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사군 가운데 낙랑군은 4백여 년 동안 한반도 대동강 유역에서 군림했다. 낙랑군은 관할 지역 곳곳에 성을 설치했고, 본국과 행정 연계를 이루며, 한강 이남 부족국가들과 교류했다. 진번군, 임둔군, 현도군을 한나라의 재정으로 운영한 데 비해 낙랑은 토착사회의 생산력을 활용했다. 행정관리도 처음엔 요동군에서 중국인을 데려다 쓰다가 점차 현지 조선인으로 바뀌었다. 한사군을 통해 대륙문물이 한반도로 들어왔고 한·중 관계, 그 애증의 역사가 본격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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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국 위나라와 서로 국경을 맞대고 충돌했다. 백제, 신라와 달리 고구려는 북방 대륙형 국가였다. 만약 고구려가 백제, 신라를 통합했다면 오늘날 한국민족의 영토가 더 컸을까? 그랬을 수도 있지만 정반대였을 수도 있다. 한때 중국 통일 제국과 겨루며 융성했던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등 수많은 세력이 중국이라는 용광로에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인의 고구려 신화는 식민지·분단 콤플렉스와 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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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의 불교가 고구려, 백제, 신라에 들어왔다. 삼국의 왕권 세력은 불교 내세관을 통해 지배체제에 대한 백성 불만을 무마시키려 했다. 이 세상에서 살기 어려워도 더 좋은 저세상으로 가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인간은 영혼의 갈증을 느끼는 법이니 불교를 통치이념이 아닌 순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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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공부하고 귀국한 유학자들이 관료로 진출하는 가운데 경덕왕은 중앙행정부서 관직명도 중국식으로 바꾸었다. 전제왕권을 누린 아버지 성덕왕 위업을 기리려고 무려 20톤짜리 범종(에밀레종) 주조에 들어갔고, 석불사(석굴암)와 불국사를 창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유교, 불교를 받아들인 것도 왕권 강화, 중국식 지명, 인명, 관직명을 받아들인 것도 왕권 강화였다. 왕권 세력의 중국화와 귀족 세력의 토착화는 훗날 고려 전기에 화풍과 토풍의 대결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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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광종 11년(960) 북방 세력 거란이 분열하고 고려가 거란을 견제하는 가운데 후주 장수 조광윤이 5대 10국을 통일하고 송을 건국했다. 중국이 통일되자 정세가 달라졌다. 고려는 송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고, 송 황제도 고려에 사신을 보내 광종을 고려 국왕으로 책봉했다. 이로써 고려의 칭제건원은 사라지고 고려와 송은 조공·책봉 관계에 들어갔다. 13세기 원 제국 복속 전까지 고려는 때로는 황제국, 때로는 제후국으로 정체성의 혼돈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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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명은 ‘오랑캐’가 세운 정복 왕조가 아니라 중국 한족이 세운 정통 왕조라서 조선 사대부들에게 매력이 있었다. 조선은 16세기에 성리학 화이사상이 강화되어 명을 향한 사대를 내면화했다. 종래 전략적 사대가 이념적 사대‘주의’로 변했다. 하늘을 향한 환구단 제사는 중국 황제 권한이고 제후국이 지낼 수 없다며 폐지한 것도 그랬다. 조선-명대에 이르러 조공·책봉, 사대(事大)·자소(字小)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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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동남아시아 화교와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에서 나오는 정보를 통해 아편전쟁 소식을 들었다. 에도막부는 영국의 군사력이 청을 압도하고 영토까지 점령했다는 정보에 위기를 느끼고 종래 대외정책을 바꿔 서양 근대식 무기와 증기선을 도입했다. 근대 동아시아 삼국의 운명은 그렇게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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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중 연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사의 관성은 길고 질기다. 중국 혁명 세력(한족 민족주의 세력)은 여전히 조선을 그 옛날 속방으로 여겼다. 한족 출신 쑨원은 조선을 ‘잃어버린 중국 영토’라 여겨 한·중 관계를 청일전쟁 이전으로 되돌리려 했고, 신규식을 비롯한 조선인 망명객들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젖어 있었다. 신해혁명은 공화주의 혁명이며, 만주족 청나라 왕조가 사라지고 한족의 제국이 부활한 사건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 ‘민족·민권·민생’은 ‘만주족을 내쫓고 중화를 회복하여 민국을 세우고 토지권을 고르게 한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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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민당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활동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등 민족주의 세력은 해방 이후 남한으로 들어왔다. 반면 중국 공산당 도움을 받아 활동했던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등 공산주의 세력은 북한으로 돌아왔다. 대륙에서 ‘형님’들이 싸우는데 ‘아우’들이 사이좋게 지낼 수 없었다. 중국 국공내전은 한반도의 남북분단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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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조중 변계조약 내용이 공개되자 중국에서는 협상 책임자 저우언라이에 대한 비판여론이 일었다. 중국에서 ‘인민의 벗’으로 불리는 저우언라이가 비판받는 것을 보면 조중 변계조약에서 북한이 나름 협상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조중 변계조약이 간도를 중국 영토로 고착화했다고 비판한다. 민족사에 그 뜨거운 충정은 이해하지만, 냉정한 국제사회에서 ‘실효 지배’가 갖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현실적 논거도 바로 실효 지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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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는 그 창시자보다 추종자에게서 더욱 강렬하게 나타난다. 유럽에서 내셔널리즘이 퇴조하고 있는 오늘날 동아시아 세계는 오히려 배타적 내셔널리즘이 득세하고 있다. 역사가 내셔널리즘에 포획되어 동아시아 세계의 갈등을 키운다. 중국은 ‘중국의 꿈’ 운운하며 중화 제국주의 발톱을 드러내고, 한국의 내셔널리즘 추종자들은 ‘만주는 우리 땅’ 운운하며 중국을 자극한다. 마치 손님이 집주인 의식을 장악한 듯하다. 동아시아의 ‘적대적 공생’ 질서를 해체하기 위해 두 나라 양심 세력이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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