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로 이 충무공의 역사를 보면 넬슨과 같은 것이 많으니, 해전에서의 뛰어난 능력만이 아니라, 세세한 일까지도 같은 것이 많았다. 초년에 이름을 알아주는 이가 많지 않았던 것이 같고, 말단 무관으로 긴 세월 동안 묻혀 있던 것이 같고, 끝내 적의 함대를 쳐부순 후 승전고를 올리고 개선가를 부를 때에 적탄에 맞아 눈을 감은 것도 같고…
그렇지만 저들은 수백 년 동안 열강과 경쟁하던 터라 전쟁에 익숙하였고, 나라 금고에는 억만금의 재화를 쌓아두어 군비에 쓰이도록 하였고, 기계공창에서는 수천 문의 대포를 제조하여 군사작전에 쓰이기를 기다렸으니, 넬슨은 아무런 깊은 책모와 원려 없이 다만 뱃머리에 높이 앉아 휘파람이나 불고 있었을지라도 승리를 거두었을 것이다.
이 충무공은 이와 같지 않았다. 군량이 고갈되었는데 준비하지 않으면 누가 준비하며, 무기가 무디고 낡았는데 제조하지 않으면 누가 그것을 제조하며, 병력이 줄고 쇠잔해졌는데 자신이 모집하지 않으면 누가 모집하며, 배의 운행이 느리고 둔한데 개량하지 않으면 누가 개량할 것인가. 그런데도 한편으로 동료인 원균 같은 자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정 간신배들의 참소를 당하였다. 넬슨으로 하여금 적병이 나라를 이미 거덜내버린 때를 당하여 이와 같은 곤란을 겪게 하였다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까?
급기야 원균이 대패하여 이 충무공이 6,7년을 노심초사하며 길러낸 용맹한 장수와 군졸들이며 군량과 선박을 모두 화염 속에 쓸어넣어 버린 후에, 십여 척 남은 깨진 배와 160여 명의 새로 모집한 군졸로… 바다를 뒤덮을 기세로 밀려오는 수천 척의 적선과 겨루게 되었다. 이순신이 바다를 향하여 한 번 호령하니 물고기와 용이 그의 위엄을 돕고, 하늘과 해가 빛을 잃고, 참담한 도적의 피로 온 바다가 붉게 물들었으니, 이 충무공 외에는 고금의 수많은 명장을 다 둘러 보아도, 이 일을 능히 해낼 자 실로 없을 것이다.
아, 저 넬슨이 비록 무용이 뛰어나다 하나, 만일 오늘날 20세기에 이 충무공과 같이 살고 해상에 풍운이 일어 서로 만나게 된다면, 필경 충무공의 아들뻘이나 손자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에 실린 신채호의 글을 다듬은 것이다. 이 글이 발표된 때는 나라가 바람 앞의 등불 같던 1908년이었다. ‘제2의 이순신’을 고대하는 신채호의 심정이 절절이 묻어난다. 이순신이 아무리 위대하기로소니 당대 세계 최고의 해군 명장 넬슨을 이순신의 아들, 손자뻘이라니, 너무 지나치다 싶은 독자에게는 다음 글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내가 평생을 두고 경모하는 바다의 장수는 조선의 이순신이다. 이순신 장군은 인격이나 장수의 그릇, 모든 면에서 한 오라기의 비난도 가하기 어려운 명장이다. 호레이쇼 넬슨이 세계적인 명장으로 명성이 높은 것은 누구나 잘 안다. 하지만 넬슨은 인격이나 창의적 천재성에서 도저히 이순신 장군에 필적할 수 없다.”
신채호와 거의 동시대를 살면서 일본 해군대학교 교장을 지낸 사토 데쓰타로의 글이다. 임진전쟁에서 이순신에게 치욕적인 수모를 당한 나라 해군 장성의 말이니 좀 더 객관적인 평가에 가까울 수 있겠다. 우리는 아직도 이순신을 제대로 모른다. 신채호의 표현이 당대의 민족적 과제 앞에서 적지않이 감상에 치우친 점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동아시아 세계를 되돌아볼 때면, ‘제2의 이순신’을 목 놓아 기다리던 그의 심정이 이해될 법하다. 일본이 가장 두려워하면서 존경하던 인물은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을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내는 이유다.
이순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그의 당대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최초의 이순신 전기는 그를 가장 곁에서 지켜보고 함께 전장을 누빈 조카 이분이 쓴 『행록』行錄(이후로는 이광수와 박태원의 선례에 따라 『이충무공행록』으로 표기)이다. 이순신 자신이 『난중일기』와 『임진장초』 같은 소중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분의 『이충무공행록』이 있었기에 우리는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포함한 이순신의 전 생애를 복원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충무공행록』은 이순신에 관계되는 모든 저술의 뿌리이자 젖줄이다.
