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 나는 처음으로 익숙지 않은 것에 사랑을 느꼈 습니다. 사진을 보며 느낀 감정을 감히 사랑이라 불러도 되는 건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사 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닐 테니까요. 유럽이 어디에 위치한 대륙인지, 어떤 나라를 유럽이라 불러야 하는지 기본적인 것도 모르던 내가, 왜 이날 이종사촌 언니의 유럽 여행을 들여다본 걸까요. 그건 아마도 내가 유럽을, 더 나아가 여행을 사랑할 운명이어서 그랬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p. 16
나의 체크인 카운터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에 있는 전광판으로 갑니 다. 목적지별로 가야 할 카운터가 달라지는 게 새삼 신기하네요. 세상엔 이렇게 많은 목적지가 있구나, 하며 그 속에서 내가 가야 할 카운터를 찾 습니다. 가야 할 목적지가 분명한 이 순간이 참 좋네요. 이 순간처럼, 우리 삶의 목적지도 분명하면 좋겠어요. 방황하지 않고 분명한 목적지로 걸어 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정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깁니다.
오늘, 내가 정한, 나의 목적지로요.--- p. 19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걸까,
나의 여행지와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여행지에 대한 설렘이 커지는 이 시간이 좋습니다.
어쩌면 나는 비행기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좋아서,
여행을 떠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p. 22
여권에 도장 많이 찍어, 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어요. 워낙 여행을 좋아해 서 여행 많이 다녀라, 많은 곳에 가서 많이 배워라, 라는 말은 들어봤지만, 이 말은 정말 처음 들었어요. 세상에 어쩜 이렇게나 멋진 말이 다 있을까 요. 여행을 많이 다녀라, 많이 보고 많이 배워라, 라는 말처럼 흔하지 않아 서일까요. 처음 듣는 이 말에 유독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p. 23
나도 언젠가는 나만의 빛으로 화려하게 빛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의 나는 어떠한 빛도 뿜어내지 못할지라도,
라스베이거스의 밤을 밝히는 이 불빛들만큼이나,
화려하게 빛날 준비를 하는 거라고,
내가 화려하게 빛날 수 있는 때를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여봅니다. --- p. 76
나는 공항에 혼자 왔지만, 최종 이별 장소에서 당신을 떠올립니다. 마음 에 품고 있는 사람은 늘 이렇게 불현듯 떠오르네요. 떠나는 내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던 당신을 떠올리니, 왠지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도 당신에게 뒤 돌아 손을 흔들어줄 걸 그랬어요. 캐리어를 끌고 가는 뒷모습 만 보여준 것이 새삼 미안해집니다. 공항의 최종 이별 장소에서 떠올린 당 신의 얼굴을 다시금 마음에 품고, 보안 검색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떠 날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조금 쉬다가, 오늘의 목적지로 가는 비행기에 오를 거예요. 당신은 당신의 자리에서 나의 안녕 을 기원하고 있겠지요. 당신의 온기를 담은 말들을 속으로 되뇌면서요. 나 는 당신의 온기가 담긴 그 말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당신이 없 는 낯선 곳에서 잘 있다가, 돌아올게요. 당신의 품으로요.--- p. 95
늘 앞만 보고 달리느라 놓쳤던 오늘의 풍경도 바라보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여유도 만끽해 보세요.
평범했던 오늘의 풍경도 당신의 눈길이 닿아 비로소 아름다워지고,
지금 이 계절도 당신이 느낌으로써, 하나의 계절로 자리 잡을 테니까요.--- p. 107
나는 여행지를 존중할 줄 아는, 겸손한 여행자가 되고 싶습니다. 감히 그 곳을 판단하려 들거나, 감히 그곳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않아야겠습 니다. 고작 며칠 머물렀으면서 여기는 며칠이면 충분해, 라고 이야기하지 않으렵니다. 혹시나 누군가 내게 여기는 며칠 있으면 될까요, 하고 물어본 다면, 나는 그 여행지에서 보고 느낀 것만 말할 참입니다. 며칠 묵을 건지 는 본인이 판단할 수 있게, 가기 전부터 그 도시는 며칠 짜리 도시라는 생 각을 가지지 않게요.--- p. 143
나에게 여행은 빈 노트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거창하고 멋 진 행위가 아니라, 빈 껍데기라고 생각했던 내 삶을 하나둘씩 채워가는 일. 이것이 나에게는 여행이었습니다. 낯선 풍경들을 보며 내가 어떤 사람 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알게 됐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며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배웠고, 낯선 길을 걸으며 목적지로 가는 데는 다양한 길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꽤 많은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라 는 것도, 이제는 압니다. 여권에 도장을 하나 둘씩 찍으면서 오늘의 내가 되었네요. 낯선 곳에서 느낀 바람과 낯선 곳에서 느낀 감정들이 쌓이고 쌓 여, 마침내 내가 되었습니다. 길 위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를 해주기도 했던 나의 여행들이, 어쩌면 내 삶을 조금 더 풍부하게 만들어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 p. 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