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한은 경찰서 유치장, 좁고 초라하고 더러운 화장실 옆에 앉아있다. 잠시 눈을 감고 수갑이 걸려 있는 두 팔목의 느낌을 읽어간다.
‘아버지의 마음속에 혹시나 숨어있을 착하고 선한 마음을 절실히 찾고, 읽으려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손목에 채워져 있는 은색 수갑이 말해주듯, 수갑은 누가 보더라도 악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아무리 수갑이 좋은 곳에 쓰인다고 해도 그 모양과 기능은 영원히 악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아버지는 바로 이 수갑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 p.128 「5장 보이지 않는 비」 중에서
“당신은 왜 자식새끼가 그런 짓을 하려고 했는지 조금이라도 생각해 봤나요?”
그런 아내를 비웃듯 쳐다본다.
“야! 그걸 몰라서 물어? 아버지 알기를 개똥으로 보니깐 그러는 거 아니야!”
“당신이라는 인간은 참으로 무섭네요. 자식들에게 존경은 받지 못할망정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저주를 받고 있으니, 아마도 당신 같은 인간은 그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이 말에 두 눈을 부릅뜨고 “근데 이년이 뒈질라고 환장했나…….”
‘차라리 그때 죽었으면 더 이상의 불행은 이 집 안에서 찾지 못했을 것인데, 그날 절도범이 우리 집에 오지만 않았어도 지금 저 인간 같지 않은 악마는 가족들 앞에 더 이상 나타나질 않았을 텐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저런 악마를 살려두고 착하고 고운 우리 큰아들에게 그렇게 크나큰 고통을 짊어지게 하시나이까?’
아무런 반응이 없어 보이자 남편은 온갖 욕을 아내와 큰아들에게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가서는 주섬주섬 자신의 옷을 챙겨입고 있다.
--- pp.141-142 「5장 보이지 않는 비」 중에서
엄마와의 짧은 메시지를 나누고 김회옥이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 누군가 사무실 입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녁이라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 사람이 누군지 짐작이 갔다. 바로 우리 큰오빠가 죽이려고 했던 그토록 부정하고 싶은 아버지라는 사람이다. 독선과 아집으로 선팅을 하듯 몸 전체에 물들어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아무런 생각과 느낌 없이 표출하는 아버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는 낯선 범죄자의 모습으로 우리를 핍박하고 업신여기는 아버지.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직장까지 찾아오셨죠?”
퉁명스러운 자식의 말에 피우고 있던 담배꽁초를 바닥에 뱉는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퇴근도 못 하고 있구나?”
선하지 못한 아버지 얼굴에 어울리지 않은 온화함이란 정말로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워 보인다.
“용건이 뭐죠?”
그러자 아빠는 그다지 예쁘지 않은 눈썹을 심하게 구기며 공격적인 얼굴로 딸을 노려보고 있다.
“이년이 지 아버지한테, 너도 네 큰오빠처럼 날 죽이고 싶겠구나?”
아빠와 주고받은 비난의 감정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두 눈이 아빠를 봤고, 머리와 온몸에선 적개심이 발동했다. 아빠가 서 있는 곳을 향해 힘주어 대답했다.
“당장 이곳에서 사라져주세요, 아버지.”
이 말에 아빠는 차갑고 분노에 찬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참나, 좋아. 갈 테니까 얼마 전에 월급 탔지? 너도 남훈이처럼 100만 원만 가져와!”
--- pp.145-146 「5장 보이지 않는 비」 중에서
형이 없는 빈자리는 망망대해에서 선장을 잃은 선원들처럼 힘들고 아버지의 고문과 같은 언행들은 날로 더 늘어만 갔다.
오늘은 와와반점이 쉬는 날이다. 그래서 오전에 형에게 면회하러 갔다. 팔에 수갑을 차고 초라한 모습으로 동생을 보자니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클까? 그 자리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차라리 김남훈이 그 자리로 가고, 그의 형이 가정을 지켜나가길 바라지만, 지금으로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이다.
형은 무슨 생각으로 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을까? 그런 형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현실이 미칠 것만 같았다. 잠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문다.
‘태워버리고 싶다. 우리 집 안에 있는 아버지의 존재를. 이 담배 연기처럼 태워 날리고 싶다.’
그러면서 어두운 하늘의 달을 쳐다본다.
