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음악 작곡가의 작곡 기법
1. 황 혜 정(1963): 도전은 진행 중 〈공간 소리〉
황혜정은 한양대학교 음악대학교에서 작곡과 작곡이론을 전공 후 결혼과 함께 1989년 도미하여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교(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SUNY) at Stony Brook)에서 석사(M.A)를, 버팔로 뉴욕 주립대학(SUNY at Buffalo)에서 박사(Ph.D)를 마쳤다.
박사 학위 취득 후 가족과 함께 미국에 거주하며 럿거스 뉴져지 주립대학교(Rutgers University of New Jersey State University)와 윌리암 패터슨대학교(William Paterson University at New Jersy) 강사, 웨스트민스터 합창대학교(Westminster Choir College) 겸임 부교수(Adjunct Associate Professor)를 역임 하였다. 2010년 귀국 후 3회의 개인 작품발표회를 가졌으며 창악회, 아시아작곡가연맹(ACL), (사)한국여성작곡가회 회원 및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전 성신여자대학교 작곡과 교수, 현 미주아시안작곡가연맹(A.A.C.M.A.) 음악 감독 및 〈공간 소리〉 대표 겸 프리랜서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다.
1. 어린 시절
어릴 적 할아버지 할머니를 비롯한 대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자란 나의 기억은 늘 행복하고 좋은 기억들뿐이다. 엄마는 맏며느리로 아침부터 밤까지 언제나 바쁘셔서 나한테만 오로지 신경을 쓰실 여유는 없으셨다. 그래서 난 어린 시절 대부분 조부모님과 고모, 삼촌과 시간을 많이 보냈고, 그 시기 그 또래가 그렇듯 난 알아서 하루를 재미있게(?) 보냈다. 집 안 정원엔 갖가지 꽃들이 많아서 계절마다 다르게 피는 꽃들을 구경하고, 반려 동물들(개 두 마리, 고양이 두 마리)은 늘 내 친구들이었다. 동네 입구에 있던 우리 집 앞마당과 뒷마당의 아름드리 큰 라일락 나무는 봄이 되면 온 동네를 아름다운 향기로 덮어 어린 내게는 아주 큰 자랑이었다.
2. 종교 그리고 음악
고등학교 1학년, 부모님께 음악 작곡을 전공 하겠다는 내 결심을 알렸다. 부모님은 적지 않은 충격으로 뜨악한 표정을 지으시며 만만치 않은 반대를 하셨다. 그때까지 전교 몇 등 안에 드는 성적으로 공부도 잘하고 한 번도 부모님 신경 쓰이는 일을 하지 않고 평범하게 말 잘 듣던 딸이 어느 날 뜬금없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으로서는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고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그 당시 신문에는 매일같이 음악이나 미술 렛슨과 관련된 비정상적인 과외교습과 지나친 치맛바람이 만든 예술대학 입학부정 비리가 걸핏하면 기사로 올라와서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음악, 미술을 전공하는 자녀와 그런 자녀를 둔 부모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던 때였다. 또한 음악이나 미술은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소질이 있어서 꾸준히 준비를 한 사람들 이외에는 이과 혹은 인문계 계통의 대학을 가기에 실력이 모자라는 아이들이 대학을 가기위하여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안 좋은 인식이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늘 상위권을 유지하는 성적으로 당신들의 자부심이었던 딸이 갑자기 사회적으로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는 예술을 전공하겠다고 하니 참 기가 찰 노릇이셨다. 만약 첫 해에 실패를 하면 우리 집 집안 형편으로는 그 뒷받침까지는 어렵다는 건 나도 이미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우리 집은 딸만 다섯이었고 나는 그 중 둘째 딸이었다. 그래도 일단 뒷일은 뒤에 걱정하자는 심정으로 나는 너무 감격하고 좋아서 눈물을 글썽이며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고개만 크게 끄덕거렸다.
3. 유학을 꿈꾸며
음악 작곡을 위한 공부는 생각만큼 만만치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배운 피아노는 당연히 출중하지는 못했고, 청음 공부는 내게 상당한 절망감을 안겨줬다. 남들보다 배의 노력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청음 실력을 늘리는데 집중하였다. 중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도 그대로 유지하려니 정말 바빴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마다 부모님과의 약속, 내가 마음대로 정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생각하며 열심을 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무튼 운이 좋게도 한 번에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합격을 하였다. 대학에 입학 한 나는 신이 나서 학교를 다녔다. 당시 한양대학교까지는 전철이 개통되지 않았던 때라서 학교에서 꽤 먼 곳에 살았던 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거의 2시간이나 걸려 학교에 도착하였다. 대학에 와서 보니 남들보다 내가 음악 공부를 늦게 시작한지라 부족한 점이 많음을 깨닫게 되었고, 내 스스로 실망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4. 결혼과 공부
나는 대학 졸업 후 작곡 이론 전공으로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대학원 학비를 위하여 장학조교로 1년 동안 있었다. 하지만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겨서 조교일은 1년만 하고 그만두었다. 논문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면서 나는 유학 준비에 신경을 썼다. 하지만 마음만큼 능률이 오르지 않아서 답답하였다. 대학원을 마칠 즈음 후배로부터 지금의 남편을 소개 받았는데, 뉴욕 맨하탄에 있는 암연구소의 연구원으로 갈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 같이 가면 내가 학업을 계속 하는 것에도 도움이 될 거라는 후배의 말을 듣고 만나보았다. 남편도 내가 계속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좋은 계획이라고 동의해주었다. 1989년 결혼 후 일주일 만에 남편은 먼저 미국으로 갔고, 나는 논문을 마무리하고 몇 개월 후에 뒤 따라 갔다.
