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인간적인 시스템 속에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오히려 유령, 괴물, 도망자가 돼버린다. 작가는 주요 등장인물의 전직을 취업 준비생, 대기업 사원, 남파 간첩 등으로 다채롭게 설정해 사실상 누구도 시스템의 덫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이 절박하게 선택한 마지막 도피처는 근대인의 자연 착취를 상징하는 동물원이다.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동물을 흉내 내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 아이러니의 포맷은 통렬하다. 그런데 동물원에서 동물을 흉내 내며 살아가는 그들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애를 나누고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게 되는데, 이 작은 기적은 이 소설이 준비한 또 하나의 아이러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물이 되어보고 나서야 다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된다. 누구는 콩고로 날아가 동물로의 완전한 귀화를 선언하고, 누구는 재취업에 성공하거나 혹은 시험에 합격하고, 또 누구는 곧 태어날 2세를 기다리며 여전히 동물원에 남아 가슴을 두드리고 모형 빌딩에 오른다. 이 희망의 결말이 얼마간 관습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려워서, 차라리 아이러니를 더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이 결말이 전체적으로 경쾌한 톤을 유지하고 있는 이 소설에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인 데다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고릴라들과 함께 기꺼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오르겠다는 이 작가의 선량한 의지의 소산인 것 같아서, 결국, 덩달아 따뜻해진 마음으로 작가의 편에 서기로 한다.
- 신형철 (문학평론가)
삶이 초라해질수록 이 세상은 거대한 동물원이 되어간다. 그 안에서 우리는 마늘을 까고, 공룡 알을 접고, 인형 눈깔을 붙인다. 우리를 바라보는 구경꾼들이 누구인지 모른 채. 동물원에서 동물들을 흉내 내는 동안은 누구나 사람이 아니니 사람 구실을 할 필요가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장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된다고 이 소설은 말한다. 그 잔인한 사실을 목격하는 순간 우리에게 동물원은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는 시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공작새가 날개를 펴기를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기다리던 10대는 예전에 지나갔으니 이제 동물원으로 느긋하게 산책하러 다니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 굿바이 동물원. 그렇게 중얼거려본다.
- 윤성희 (소설가)
《굿바이 동물원》은 주류 사회에서 밀려난 인간 군상이 마침내 동물원의 동물에까지 추락하는 열외의 이야기다. 슬프고 우습고 재밌다. 감수성 있는 문체는 문학적 재능의 번뜩임을 증명하고, 슬프지만 우습게 말하는 소설 문법은 삶을 보는 통찰력의 내공을 입증한다. 오랜만에 심사 위원 전원 일치의 지지를 받은 작품으로서 가히 그 값을 해낼 작가라고 믿는다.
- 박범신 (소설가)
처절한 경쟁 사회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의 실존과 내면을 처연하게 묘사하고 있는 《굿바이 동물원》은 내 마음을 서늘하게 건드리고 지나갔다. 그토록 우울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곳곳에 기발한 유머가 배어 있는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밥벌이의 위대함과 비애에 대해 생각했다. ‘시대의 슬픔’을 묘사할 줄 아는 새로운 작가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 권성우 (문학평론가)
마늘을 까면서 눈물을 흘리는 남자가 있다. 직장을 잃었을 때도 빈 화장실 하나 발견하지 못해 숨어서라도 울지 못했던 남자다. 그래서 마늘을 까며 비로소 운다. 삶의 짠 내와 매운 내가 뒤범벅된 눈물을 콧물과 섞어 줄줄 흘린다. 소설의 시작부터 같이 울어줘야 마땅할 일이다. 어쩐지 더 짜고 더 매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과연 그러하다. 마늘이나 까면서 울어야 하는 삶이라면, 그 삶의 도처에 도사린 경멸은 어찌할 것인가. 남자는 스스로 동물이 되기로 한다. 고릴라의 탈을 쓰고 가슴을 탕탕 두드린다. 그런데 이 비장한 슬픔이 뜻밖에 유쾌하다. 경멸을 속으로 집어삼킨 자가 경멸을 되갚아주는 방식을 아는 것이다. “엿 먹어라, 세상!”이다. 이 작가는 능숙하게 사람을 울리고, 능숙하게 사람을 웃긴다. 그러나 마침내 아프다.
- 김인숙 (소설가)
《굿바이 동물원》은 카프카적인 그것과 밀접하다. 언어의 단절과 불통, 심리적 소외로 말미암아 구겨진 인간관계, 복원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 특별한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오래전 카프카가 보여준 철문을 통과해, 느린 걸음으로 동물원을 지나, 안녕? 굿바이!