--- pp.148-149 「5장 보이지 않는 비」 중에서
잠시, 아무 움직임이 없자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검사는 담배 하나를 꺼내어 불을 붙인다. 그러자 주변의 공기가 담배 연기로 인하여 탁한 공기로 김주한의 호흡기를 긴장시키며 동시에 얌전하던 심장마저 뛰기 시작한다.
‘지금 앞에 있는 검사는 나에게 무슨 심정인지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을 추궁하며 더 많은 죄를 물으려 하고 있다. 모든 것이 싫다. 세상도 싫고, 살기도 싫고, 그리고 아버지도 싫다. 반드시 내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이곳에 왔어야 했다. 지금도 밖에서 엄마와 두 동생을 괴롭히며 그 여흥을 즐길 것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선택의 순간들이 오간다. 무엇이 해답인지 결정하지 못하는 이 순간이 괴롭고 답답하다. 그저 아버지 때문에 일어난 이 모든 일에서 빨리 달아나고 싶을 따름이다.’
--- pp.158-159 「6장 회전목마」 중에서
- 어머니 -앞으로도 남편이 우리 집에서 살아있는 한 나와 내 자식들의 고통은 나날이 더 커지고 말 것이다.
힘들고 두렵다. 이젠 끝내고 싶다.
나 하나로 내 자식들의 삶에 있어 힘든 여정을 마칠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이 이 집에서 사라지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의 결심은 후회 없고, 최선이라는 것에 스스로 위안 삼는다. 그 결심이란 남편을 죽이는 것이다.
남편은 늘 새벽이면 소변을 보고 큰아들이 만들어 놓은 음료수를 마신다.
자정이 지나고 모두 잠자리에 든 것 같다.
--- pp.203-204 「종장 Ⅰ」 중에서
- 작은아들 -
아버지의 삐뚤어진 가족 윤리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오는 시점에서, 나도 아니 우리도 아버지에게 그 어떤 동정과 관심도 싫고 혐오스러웠다.
나 하나만의 결단으로 지금껏 고통받고 살아온 식구들이 비탄했던 삶의 위안과 치료가 되기를 소원한다. 그 결단이란 나의 목숨을 걸고 아버지를 죽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고통스럽게. 나 스스로 이 무섭고 두려운 양면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인간의 사악함이란 정해진 인간에게만 찾아오는 줄 알았던 나의 순진함이 싫다.
--- p.205 「종장 Ⅰ」 중에서
- 막내딸 -
“난 네가 무척이나 부럽구나. 아버지와 그렇게 다정한 모습으로 통화하는 순간이…….”라며 옅은 미소로 말을 건네자, 상대는 무슨 뜻으로 하는지 궁금해 하는 표정으로 두 어깨를 살짝 움직인다.
“별걸 다 부러워하는군요.”
그도 나에게 옅은 미소를 보인다.
아버지, 나에게도 저런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
--- pp.207-208 「종장 Ⅰ」 중에서
- 큰아들 -
늘 자식과 아버지로부터 무관심한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고통의 나날을 삶의 동반자인 양 그렇게 힘들게 사시는 우리 어머니. 잘 될 거야, 모든 것이. 설령 잘못된다 해도 나만 문제 삼으면 나머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보이지 않는 그물코에서 자유롭게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나 스스로 두렵고 조바심치는 마음을 달래며 위안 삼으려 노력했다. 이렇듯 무서운 이면에는 또 다른 나의 무서운 힘이 작용하여 내가 생각했던 처음의 본질을 더욱더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 p.208 「종장 Ⅰ」 중에서
- 큰아들 -
다행이다. 아마도 어머니와 둘째는 냉장고 속의 음료수를 마시러 온 것 같았다. 두 사람 모두 냉장고 문을 여는 소리가 났으니, 더는 저 음료수를 마실 사람은 없다. 막내는 얼마 전부터 수면제를 먹고 잠이 들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아버지밖에 없다. 내가 오늘 죽여야 할 나의 아버지 말이다. 새벽의 어둠은 어제와 똑같은 기운이다. 그러자 지금 이 시각 나를 둘러싼 새벽의 어둠은 지난날과는 전혀 다른 고요함과 묵직함이 나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 무게감을 느끼고 있다. 공포의 무게감, 증오의 무게감, 행복한 가정을 끝없이 갈망하는…….
--- pp.208-209 「종장 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