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등지고 돌아앉은 단층 아파트에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와 노인들뿐이었다. 구석진 곳에 외따로 떨어져있어 아파트는 더 을씨년스러웠다. 허름한 이 아파트의 게시판에는 매매와 전세 전단지가 얼룩지고 찢어진 채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겨울밤, 아파트의 불 켜진 칸칸의 창가에는 노인들이 어른거렸다. 휙- 칼바람이 지나가자 창문들이 일제히 쿨룩! 기침하듯 덜컹거렸다.
오늘처럼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이면 노인들은 천식의 기침 소리로 서로의 무사 안부를 알리곤 했다. 젊어서는 만난 적 없는 인연들이 흐르고 흐르다가 막다른 곳으로 모여든, 말하자면 부표, 플라스틱, 스티로폼, 나무막대기처럼 온전한 것에서부터 쓸모를 잃고 떨어져 나온 노년이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늙음이 모여서 흠! 흠! 헛기침을 했다.
--- p.10~11, 「출소를 꿈꾸다-봄으로」 중에서
이들은 이름 대신 집 호수를 호칭으로 썼다. 상대방을 죄수의 수인번호처럼 부르는 건, 늙음이 죄목이 되어 지독한 한파에 갇혀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젊음을 잃고 얻은 건 자유가 아니라 더 큰 구속이었다. 바닷가의 외진 곳에 방치되어 사라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움푹 꺼진 눈망울에는 외로움과 죽음의 공포가 잔뜩 서려있었다.
그토록 발버둥 치며 살아온 발걸음 앞에 이토록 짧은 생의 낭떠러지라니…, 덜컥거리며 지나온 삶이었기에 이 아파트의 칸칸에는 살아온 날들이 수여하는 훈장이 사각 창틀 불빛으로 반짝거렸다.
--- p.12, 「출소를 꿈꾸다-봄으로」 중에서
밤은 늘 등뼈 위로 찾아왔다. 몸무게는 점점 가벼워졌다. 구십 년산 무중력이 종잇장 같았다. 땅은 디딜 수 없었으나 허공에서는 원하는 방향 어디로든 휘돌았다. 205호는 점점 신령님 앞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이젠 두렵지 않다고, 다만 꿈결에 오시어 응징하시라고, 신령님께 빌었다.
간밤에 장미분재가 모로 누웠다. 단 한 번도 벗어보지 못한 가죽신발을 벗어놓았다. 칼바람이 구두를 강제로 벗겨버렸으니 분재는 길을 놓아야만 했다. 다시는 직립이 되지 않겠다는 듯 바닥에 드러누워 꿈쩍도 않았다. 다 뜯어 먹혀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바람의 송곳니에 온몸을 내맡겼다.
딸이 장미분재의 등뼈를 수직으로 세워보려 애썼다. 꼿꼿하게 일어나길 바랐지만, 스르르 누웠다. 소소한 이야기 몇 개가 바람에 팔랑거렸다. 쓰러진 장미분재 주위로 수염 다친 벌과 날개 찢긴 나비가 몰려들었다. 그 누구도 낡음이 누추하지 않은 듯 ‘엄마 엄마’ 부르며 볼을 비볐다.
205호는 꽃대 위 꽃이었다. 학처럼 고고하게 외발로 일어섰다. 그리고 퍼덕퍼덕 퇴화의 날개를 흔들었다. 이파리로 둘러앉은 자식들이 꽃인 205호를 받쳐 들고 흐린 눈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 p.75~76, 「출소를 꿈꾸다-저승으로」 중에서
안동시 길안면에는 여태껏 사라지지 않은 씨족 마을이 있었다. 나는 이 마을로 시집을 왔고, 내게 첫 상복을 입힌 할머니는 지난겨울 염장이의 발밑에서 정강이뼈 부러지는 소리를 마지막으로 들려주며 이승의 문을 쾅쾅 닫고 말았다.