- 백가흠 (소설가)
여기 배꼽 잡는 동물원이 있다. 당신은 상추쌈에 마늘 한 조각을 얹다가, 아이에게 줄 곰 인형을 고르다가, 무심코 바나나를 한 입 베어 물다가 키득키득 웃음을 삼킬 것이다. 그러다 문득 콩고가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여기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동물원이 있다. 당신은 이미 ‘세렝게티 동물원’에 살고 있다.
- 조영아 (소설가)
‘세렝게티 동물원’은 우리 사회를 비추는 거울 뒷면이다. 마늘 먹는 시간을 견딘 끝에 곰은 사람이 되었지만 지금 인간은 마늘을 까서 푼돈을 벌고 곰 시늉을 내 밥벌이를 한다. 누구나 다 그 곰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아무도 사람이 곰 흉내를 내는 상황을 읽어내려 하지 않는다. 이 우화는 우리 사회의 증상이다. 작가는 짐짓 너스레를 떨며 이 증상에 병명을 부친다. 그리고 이 우화가 증상에 대한 고별이 되기를 바란다. “굿바이 동물원”, 그것은 우리 사회를 향한 뜨끔한 호명이자 애틋한 주문이다.
- 강유정 (문학평론가)
《굿바이 동물원》은 동물원에 사는 동물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들은 진짜 동물이 아니라 동물을 연기하는 공무원급 사람들. 어쩌자고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가? 동물 네 명(?)의 구구한 사연이 작가의 놀라운 입담에 의해 롤러코스터처럼 펼쳐지는 경쾌한 소설이다. 하루 종일 마늘을 까고, 100개의 곰 인형 눈깔을 붙이고, 본드에 중독되었다가 고릴라가 된 주인공, 무공을 연마하며 100 대 1의 9급 공무원시험에 도전하다 실패한 앤 고릴라, 대기업 오물처리반에서 일하다 토사구팽당한 조풍년, 사상과 혁명보다 월세와 공과금에 짓눌려 동물원에 온 남파 간첩 만딩고 고릴라. 바나나를 먹고, 털을 고르고, 12미터의 철제 구조물인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라 가슴을 치며 고릴라 흉내를 내는 이들의 비루한 판타지는 시종일관 우리를 포복절도하게 만들지만, 어느 순간 웃음 끝에 비어져 나온 눈물 한 방울을 만나게 된다. 문득 말풍선처럼 떠오르는 불길한 예감, ‘이거 우리 얘기 아냐?’ 한바탕 웃음 끝에 날리는 작가의 이 강펀치는, 이 작품을 만화에서 슬픈 블랙코미디로 바꾸어놓는다. 자본의 기계가 되어버린 우리의 삶이, 최고와 최저의 수위에서 동물과 인간의 한계를 지워버린다는 이 살벌한 농담 앞에서, ‘여기가 철창 밖이 아니라 안일지도 모른다’는 불안 앞에서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정은경 (문학평론가)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는 도시에 사는 사람을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과 같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야성을 포기하는 대신 동물원의 세계로부터 먹을 것과 마실 것 그리고 의료를 제공받는다. 동물원은 포식자로부터 동물을 보호해주며 안락함과 무료함의 세계를 제공한다. 야성의 삶을 포기하는 대신 동물들은 입장료를 지불한 관람객들을 위해 자신의 몸을 제공해야 한다. 동물원과 도시는 결국 같은 것이다. 《굿바이 동물원》은 삶을 위해 동물원에 들어가 가짜 동물 행세를 하는 가장의 이야기다. 이 같은 비극을 비극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풍자와 유머로 전달하는 것이 압권이다. 동물원 같은 도시의 삶에 지친 우리에게 이 책은 흥미로운 탈출 안내서다.
- 박성원 (소설가)
1997년 이후 한국 사회는 붕괴되자마자 동물원이 되었다. 차라리 세렝게티 평원은 평화로웠다. 정의는 없어도 먹어야 사는 슬픈 안분지족이 맹수들의 생태가 아닌가. 2012년 오늘의 한국은 슬픈 피식자들의 지옥이다. 가면을 벗으면 나오는 맨얼굴은 절규뿐인데, 이 소설은 그 절규의 희비극과 복마전을 능청스럽게 극화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다.
- 이명원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