도착한 뉴욕 맨하탄은 내가 사진에서 보던 전형적인 ‘미국’ 이 아니었다. 회색빛 고층 빌딩만 즐비한 빌딩숲이었다. 거리는 너무 지저분하였고, 사람들은 무표정에 대부분 불친절하고, 매일 들리는 뉴스는 밖에 나가기 무서울 지경이었다. 한국에서는 아무 문제없는 일상의 일들이 뭐든 생소한 탓에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언어가 서툰 것이지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 아닌데 그들은 언어가 서툰 나를 마치 생각도 모자란 사람처럼 취급을 하였다. 가족도 그립고 혼자 있으면서 겪는 일들이 너무 서러웠다. 하지만 남편은 그곳 연구소 연구원으로 간 터이니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내게 신경 쓸 틈 없이 너무 바빴고, 나 또한 내가 목표로 한 공부를 하려면 그렇게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를 계속 하고 싶다는 열망과 결심을 상기하며 그곳에서 TOEFL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
박사 논문과 작품을 준비하며 나는 점점 서양 창작음악과 차별화된 한국적 소리를 찾게 되었다. 그때는 지금만큼 인터넷으로 자료를 구하는게 쉽지 않은 때라서 한국에 있는 가족에게도 자료를 부탁하여 받았다. 나는 박사 과정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적 이야기에 기반 한 챔버오페라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삼국유사에 전해지는 ‘처용’ 설화를 다섯 악장으로 구성하고 가사는 이야기를 이어가는 주요 단어와 판소리의 추임새를 응용하였다. 한국 귀국 후에는 풍부한 지적, 인적 자원의 도움으로 한국 전통악기 연주자와 서양악기 연주자가 같이 연주할 수 있는 작품도 시도하였고, 서양 악기만으로 구성된 작품에서도 한국적인 음악적 뉘앙스가 풍기는 작품도 완성하였다.
5. 음악 페스티벌
버팔로 뉴욕주립대학교(The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Buffalo, SUNY at Buffalo)에서는 매년 6월 첫 주에 일주일 동안 June in Buffalo(JIB) 라는 음악 페스티벌이 열린다. 이 페스티벌은 1981년 버팔로 대학의 작곡과 교수로 있던 몰톤 팰드만(Morton Feldman)에 의해 시작되었다. 시작 후 해를 거듭할수록 미국 내 유명 작곡가들이 차례로 참여, 점점 더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는 작곡가 중심의 음악 페스티벌이다. 공식적인 페스티벌의 종료 후 JIB 의 스태프와 초청작곡가는 총감독인 David Felder의 집으로 다시 초청을 받아 한 번 더 모인다. 이 때는 서로의 수고와 도움에 다시 한 번 더 감사를 표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마무리 정리와 함께 다음 해 기획에 대한 전반적인 점검 및 세부 계획들을 미리 체크한다.
7. 귀국
2010년 3월 2일 나는 한국 대학의 강의실에 서있었다. 박사 과정 중에 2년 그리고 2001년에 박사 과정을 마친 후 9년, 총 11년을 미국 대학에서 강의하였다. 1989년 결혼과 동시에 한국을 떠난 후 21년 만이었다. 남편과 아들은 아직 미국에 있고 나는 학기 중에는 한국에서 강의를 하고 방학 때는 미국 집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 2년 정도는 여름 방학 때 미국으로 돌아가면 미국에서 가르치던 대학에서 여름학기 강의도 하였다. 하지만 너무 힘들어 미국에 있는 동안은 작품을 쓰는 일과 쉬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리고 나는 혼자 한국과 미국을 오갔고, 미국에 있는 남편은 직장일과 대학을 준비하는 아들을 돌보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2014년 가을에 아들은 대학에 진학하여 그곳에 남았고, 남편과 나는 2015년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하였다. 한국을 떠난 지 26년만이다.
2016년에 성신여자대학교에 교수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감사함과 동시에 너무 기뻤고, 책임감을 갖고 무엇이든 열심을 내어 최선을 다하였다. 집이 학교와 먼 거리에 있었기에 왕복 3~4시간이 걸렸다. 역시 새벽에 나가 밤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부임한지 2년 정도 지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드는 심상치 않은 생각이 있었다. 그동안 내가 바라고 희망하던 교수로 있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왜일까?, 내가 왜 이럴까?’ 계속 스스로 질문에 질문을 하는 날이 이어져갔다. 점점 내가 음악 교육가인지 작곡가인지 모호한 상태의 그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시간에 쫓겨 겨우 완성하고 연주되는 내 작품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하였다. 과도한 강의 의무에 음악 교육자가 내가 바라던 삶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