)의 교리에서 벗어 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1825년, 1830년, 1848년에 일어난 사회적·정치적 혁명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러시아의 황제와 신하들은 산업혁명도 잘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러시아의 미래와 임무에 대해 이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확신은, 서구에 엄청난 혼란과 곤란을 가져온 사회적·경제적 힘은 엄격한 정치적·종교적 원칙만이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 p.216
1905년 신년이 되자 가폰은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노동자들을 만나 1월 9일 일요일로 예정된 평화행진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계획은 노동자들을 겨울 궁전으로 행진하도록 한 다음 차르에게 노동자들이 겪는 고난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담긴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인간으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힘겨운 운명을 침묵 속에 참아야 하는 노예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 만일 폐하께서 우리의 청원에 답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바로 당신의 궁전 앞에서 죽겠습니다. 우리는 달리 갈 데가 없습니다”라고 청원서는 끝을 맺었다. [...] “만일 차르가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의 청원서를 접수하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입니까?” 그러자 모든 사람에게서 똑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반복해서 울리는 그 단조로움 속에는 두려움이 도사렸다. “그러면 우리에게 차르는 없습니다!”
--- p.264~265
이후 여덟 달 동안 2월 혁명이 페트로그라드를 손아귀에 넣었다. 민주적인 러시아의 지휘권은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한 날 공식적으로 임시정부 손에 넘어갔지만,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무기공장, 철로, 군대, 우체국, 전보를 통제했고, 소비에트만이 대중을 지휘할 수 있었고, 실질적 권력을 보유했다. 봄, 여름, 초가을 동안 몇 개의 임시정부가 나타났다가 사라졌고 새 임시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좌익으로 점점 더 기울었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피, 폭력, 수간”이 곧 “핑크빛 클로버”에 자리를 내주기를 희망했고, 자신의 친구들에게 “무거운 망치는 유리는 깨뜨리지만 강철은 단련시킨다”라는 것을 기억하라고 충고했다. 빈민가에서 자라 작가가 되고 대중의 억눌린 잔혹성을 직접 경험한 엄청난 인기 소설가 막심 고리키는 상황을 더 잘 알았다. “삶의 와해, 거짓, 정치의 오물에 분노한 군중의 검은 본능이 타올라 연기를 내뿜으며 우리를 분노, 혐오, 복수로 독살시킬 것이다”라고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여름이 끝나고 가을날의 해가 짧아지는 시점에 내다봤다.
--- p.319
레닌은 추종자들에게 “독일인들에게서 규율을 배우라고” 지시했고 트로츠키는 “노동, 질서, 인내와 자기희생”을 강조했지만 부질없었다. 곧 이들은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한 종류의 절제를 실현하려면 위로부터의 강제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스스로를 구할 유일한 방법은 끈질긴 노동과 혁명적 규율뿐이다”라고 트로츠키는 주장했다. 이것이 볼셰비키 혁명 조직을 다른 경쟁 집단과 확연하게 구별시켜주었다. 그리고 이것을 무자비한 테러와 결합하여 그들은 결국 페트로그라드와 러시아를 장악할 수 있었다. [...] 1917년 말 인민위원회가 “러시아 전역의 모든 반혁명 행위와 사보타주를 척결하기 위해” 만든 고도로 효율적이고 한없이 잔혹한, 체카라는 약자로 알려진 반혁명파업투쟁특별위원회는 러시아의 미래에 대한 볼셰비키의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은 무차별하게 척결하는 기구가 되었다.
--- p.328
독일군이 진격해 오자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광학기계, 항공기, 탱크를 만드는 공장을 분해하고, 기계들을 상자에 담아 기차에 실어 시베리아의 안전한 장소로 옮기기 시작했다. [...] 사람들은 팔코네가 만든 청동기마상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높고 두텁게 쌓아 올리고, 작은 동상들은 끌어 내려 여름 정원에 묻었다. 주요 건물 창문에는 널빤지를 대고 테이프를 가로질러 붙였다. 공공도서관에서는 9백만 권의 장서 중 7천 권의 초기 간행본,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그리스어 신약, 볼테르의 개인 장서, 스코틀랜드 메리 여왕의 기도서, 구텐베르크 성서와 기타 총 36만 권의 희귀도서가 상자에 담겨 후방으로 보내졌다, 2백 년의 레닌그라드 역사를 담은 역사적 고문서, 푸시킨의 편지, 도스토옙스키의 육필 원고, 고대 동방의 비기와 기타 수십만 종류의 문서도 상자에 담겨 후송되었다. 다음으로 가장 어마어마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150만 점의 값을 매길 수 없는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품을 포장해서 옮기는 일이었다.
--- p.366
살아남기 위해서 주민들은 립스틱을 녹여 빵을 튀기고, 얼굴 분을 밀가루 대용으로 사용하고,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가죽 벨트를 끓여 ‘고기’ 비슷한 것을 만들어냈다. 주민들은 아마 씨 기름으로 팬케이크를 굽고, 감자 가루나 전분에 가루 치약을 섞어 ‘푸딩’을 만들었다. 한 여성은 어느 날 오후 일부러 설사약 70정을 먹었는데, 약에 함유된 사카린이 뭔가 좋은 것을 먹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었다. 많은 주민들이 인근 늪지에서 토탄을 집어 먹었는데, 이것이 먹을 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이들이 한 번 이상 암시장에서 식품을 사야 했고, 암시장은 봉쇄가 끝날 때까지 성업했다.
--- p.375
독일 공군의 폭탄이 상인 아케이드에 떨어진 9월 19일 밤, 쇼스타코비치는 가장 가까운 친구 몇 명을 자신의 아파트로 초청했다. 친구들이 왔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이제 막 끝낸 교향곡의 첫 세 악장을 그린 악보에 둘러싸여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이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친구들은 놀랐다. 공습 사이렌이 울리자 쇼스타코비치는 자기 부인과 아이들을 방공호로 보내고는 연주를 계속했다. 폭탄이 천둥을 울리고 사이렌이 요란한 소리를 내고 대공포가 쿵쿵거리는 와중에 그의 음악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소리의 수준을 지닌 강력하고 날카롭게 울부짖는 클라이맥스”라고 한 평론가가 나중 에 표현한 것에 도달했다. 그의 친구들은 러시아의 문화에서, 그리고 전 세계 문화에서 진귀한 순간을 목격했음을 깨달았다.
--- p.385~386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리든, 페트로그라드로 불리든, 레닌그라드로 불리든, 이 도시는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에게는 ‘피테르’로 남아 있었다. 이 도시의 창건자 이름에서 직접 따온 ‘표트르’가 아니라, 이국적인 것과 애정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나타내는 네덜란드식 버전의 친숙한 이름으로. 이곳은 여전히 푸시킨, 도스토옙스키,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제, 알렉산드르 블로크, 쇼스타코비치, 아흐마토바, 브로드스키의 도시였다. 동시에 외롭고, 친밀하고, 웅장하고, 아름답고, 압제적이고, 낭만적이고, 덧없고, 고립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도시였다. 이곳은 부와 가난의 도시이고, 죄와 벌의 도시이며, 저주와 구원의 도시였다.
--- p.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