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고등학교는 참 이상하다. 마음이 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서먹하다. 교복 탓인지도 모르겠다. 교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생활을 완벽하게 가려 준다. 학교 밖에서는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마치 한 집단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 「손가락」 중에서
초등학생일 때, 미유키란 친구가 있었다. 아주 친해서 늘 붙어 다녔다. 점심시간에는 교정 벤치에 나란히 앉아, 다음 날 입을 옷에 대해 의논했다. 될 수 있는 대로 비슷한 것을 골랐다. 얼핏 보아도 친한 친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옷. 아침 조회 때는 우리 둘 다 아코디언을 켰다. 가방에는 똑같은 키홀더를 매달고 다녔다. (중략) 졸업하고 우리는 서로 다른 사립 중학교에 들어갔다. 그 후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내가 미유키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미유키가 왜 나를 그렇게 좋아했는지도 전혀 모르겠다.
--- 「손가락」 중에서
불현듯, 설명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와 헤어져서가 아니라, 그 시간이 끝난다는 것에. 나는 눈앞에 있는 고등학생들보다 그녀와 보다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손가락」 중에서
나는 늘 내가 상처를 받은 것인지 에미에게 상처를 준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그 끔찍스런 혼란. 어느 쪽이든 최악이다. 그날, 에미는 나를 버스 정거장까지 데려다주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현관에서 구두를 신는 내 발톱은, 어젯밤에 바른 은색 매니큐어가 너덜너덜 벗겨져 볼품없었다.
--- 「초록 고양이」 중에서
“친한 것은 좋지만, 둘이서만 만날 붙어 다니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구.”
“또 그 소리야?”
넌더리가 났다. 다음 말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똑같은 말을 들어 왔으니까. 모두하고 사이좋게 지내야지. 친구는 많은 게 좋아. 친구도 재산이라구.
유치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엄마는 대체 ‘모두’를 누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모두’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따돌릴 때 외에는.
--- 「초록 고양이」 중에서
“나는 초록 고양이가 되고 싶어. 다시 태어나면.”
보라색 눈의 초록 고양이, 라고 말하고 에미는 꿈을 꾸듯 미소 지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도 그 생각만 했다고 한다.
“그 고양이는 외톨이로 태어나 열대 우림 어딘가에 살고, 죽을 때까지 다른 생물과는 한 번도 만나지 않아.”
에미는 열대 우림을 어떤 류의 숲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 「초록 고양이」 중에서
“그럼 만나자.”
요시다가 구사하는 말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 그럼 만나자. 나는 싱글거리는 속내를 눈치 채지 못하게,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러지 뭐.”
라고 대답했다.
--- 「천국의 맛」 중에서
때로는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너무 어린 탓이 아니라 엄마가 나이를 너무 먹은 탓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똑같지 않다. 전혀 다른 차원이다.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아직 어리다면 언젠가는 이해할 때가 온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해하기에는 너무 늙었다면, 그 사람은 영원히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아주아주 슬픈 일이다.
--- 「천국의 맛」 중에서
사탕은 독약. 지금은 그저 수첩에다 달아 놓을 뿐이지만.
파란 사탕은 가벼운 독, 가벼운 벌을 주기 위한 것이니까 아마도 미미한 두통과 구역질 정도. 검정 사탕은 독한 독, 죽음에 이르는 독이다. 지금까지 사탕일기를 쓰면서 몇 명이나 독살했는지 모른다. 한 명을 몇 번이나 죽인 적도 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 「사탕일기」 중에서
일단 죽은 후에 다시 산다.
그 말이 나의 뇌리에 또렷하게 각인되었다. 일단 파괴한다는 것. 나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알아 버렸다. 파괴하면 돌아갈 장소가 없어진다는 것을.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여름휴가 때나 설날 때나 홀로 아파트에서 지내고, 아르바이트하는 여고생에게 친구 대접 이나 받는 오니시 씨처럼.
여행은 파괴의 결과이다.
--- 「사탕일기」 중에서
독신 생활이 자유롭고 편하기는 한데, 한 가지 곤란한 일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가출할 수 없다는 것.
“그렇잖아, 내가 가출을 해 봐, 그건 절대 가출일 수 없잖아. 돌아오면 여행인 거고, 돌아오지 않으면 이사잖아.”
이모는 가능성의 문제라고 말한다. (중략)
“내가 실종 신고 해 줄게. 그러니까 이모도 가출할 수 있어.”
이모가 정말 어린애처럼 가출을 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지만, 그래도 만약 가출을 하면 실종 신고를 하고 찾아내면 데리러 가 주리라.
이모가 말한 대로, 그것은 가능성의 문제다.
--- 「비, 오이, 녹차」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