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절필동萬折必東, 장강의 물줄기는 일만 번 꺾여 흘러도 결국 동쪽으로 흐른다. 문명과 시류의 흐름은 물론 시시비비 또한 억지로 가려지는 게 아니다. 문명의 흐름엔 자연의 운행처럼 거역할 수 없는 싸이클이 있다는 걸 알겠다. 인간의 지혜가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작용들, 그 앞에서 중국의 현철賢哲들은 궁리하고 고심하였으니, 고승열전高僧列傳이 그 증거이며 공맹孔孟 사상이 그 본보기다. 그건 역법易法에 잠심하거나 도가道家 사상에 의탁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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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초〉는 본래 중국인 설도薛濤의 시 춘망사春望詞다. 중국인의 시를 여기 와서 다시 가르치는 감회가 남 다르다. 1946년 안서 김억 선생이 번역하고, 김성태 선생이 곡을 붙였다. 설도(770-832)는 당나라의 여류시인이다. 이를테면 우리의 통일신라 시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자는 홍도였으며, 동시대 대문호들과 교류하였으니, 백거이白居易, 두목杜牧, 원진元?(779-831) 같은 시인들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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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시인 오마르 카이얌은 사랑을 콤파스의 원심력에 비유했다. 영국 시인 존 던도 사랑을 콤파스의 두 다리라고 노래했다. 존 던이 육체를 '사랑의 책'이라 부른 건 재미있는 발상이다. 거기 '나는 그녀를 산책한다'는 에스프리 넘치는 시구가 보인다. 옥타비오 빠스가 시쓰기를 언어의 에로티즘이라 부른 건 이런 미학적 전통을 딛고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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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란 형벌엔 동서와 고금의 차이가 있을 리 없다. 이런 영혼의 형벌을 짐 지고 태어난 자, 그 이름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보들레르가 '저주받은 자'라고 일컬은 사람들 말이다. 18세기 양주팔괴楊洲八怪로 불린, 금농, 황신, 정판교, 이선, 왕사신, 고상, 나빙, 화암 등의 문화놀이터가 양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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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성이 시각적이고 기능적이라면, 고대성은 사색적이고 입체적이다. 들여다볼수록 해석의 가능성이 깊어지고, 그 의중이 무한까지 넓혀지기 때문이다. 이것을 문학 쪽에서 바라보면, 홑겹의 문학이란 읽기 쉽고 이해가 편하지만, 영혼을 거세게 뒤흔드는 힘이 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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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와 더불어 이곳 소주는 시인 묵객들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으니, 예로부터 소주는 수향으로 일컬어진다. 태호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사방팔방 수로의 물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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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견문록』에 보면 마르코 폴로는 먼저 소주蘇州를 거쳐 이곳 항주에 도착한다. ‘소주는 크고 훌륭한 도시이며, 주민들은 모두 비단옷을 입고 있다’고 감동한 그는 13세기 항주의 모습에서 아예 넋을 잃은 표정이다. 항주를 왕도란 의미의 킨사이Kinsai라 부르고 있는데,‘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매력의 도시로 마치 왕국에 있는 듯한 황홀경을 맛본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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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가치란 남다른 안목이 두드러질 때 빛난다. 건축이든 문학이든 마찬가지다. 마을의 구도와 형태를 독창적으로 설계한 다음, 열정을 다해 벽돌을 쌓고 길을 휘고 빈틈없이 마무리한, 이 거리를 보고도 감동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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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인지 호수인지, 하늘과 호수가 어디쯤에서 만나고 있는지, 그 크기를 도시 분간할 수 없는 건 흐린 하늘이나 탁한 동정호 물빛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악양루의 아름다움은 정자 하나에 있는 게 아니라, 호수와 정자와 그 주변 풍광의 어울림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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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엔 평자나 일자 다리가 거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이들은 반드시 반달 모양의 아치를 세워, 그 틈새를 화강암이나 붉은 벽돌로 채운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만들었으니, 교각 또한 운하와 더불어 전통양식을 지키고 있는 살아있는 교과서다.
--- p.156
사막에선 정지의 순간이 곧 죽음의 순간이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의식과 육체가 멈추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렇다면 창조적 삶이란 무엇인가. 새로움을 찾아 끝없이 움직이는 생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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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된다. 중국 애국가의 모태인 팔로군가의 작곡자가 한국인이란 사실 때문이다. 이 곡은 공목이란 중국 시인이 작사했으며, 정율성鄭律成이란 한국인 음악가가 작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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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주원장 자신의 입맛대로 따라주지 않은 것 같다. 업적은 업적이고 죄는 죄다. 후대의 우리가 거울로 여길 점이 이것이다. 특히 한 나라의 명운을 좌우하는 정치가들 말이다. 자꾸 역사를 들이대지만 역사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되풀이하여 순환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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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떼를 따라가다가 길을 잃었다. 하늘만 쳐다보느라 지상의 방향을 흘렸나 보다. 동쪽으로 발진하던 새떼의 후미가 점처럼 가물거리더니, 허공엔 발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하긴 불경에도 그런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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