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발행일 | 2021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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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18쪽 | 182g | 128*205*7mm |
ISBN13 | 9788932039121 |
ISBN10 | 8932039127 |
발행일 | 2021년 10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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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18쪽 | 182g | 128*205*7mm |
ISBN13 | 9788932039121 |
ISBN10 | 8932039127 |
시인의 말 1부 누님을 생각함/어리둥절/풀잎 이슬/새벽에 다녀간 비는/삼월/구용丘庸 선생/목월木月 선생/소주 반병/삭주구성朔州龜城/땅 팔자/뒤란/수평/추운 날/쇠백로 한 분/딱새 한 마리/고故 신현정을 생각함/너무 짧다/협객 박윤배 선생/밤섬 부근 2부 나비가 돌아왔다/쳐다보다/KTX에서/지나며/처서處暑 전/자유고속도로/테렐지 숲에서/알/박꽃/참새네 가족/즘생/“아들아 안전하게”/그러므로/여름의 초입/하구언에서/의자 2/의자/호수/삼개로5안길/후포/레지던스/서설/게 장수들이란 참!/파미르고원/봄면댁/날다/목화밭/계성유치원/버스/늙은 오리의 명상/새벽 4시/유사 이래/평화 2/자존自尊/바람 속에서 3부 아저씨/나의 서울아산병원 방문기/어느 소년/모처럼 외출/유문교/중학 시대/호미씻이/초당/돈암탕/추억에서/기념사진/가을비 속에서/박명/어느 묘적계/“납품업자들!”/안골목/딱 한 잔/듣는 사람/한밤중/복원/고골을 생각함/도계암/If I am a bird, I will fly to you!/연어샐러드에 관한 추억/문을 열다/흑백 사진 하나/연합?로이터 해설 박[匏]의, 긴~ 생애ㆍ김주연 |
새벽에 다녀간 비는
새벽에 다녀간 비는 가난한 시인의 담장을 지나가느라 간혹 두둑두둑 소릴 낸다
새벽에 다녀간 비는 어두운 어두운 곳만을 딛고 다니느라 간혹 발목이 희다
새벽에 다녀간 비는 산동네 길고양이 등을 쓰다듬고 오느라 간혹 눈이 매처럼 푸르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눈이 내리고 그쳤다. 그렇다고 한다. 어느새 홍제천변 일방통행 길의 은행나무와 벚나무는 이파리들을 남김없이 떨궜다. 바닥의 이파리들은 모두 쓸려나간 지 오래고, 바스러져 흔적으로 약간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도 하늘을 나눈 가지들 사이로 살짝 해가 났다. 앙상하다고 말하려는데, 그 앙상함 사이사이에 구름들이 매달려 있다. 나무와 해와 구름이 내 좁은 시야 안으로 옹기종기 모였다.
수평
참새 한 마리 내려앉자 가지가 휘청하면서 파르르 떨더니
이내 지구의 중심을 바로잡는다
어느 시인의 타임라인에서 오늘이 회문(回文)의 날이라는 사실을 확인한다. 앞으로도 뒤로도 같은 구조를 가지는 문장, 낱말, 숫자 등이 바로 회문(팰린드롬 palindrome)이다. 그렇게 오늘은 2021년 12월 2일, 20211202로 요약되는 날이다, 정말 그렇네, 회문... 최근의 또다른 회문의 날은 2020년 2월 2일이었다, 20200202, 그때 909년만이었다. 그러니까 그 전, 마지막 회문의 날은 1111년 11월 11일이었다.
의자2
방금 누군가 앉았다 간 의자 하나
강변을 향해 허리를 반듯이 펴고 있다
1111년 11월 11일에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백과사전에 등록될만한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삶에 건너뛰기는 없으니 그때에도 사람들은 촘촘하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나는 때때로 그런 촘촘함이 싫어서 의자에 앉아 있고는 하였다. 내가 좋아하는 의자는 다리가 셋인 스툴, 아니면 두 사람에게 조금 넉넉한 벤치이다. 나는 아예 기대지 않거나 온전히 기대는 것을 좋아한다.
아저씨
작은딸이 연세대에 갓 입학했을 때의 일이다. 채플 시간에 뒷자리에 앉아 토익 책을 펼쳐놓고 열심히 밑줄을 긋고 있었다. 바로 그때 목사님께서 다가와 말씀하셨다고 한다. “하나님 말씀도 좀 듣고 공부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데 얼떨결에 튀어나온 딸의 대답이 걸작이었따. “아저씨는 누구신데요?” 한바탕 웃음바다가 가라앉은 뒤 코끝에 걸린 안경을 들어 올리며 목사님이 가만히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 나는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아침밥 먹고 그 밥값 하러 온 사람일세!”
이 완연한 겨울의 기색에서는 웃음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일상이 꼬깃꼬깃 접혀 들어가 있는 유머를 좋아한다. 조심스럽게 접힌 것을 펴다가 맞닥뜨리는 유머에 실소를 터뜨리는 것이 좋다. 아내는 일 년에 서너 차례 그렇게 나를 웃긴다. 우리가 죽음으로 헤어질 때 그 유머들은 한 권의 책, 정도의 두께가 될까. 자꾸 빨라지는 어둠이 지척의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고 있다.
안골목
어머니 나를 업고 재용이네 집 앞 안골목 걸으실 때
발밑에 사부작사부작 깨어지던 그 살얼음 소리
지금도 이승인 듯 또렷이 들려오네
시인의 시를 읽는 동안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잠시 거리를 두게 된다. 내가 쾅 소리 나게 닫은 문이 다시 삐걱, 열리는 것을 시인이 다시 한 번 조용히 닫아주는 것 같다. 뭐 이렇게까지 투명하게, 라며 작게 웃게 되는 시들이 있는데 나는 그것조차 투명하게 넘어간다. 나는 오랜 세월 시인을 읽어오고 있다. 나는 조용하고 싶을 때,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는 시인의 시집을 여러 권 가지고 있다.
문을 열다
수덕사의 높은 산방에서 이 절의 방장 설정 스님은 이국에서 온 작가들에게 “제 스승은 101세에 열반에 드셨는데 그날 아침에도 ’지금이 몇 시냐‘고 물으셔서 ’8시입니다‘ 했더니 ’알았다‘고 말씀하시고는 잠깐 뜰 아래를 내려다보시고는 바로 돌아가셨다”며, 대체 죽음이란 이처럼 문을 열고 나가듯이 조용히 맞이하는 것이라며 그의 곁에 다가선 푸른 눈들을 향해 조용히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이시영 / 나비가 돌아왔다 / 문학과지성사 / 118쪽 / 2021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