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는 중화전, 함녕전, 덕홍전 등 치열하게 전개된 근대의 흔적을 간직한 궁궐 전각과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뿐만 아니라 이처럼 다양한 식물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비록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자 조선 시대 정원의 백미로 꼽히는 창덕궁 후원(後苑)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시민들은 숨 가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시공간적으로 낯선 체험과 심신의 평안을 누리고 사계절의 변화를 몸소 느낄 수 있는 덕수궁 정원을 사랑한다. 덕분에 문화재청과 미술관이 진행하는 행사나 전시가 없더라도 덕수궁에는 언제나 궁궐 건축과 정원을 즐기려는 시민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정동 일대 직장인이 삼삼오오 산책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 p.17, 「덕수궁에서 만나는 ‘상상의 정원’ : 《덕수궁 프로젝트 2021》을 기획하며」, 박혜성(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중에서
동서양 정원의 역사를 통틀어봐도 한국 정원이 지닌 자연 친화적이면서 생태미학적 특성은 매우 각별하다. 형식 미학에 기본 바탕을 둔 서구의 정원이야 말할 것도 없고, 아시아나 중동 등 어디에도 한국처럼 자연 친화적이고 생태미학적인 태도와 가치를 일관되게 견지하고 있는 정원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그러한 특질은 형사(形似)보다는 사의(似意) 혹은 신사(神似), 곧 뜻이나 정신을 중시한 동아시아의 예술 취향과도 잘 부합되면서 한국 정원 미학의 기조를 이룬다.
--- p.184, 「한국정원, 생태미학과 상상으로 읽기: 한국 정원의 생태미학」, 성종상(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중에서
상상의 정원을 글로 펼쳐내는 지적 경향은 18세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성황을 이뤘다. 대개는 허균이 상상한 정원처럼 아담한 규모를 선호하였으나 때때로 유경종의 의원처럼 규모를 상당히 크게 확장한 정원을 설계하기도 했다. 유만주(兪晩柱, 1755~1788)가 설계한 상상의 정원도 눈여겨볼 만하다. 유만주는 정원을 감상하고 조성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름난 정원이야말로 성령(性靈)을 도야하는 도구”라고 하여 정원이 정서의 안정과 심성의 수양에 기여하는 점에 주목하였다. 또 그는 “이 세속 도시의 더럽고 비좁음에 싫증이 나서 바다와 산이 있는 맑고 트인 곳을 찾아 정원의 장소를 확보하고자 한다.” 라고 하였다. 비좁고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당시 한양의 도회지 주택 사이에서 인간이 숭고한 품격을 지닌 삶을 살고자 꿈꾼다면, 새롭고 넓고 깨끗한 경관이 있는 자연환경에서 정원을 조성하여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유만주의 생각은 18세기 후반 사람들이 정원을 중시한 심리를 잘 대변한다.
--- p.193, 「조선 시대 지식인이 상상한 가상 정원: 바다 밖과 서울 동대문 밖에 조성한 상상의 대정원」, 안대회(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중에서
‘공공(公共)을 위한 정원(庭園)’인 공원(公園 ; park ; public garden)은 근대의 발명품이다. 일반적으로 근대화는 경제적 산업화, 정치적 민주화, 환경적 도시화라는 세 가지 차원의 변화를 수반하기에, 근대 사회를 낳은 산업혁명, 시민혁명, 도시혁명은 근대 도시공원의 탄생을 위한 역사적 전제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길들여진 자연, 인공적으로 관리된 관상수(觀賞樹)의 군락으로서 정원 그 자체는 전근대에도 널리 존재했음을 감안한다면, 근대 이후의 공원을 규정하는 핵심적 특징은 공공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 정원이 대개 황제나 국왕 , 귀족 등 일부 향유층에 국한되어 조성된 사적인 공간이었다면, 일반적으로 근대 공원은 시민 또는 국민 대다수를 위한 공적 공간이라는 특징을 띠는 것이다.
--- p.199, 「근대 도시공원, 식민성과 근대성의 양의성: 근대사회와 공원」, 김백영(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중에서
인화문과 중화문의 거리가 짧고, 경운궁 동쪽에 국가적 상징 시설인 환구단이 들어서면서 동쪽의 대안문이 정문으로 변모했다. 다른 궁궐에서는 금천교 주변 물길을 따라 매화, 앵두나무, 버드나무 등이 식재되어 있으나, 경운궁 금천교에서는 볼 수 없었다. 금천교뿐만 아니라 궐내는 빈번한 공사 진행으로 장식적 수목이 보이지 않는다. 추후 선원전으로 변모할 융무당과 부군당에는 향나무가, 수옥헌 후면에는 다양한 잡목림 사이에 낙락장송 두 그루가 있었다. 구성헌 후면 구릉지에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회화나무가 있고 외곽 후면에는 잡목림과 회화나무 거목이 눈에 띈다.
--- p.209, 「경운궁에서 덕수궁까지, 그 자리를 지킨 나무 이야기: 품격은 갖추고 나무는 살리다」, 김해경(건국대 녹지환경계획과 교수) 중에서
조선 시대 여성은 그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제한된 영역 안에서만 정체성을 영위하며 살아갔다. 시간이 흘러 많은 변화를 이루었지만 현대에도 우리는 느닷없이 이러한 상황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이름 없는 누군가들은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들은 곧 우리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이름과 이야기를 갖고 있다. 작품을 마주하며, 우리의 고된 삶 속에 담기는 외로움 , 쓸쓸함 , 담담함 , 공허함 등 복합적인 감정을 마주하며 위로하는 쉼터와 같은 순간이 되길 소망한다.
--- p.227, 「전통으로 읽는 ‘상상의 정원’ : 심은용, <눈물이 비처럼>, 2021」, 김성민((재)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공연기획팀장)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