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그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디까지를 믿을 수 있는 존재인가.”
박동건, 그가 끝내 죽었다. 그를 저세상으로 데려간 것은 어떤 병이 아니었다. 가을 찬바람 속에서 떨어지지 않을 단풍이 어디 있겠는가. 서릿바람에 못 견디어 떨어지는 무수한 낙엽들을 누가 기억하겠는가. 그는 계절풍이 아닌 야릇한 바람에 휩쓸려 한 잎 낙엽으로 떠나갔다.
윤혁은 낙엽이 흩날리는 공원에 망연히 앉아 있었다. 허망한 것도 공허한 것도 아닌 가슴에서 절망에 빠진 박동건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죽음치고 허망하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으며, 죽음으로 바뀐 삶이 공허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을 것인가. 그러나 박동건의 죽음은 그런 평이한 감상만으로 맞이하기가 어려웠다. 남다르게 질곡 많은 삶에 그만큼 회한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는 스스로 시대의 짐을 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던 일생을 살다 갔다. ……그렇지만 어찌할 것인가. 시대는 변해가고, 그 파도는 거칠고 매정했다. 그 거센 시대의 파도 속에서 개개인은 하나씩의 물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이거 우리 헛산 것 아니오?”
박동건의 말은 말이 아니고 절망의 울음이었다. 그 울음은 홍수가 되어 자신에게 떠밀려오는 것을 윤혁은 여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참혹하게 일그러지는 박동건의 얼굴이 그가 지켜온 성(城)이 얼마나 심하게 무너지고 있는지를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 「1. 한 잎 낙엽으로」 중에서
차라리 그대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문득 스친 생각이었다. 죽음……, 인생의 끝……, 별로 두려운 생각이 없었다. 북쪽을 떠나면서부터, 남쪽에 침투하고, 검거되고, 조사 받고, 긴 세월 감옥살이를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이 생각했던 것인가. 이 세상에서 죽음을 가장 많이 생각하고 언급하는 직업이 철학가고 종교인들이겠지만 그 절박함과 밀도에 있어서 자신들을 당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자신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급박하고 절실하게 죽음을 생각한 부류들이 아닐까. 그렇게 해서 정리된 죽음은, ‘영원한 잠’이었다. 그 영원한 잠을 혼수상태와 다름없었던 지난 사흘 동안에 얻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진정한 마음이었다.
세상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도, 아무리 높은 명성을 드날리던 사람도 숨 끊어져 죽어버리면 그 존재를 냉혹하리만큼 지워버리는 파도 거센 바다였다. 생전에 큰 위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어도 세상은 아무런 이상도 탈도 없이 태연하고 무표정하게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전향한 장기수 하나쯤이야……. 그 허무감 앞에서 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하는 회한이었다. 그런 감정의 반복과 교차가 어리석은 것인 줄 알면서도 떼칠 수 없었고,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게 ‘사상적 삶’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했었던 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애였다. 분명한 목표는 분명한 성과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 「2. 두 송이 꽃」 중에서
“근데 있잖아요, 할아버지.”
“그래. 어어 시원하다, 거 참 시원하다.”
윤혁은 시원함을 한껏 과장하고 있었다.
“누나가요, 서로 좋아하고 친한 사람끼리는 영혼이 통한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뭐라고? 영혼이 통해? 너, 그 어려운 말을 어찌 아누.”
그 맹랑함에 하도 어이가 없어서 윤혁은 고개를 돌리고 기준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할아버지, 그 정도 말은 하나도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우리가 보는 동화책에 다 나오는 거거든요.”
“허, 동화책에? 그럼, 영혼이 뭔고?”
“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정신이잖아요.”
기준이는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검지로 거침없이 머리를 가리켰다.
“허어, 그놈 참 야무지기는. 그럼, 영혼이 통한다는 건 뭐고?”
“이번에 할아버지가 아프시니까 누나도 저도 할아버지 아프신 꿈을 꿨잖아요. 할아버지 영혼과 우리 영혼이 서로 통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요.”
“아이구 이놈아, 초등학교 5학년이 모르는 게 없구나. 됐어, 됐어, 아주 잘 알았어. 우리 기준이 장하다.”
윤혁은 용솟음하는 기쁨과 함께 기준이를 얼싸안았다. 기준이도 윤혁을 마주 안았다. 윤혁은 기쁨이 갑절로 커지는 것을 느꼈다.
--- 「2. 두 송이 꽃」 중에서
“글쎄요, 다 늙어빠져서 그런지 어쩐지 연애 얘기라는 게 어째 별 재미도 없이 시큰둥하고 그렇군요.”
이미 연애소설을 번역 중이라는 것을 알려준 터라 윤혁은 천연스럽게 받아넘겼다.
“하긴 그래요. 사랑 얘기야 풋내기 젊은것들이나 침 흘리는 거지 우리같이 점잖은 사람들이야 뭐…….” 김 형사는 습관처럼 날쌘 눈초리로 윤혁을 곁눈질하고는, “내가 꼭 보여주고 싶은 걸 가져왔소” 하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접은 신문지를 기세 좋게 착 꺼냈다.
“뭐 재미있는 건가요?”
윤혁은 낭비하는 시간이 아깝지만 내색은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말 응대를 하고 있었다.
“암, 재미있지. 재미있고말고요. 어떤 교수가 쓴 글인데, 내가 딱 하고 싶었던 말을 썼더란 말이오.” 김 형사는 접힌 신문을 부지런히 펼치더니, “자아, 뭐 길게 읽을 것 없이 중요한 한 대목만 딱 읽겠소. 크음, 큼, 자알 들어요. 마르크스주의란 기본적으로 밥 먹는 철학인데도 그것을 실현시키지 못해 결국은 스스로 몰락하고 말았다. 여기 밥 먹는 철학이라는 말 앞뒤에 점이 하나씩 찍혀 있는데, 이 ‘밥 먹는 철학’이라는 말이 어떻소? 이거 참 기막히지 않소? 이 교수님이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을 딱 찍어서 했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하며 신문을 윤혁 앞으로 바짝 디밀었다.
--- 「3. 밥 먹는 철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