둥글게 말린 채 굳어진 할머니의 몸을 직사각형 오동나무 관 안으로 밀어 넣는 염장이의 발바닥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할머니와 같은 뼈의 힘이 나에게도 숨겨져 있을까. 주어진 운명을 견뎌내느라 퍼석해질 대로 퍼석해진 채 우지끈, 내려앉던 뼈의 소리를 기억하는 나는, 할머니 세대와 맞물린 아래 세대를 살아가고 있었다.
--- p.108~109, 「바람이 오므리는 입술에서 궤나 소리가 들렸다」 중에서
내 손이 닿아 죽음에 내몰리는 여린 풀들은 돌아가신 할머니처럼 자신의 목숨을 내 놓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꺾인 자리에서 나오는 찐득한 독소에 내 혀끝은 벌써부터 아려왔다. 산나물을 뜯는 내내 꺾인 목울대가 내는 절망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죽음을 만지던 내 손에는 어느새 먼먼 안데스산맥을 휘돌아온 바람이 한 움큼 쥐여져 있었다. 나는 그 바람이 내는 구슬픈 음악 소리를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죽은 이의 정강이뼈에 구멍을 뚫어 뼈 피리를 만들었다는 사람들, 거대한 안데스산맥을 바라보며 홀로 피리를 불었을 누군가를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얼마나 슬펐으면 정강이뼈로 피리를 만들었을까.
나는 산비탈에 서서 천천히 바람을 들이켰다. 어느 영혼이 내 손에 마지막 키스를 했다. ‘그립다, 그립다….’ 애절한 궤나 소리가 손바닥에 찐득하게 달라붙었다.
--- p.122~123, 「바람이 오므리는 입술에서 궤나 소리가 들렸다」 중에서
엄마는 풀 한 포기를 쑥 뽑아 들고는 똑바로 이해하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뿌리와 곁꽃이 희생해 줘야만 중심 대궁이가 영양분을 오롯이 받아먹고 저 꼭대기에 보란 듯이 탐스러운 꽃을 피운다니까! 그래야만 질 좋은 열매도 맺는 거고.”
돈 없고 자식 많은 집에서는 한 명의 자식만이라도 잘 키워내야 그 자식이 집안을 살려낸다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흘러 뿌리와 잎이 흙으로 녹아들 무렵이면 창공蒼空에서는 튼실하게 여물린 씨앗들이 와글와글 흩어지면서 대를 이어가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엄마의 주장에 꺾이어버린 나는 부모에게 받을 혜택을 몽땅 오빠에게 몰아주어야만 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P 교수도, H도 한 가족이 힘을 모아 밀어올린 중심 대궁이의 꽃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왜? 아랫단 곁가지에 핀 나보다도 상처가 더 깊고 험악해 보이는 걸까? 기껏 양보하고 희생해 주었는데, 티끌 하나 묻지 않고 승승장구했을 저들은 뭐지? 선택된 사람이라 제왕처럼 군림한다고 믿었는데…, 나의 우상偶像인 저들의 이야기는 왠지 서글펐다.
다들 꼿꼿하게 원하는 지점까지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보듯 아우르는가 싶었는데… 뭣 때문에 죽을 만큼 술에 의존했다는 걸까? 나는 이해불가의 그들을 아리송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한자리에 웅크리고 있던 몸을 끙, 하며 일으켰다. 그들의 발치에서 억울하게 희생당한 몸은 무거웠다. 졸음을 떨칠 겸 창가로 다가갔다. 창가에는 덜커덩덜커덩 소리를 내며 바람이 지나가고 있었다. 허공에는 시커먼 구름이 펼친 검은 날개가 요란하게 펄럭거렸다. 커다란 날갯죽지에서 흰 깃털이 분분했다.
나는 2차선 도로를 내려다보며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 바람이 와락, 내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바람을 막으려고 얼굴을 창문 바깥으로 디밀었다. 펄펄 날리는 눈송이가 얼굴에 차갑게 와 닿았다. 3층의 좁은 창가에 대롱대롱 매달린 얼굴이 금세 커다란 눈꽃송이로 변해갔다. 허공으로 뻗친 내 모가지가 거친 눈보라에 비비 틀렸다. 그대로 잠시 잠깐, 나는 중심 대궁이가 피워 올린 탐스러운 꽃이 되고 있었다.
--- p.153~155, 「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