『이충무공행록』이 집필된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지만, 임진전쟁 이후 이분의 삶과 그가 1619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미루어, 대략 1610년 어름에 쓰인 것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뒤이은 이순신에 관한 기록은 최유해의 『행장』行狀과 이식의 『시장』謚狀이다. 1640년대 초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의 유사성을 볼 때 두 기록 모두 『이충무공행록』을 저본으로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충무공행록』은 이순신의 후손들이 간행한 『충무공가승』忠武公家乘(1715)과 정조 때 규장각에서 편찬한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1795)에 실려 간행되었다. 인쇄본 『이충무공행록』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초기 필사본에 비해 내용에 다소의 가감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643년 인조 때 받은 시호 충무忠武에 관한 사항이 들어가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큰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충무공행록』이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은 소설가 박태원의 역주로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게 유일하다. 그 밖에는 여전히 ‘충무공전집’ 속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순신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임에 틀림없다. 오늘의 젊은 독자들이 이순신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데 보탬을 주기 위해 『이충무공행록』을 단행본으로 선보인다. 우리의 목표는 독자들에게 가장 날것으로서의 자료를 풍부히 제공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동시대의 자료들을 연관되는 부분에 광범위하게 부기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내용을 풍성히 하였다. 이 책은 『이충무공행록』의 한글 번역본이면서 아울러 이순신 관련 전기자료의 집대성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번역에서 유념한 것은 한 가문의 전기에서 모든 독자가 애독하는 전기로 한 걸음 나아가게 해보자는 것이었다. 등장인물의 표기를 객관적 역사서술이 되도록 한 것은 그 때문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순신은 1545년(인종 원년, 가정嘉靖 24년) 3월 8일(양력 4월 28일) 자정 무렵子時 한성 건천동 자택에서 탄생하였다. 이순신을 보고 점쟁이가 말하였다.
“이 아이는 나이 50이 되면 북방에서 부월斧鉞을 손에 쥐는 대장이 될 것이다.” --- 9쪽
스물두 살 되던 해 겨울에 때 비로소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동료들 가운데는 완력이나 말타기, 활쏘기에서 그를 따를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이순신은 성품이 고결하고 늠름하였다. 그리하여 같이 어울리던 무사들이 자기네끼리는 종일 농담을 주고받고 희롱하면서도, 이순신에게만은 감히 ‘너, 나’ 하지 못하고 언제나 공경하였다. --- 10쪽
이순신은 벼슬길에 오른 영광을 아뢰기 위해 조상의 묘에 성묘하러 갔다. 무덤 앞에 세운 석인상石人像이 넘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하인 수십 명을 시켜 일으켜 세우게 하였다. 하지만 돌이 무거워 여럿의 힘으로도 돌을 움직일 수 없었다.이순신이 하인들을 꾸짖어 물러서게 하고는 웃옷을 벗지도 않은 채 돌을 등에 지고 힘을 쓰니, 석인상이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 14쪽
이순신이 훈련원에 있을 때,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의 서녀庶女를 이순신의 첩으로 주려고 하였다. 이순신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일언지하에 중매를 거절하였다.
“벼슬길에 갓 나온 사람이 권세가의 집에 발을 들여놓아서야 되겠는가.” --- 18쪽
8월에 과연 적이 군사들을 보내 이순신이 지키는 나무 울타리를 에워쌌다. 붉은 털옷을 입은 적군 몇 명이 앞장서 지휘하며 달려오므로, 이순신이 활을 당겨 연달아 쏘아 맞혔다. 붉은 옷 입은 자들을 모두 거꾸러뜨리니, 적군은 달아났다. 이순신은 이운룡과 함께 그들을 추격하여 사로잡힌 우리 군사 60여 명을 탈환하였다. 이날 이순신은 오랑캐의 화살에 맞아 왼쪽 다리를 상했으나, 부하들이 놀랄까봐 몰래 화살을 뽑아버렸다. --- 27쪽
그리고 또 전선을 새로 만들었다. 판옥선만한 크기의 배 지붕을 판자로 덮고, 판자 위에 십자 모양의 좁은 길을 내사람들이 올라가 다닐 수 있게 하였다. 그 밖의 나머지 부분에는 온통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 어디에도 발디딜 틈이 없었다. 배의 앞머리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붙였는데, 입은 총구멍 역할을 하였다. 거북이 꼬리처럼 생긴 배의 후미 꽁지 밑에도 총구멍이 나 있었다. 배의 좌우편에는 각각 여섯 개씩의 총구멍을 냈다. 대체로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서 거북선이라고 불렀다. --- 38쪽
이순신은 전투를 벌일 때는 항상 장졸들과 함께 활을 쏘았다. 혹시라도 이순신이 적탄에 몸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장졸들이 그의 팔을 붙잡으며 간곡하게 간하였다.
“어찌하여 나라를 위해 몸을 자중자애하지 않으십니까?”
이순신은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하였다.
“내 목숨은 저기에 달려 있거늘, 어찌 너희들만 적을 상대하도록 하겠느냐.” --- 48쪽
모든 장수들에게 짐짓 패한 듯이 물러나도록 명령하였다. 적은 승리라도 한 듯한 기세로 아군을 뒤쫓았다.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니 바다가 확 트이고, 적의 배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이순신은 기를 휘두르고 북을 치며 급히 명령하여 배를 돌려 싸우게 하였다. 모든 배가 돛을 높이 올리고 돌진하며 대포와 화살을 우레같이 쏘아대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 찼다. 잠깐 사
이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며 바다를 붉게 물들였다. 적선 73척은 한 척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이 싸움을 한산대첩이라고 일컬었다.
--- 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