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디자인 교육을 하는 사람이고 과학자도 엔지니어도 아니다. 그러나 디자이너로서 어떻게 하면 깨끗하고 아름다운 환경에서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환경에서 자연과 공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재미있고 즐겁게 공동체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기술 혁신을 통해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최소한의 자원으로 충분한 형태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을까? 등을 고민하고 공유하면서 디자인을 통해 그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 궁극적으로 더 건강하게, 더 풍요롭게, 더 조화롭게, 더 쾌적하게 살고 동시에 사람과 사람이 사는 지구의 생태계가 조화를 이루고 지속가능한 환경을 모색하는 게 미래 디자인의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원자력발전과 디자인, 언뜻 보기에 어떤 상관관계도 있을 것 같지 않지만 거의 20년 가까이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2002년 신월성1, 2호기를 시작으로 신고리3, 4호기, 신한울1, 2호기와 국내기술로 첫 수출한 UAE의 바라카 원자력발전소 그리고 최근 2019년 신고리5, 6호기까지. 원자력발전소 환경친화 디자인, 원자로 외관 디자인, 주제어실 설계자문 그리고 기기식별 사인 시스템까지 포함해서 원자력발전소가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디자인과 관련된 일들을 수행 해왔다. 이렇게 한 분야의 일을 오랫동안 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은 연구자로서 매우 감사한 일이라 그동안 열정을 다해 연구한 것들의 과정 속에 기억되는 에피소드들을 일반인들도 재미있게 읽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으로 쓰고자 한다.
이 책은 세 개의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1부는 ‘왜 원자력인가?’ 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원자력에 대한 배움과 경험을 통해 얻은 나의 견해를 이야기한다. ‘2050년 탄소 중립’을 전 세계가 외치는 이 시기에 탄소중립을 실현하면서도 안전하고 싸고 언제 어디서나 공급받을 수 있는 에너지가 원자력이라고 생각하지만 탈원전에 대한 논란이 과학자들만이 해결해야 할 일이고 나와 상관없는 일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핵이나 원전에 의해 위협당하지 않는 삶의 가능성은 없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의 모순들에 대한 개인적 생각들과 중립적 시선의 근거를 통해 미래 에너지를 위한 초협력의 방법을 제안한다.
내가 원자력 전문가가 아니므로 노력은 했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이 책을 내놓는 것은 오류에 대한 지적과 합리적 비판에 대해 수용할 열린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2부는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디자인 이야기이다. 그동안 디자인 과정에서 대상지 분석과 사례조사 그리고 발표 등을 목적으로 여러 차례 방문했던 지역과 사람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발전소 형태요소’와 ‘디자인 개념과 아이디어 전개’에서는 실제 원자력발전소 디자인 과정과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국내 발전소와 사례조사로 방문했던 프랑스와 일본 원자력발전소가 포함된다. UAE 바라카 원자력발전소는 첫 해외 수출이라는 쾌거를 이룬 의미 있는 발전소로, 시작부터 최종 결과까지의 전체 이야기를 디자인 프로세스로 정리하면서 단계별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이 책은 디자인 전문서적도 교재도 아니지만 디자이너뿐 아니라 디자인 프로세스나 방법론에 관심 있는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로울 수 있다.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과 새로운 도구를 사용하여 통찰력을 갖게 되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디자인 결과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디자인 씽킹’이라고 한다. 디자인적 사고에 기반한 ‘디자인 씽킹’은 문제를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것을 도와서 창조적인 해결책을 도출할 수 있는 강력한 프로세스이다. 디자인은 디자인과 관련 없는 무수히 많은 모호하고 불확실한 것들과 연결된다. 상상과 경험이 일치할 때 창조력이 생긴다.
요즘 사회적으로 이러한 디자인적 사고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디자인이 사회 여러 분야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즉, 디자인적 사고가 매우 분석적이며 창조적 사고의 틀을 확장시켜 오늘날 중요한 문제의 해결에 필수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디자인 작업의 즐거움은 최종 디자인 결과에만 있지 않다. 디자인 과정에서의 창의적 실험과 새로운 방법의 시도 등을 통해서 얻는 기쁨이 크다. 과정이 결과만큼이나 창조적이고 독특하기 때문이다.
디자인 분야에서 대부분의 일은 기본적으로 협력과 협업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원자력발전소와 같은 특수한 분야의 디자인은 준비,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관계된 많은 사람과 협력해야만 한다. 발주처인 원자력발전소 설계회사인 한국전력기술주식회사와 한국수력원자력과의 협력의 중요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 책은 성공적인 협력의 기술인 ‘공감’에서 출발하여 디자인 단계별로 사용되는 구체적 도구와 전략을 설명하고 차별화된 문제 해결을 위한 서로의 협력의 과정을 정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작은 조각과 같은 원시적 아이디어들이 자리를 잡아가며 점차 퍼즐의 완성된 그림으로 만들어질 때의 재미와 기쁨의 이야기도 함께 나누고 싶다. 무엇보다 원자력발전소와 관련된 특수한 환경의 디자인은 최고의 솔루션보다 최적의 솔루션을 제안해야 하는데, 그것을 구분할 수 있도록 합리적으로 전달하고 설득하지 못한 아쉬움에 관해서도 썼다. 디자인 과정에서의 여러 에피소드를 쓰면서 과거 일들을 되돌아보며 반성의 시간도 갖게 되었다. 그 시간을 함께했던 기억의 순간을 써나갈 때 행복했지만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시작하기 어려웠다.
2부 마지막에는 세계적으로 산업유산 재생의 관점에서 영구 정지되거나 폐쇄된 경북지역 원자력발전소를 지역 문화예술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3부에는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지역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내용을 담았다.
요즘 인구감소로 인한 지역사회의 위기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지역이 가지고 있는 인프라를 최대한 살리면서 연결을 통한 확장이 필요하다. 여러 기의 원전이 있고 한수원 본사도 있는 경북 경주시를 대상으로 풍부한 자연환경과 역사, 문화적 인프라를 최대한 활용한 지역발전 가능성에 대해 몇 가지의 아이디어를 제안한다.
이 책은 디자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지식과 통찰력, 경험들을 담았으나 디자인과 무관한 사람들에게조차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창조적 사고의 방식을 전달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또한, 디자이너가 바라본 원자력에 관한 중립적 시선에 공감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같이 일한 많은 사람과의 협력과 협업이 없었다면 이 책이 나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이 책이 출판되도록 따뜻한 격려와 도움 주신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편집디자인으로 책의 수준을 높여준 제자 한서우와 예리한 지적을 해준 제자들도 있다.
오랜 시간 원자력발전소 일을 할 기회를 준 한수원과 한기 건축의 여러분들에게도 감사함이 크다. 특히, 한기 정훈석 부장님은 가장 오래 일을 같이한 분으로 책의 기획단계부터 여러 가지 상의를 드릴 때마다 긍정적 에너지로 격려해 주셨다. 기초과학연구원 희귀핵연구단 한인식 박사님은 과학적 오류를 바로잡아주시고 사고의 틀을 확장하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한 수많은 제자들과 색채디자인 연구소 연구원들의 열정이 없었다면 결코 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리며 사랑과 감사함을 전한다.
책에 대한 날카로운 지적과 통찰로 새로운 방향의 책이 나오도록 도와주고 곁에서 참고 격려해준 가족들에게는 감사하다는 말 그 이상의 마음이다.
2021년 10월
김연정
--- 「들어가는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