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주 쥐고 부딪쳐 호두를 깨다 보면
거꿀달걀형 핵과끼리도 더 센 놈이 있다
마른 놈과 반질한 놈이 만나면 볼록이가
쭈글한 놈의 주둥이로 옹골찬 놈을 지르면 뾰족이가 이기는데
먼저 깨진 놈의 속살을 우물거리면 패배자의 쇠맛이 난다
호두를 와드득 깨무는 사람은 ‘호두 까는 사람’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의 직계 후손이다
호두를 까먹으려면 아무렴 호두 껍데기를 깨야 한다
나는 불알만 두 쪽이지만 꽝꽝하게 주름진 핵과 따위를 쉬이 다룰 수 있다
초록색 육과 주렁주렁 열린 호두나무 숲을 꿈꾸며 겨우내 호두알을 굴려 본다”
이 시는 한 사내가 긴긴 겨울밤 혼자서 일없이 호두를 까먹는 일을 시화해 놓았다. 자칭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의 직계 후손인 사내는 호두끼리 부딪쳐 깨진 속살을 우물거리며 “패배자의 쇠 맛”이 난다고 말한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맛인지는 알 수 없으나 열패감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화자의 처지를 빗댄 말이겠다. 아무튼 불알 두 쪽뿐인 사내가 겨우내 집안에서 패배자의 쇠 맛을 느끼며 “초록색 육과 주렁주렁 열린 호두나무 숲을 꿈꾸며 겨우내 호두알을 굴린”다는 행위는, 뭔가 그 이면에 묵직한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이 꽝꽝하게 주름진 핵과의 웅크림, 반응 없음, 도무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사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시니피앙이 아니라 실타래 같은 시니피에의 실체는 무엇일까? 읽을수록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시편이 아닐 수 없었다. 아마 이 시집을 펼쳐본 독자들은 적잖이 혼란스러움을 느꼈으리라. 책장마다 예사롭지 않은 슬픔과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언어를 대하며 시인의 감춰진 모습에 놀랐으리라. 대처 시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여기 저간의 사정을 담고 있는 시 한 편이 있다.
눈보라 속을 헤매다 문을 두드리니 소복 입은 처자가 초롱을 앞세우고 맞이하였지. 내리던 눈이 그칠 무렵 나는 장작을 패고 처자는 새 옷을 지어 주었어.
겨우내 말뼈를 우려먹으며 내 자상刺傷은 아물고 처자의 배는 불러갔지. 해토머리 낙숫물 소리 명징한 밤, 가만히 일어나 날 빼문 장검을 마루 밑에 묻어 버렸지.
새봄에는 나비와 부닐었지, 요요한 날갯짓 따라 내 여자는 여윈 손가락을 사뿐 뒤집어 뻗으며 팔랑팔랑 나비를 좃니었어. 나도 쥘부채 말아 쥐고 덩달아 공중제비를 넘곤 했었지.
가을비 그쳐 까막까치 울던 서리 새벽, 날개 부러진 나비들 가을바람에 쓸려갔지. 바람벽에 보타시리를 새겨두고 삼년을 울었지.
나는 지금 풍교楓橋 난간에 기대 검미劍眉를 찌푸리며 칠흑 같은 밤의 물소리를 듣고 있어. 나비의 아랫배를 쓰다듬던 손으로 장차 가로지르는 모든 형체를 벨것인데, 무덤 속 녹슨 거울 속 높은 코 가지런한 이빨 앞에 온전한 희생으로 바치고자.
--- 「별 · 나비 · 검 · 시」 중에서
이 시는 그가 주에서 밝힌 바와 같이, 1976년 중국 무협 영화 《유성호접검》을 바탕으로 엮은 패러디물이다.그의 시에는 전고를 즐겨 차용하는 한시처럼 인용과 패
러디 수법을 동원한 작품이 여럿 있다. 인용 시 부분은 시인이 《유성호접검》을 패러디해서 무협 풍으로 꾸며본 자전적 서사이다. 남녀 두 주인공이 생전의 시인 부부이다. 여자 주인공 소접은 맹성혼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둘 사이에 애틋한 사랑이 싹터 백년가약을 맺는다. 맹성혼은 자신의 장검을 마루 밑에 묻어버리고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다 소접이 먼저 죽는다. 맹성혼은 3년을 울부짖음으로 보내다 마루 밑에 파묻었던 장검을 꺼내 복수의 칼날을 번뜩인다. 죽은 아내를 위해서, 가슴에 묻은 아내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그는 복수의 화신이 된다.
너무 빤한 스토리인가. 이 서사는 원본 텍스트에는 없는, 시인이 지어낸 이야기이다. ‘시=시인의 삶’이라는 도식을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면, 이보다 적절하게
시인의 저간의 인생 편력을 요약할 수 없다. 이 시집은 정확히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사별한 아내를 못 잊어 방황하며, 꿈에서라도 한 번 간절히 만나기를 희
구하며, 외로운 발걸음으로 아내의 흔적을 더듬다가,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를 고대한다. 급기야 자신만의 죽음이 생명 있는 것들의 죽음 일반으로 확대된다. 시인은 아내의 사랑을 내면화하여 보다 차분해진 어조로 그리움을 노래한다. 이 시집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이다. 소월과 만해의 시가 이별한 임,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믿는 임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했다면, 시인은 돌아올수 없는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절절한 목소리로 오하고 있다.
저놈의 타래난초 개울 건너 피었는데 물 불어 여울을 못 건너네 한 줄기 똑 따서 그 이름 가르쳐준 목덜미에 꽂아주고 싶은데 울울한 저 모양 가깝고도 멀리 있네
나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네 목청껏 부르짖어야 했는데 허벅지라도 저며야 했는데 손가락 깨물어 따뜻한 피조차 먹여 보지 못했네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보라 어이 가르 쳐주셨나 붉푸르게 멍든 이름들
여름이 여름하여 독기를 품었네 나도 울지 않고 우는 법을 배웠네 가슴속 만질 수 없는 임은 눈감아야 글썽 보이네
--- 「여름이 여름하면」 중에서
꽃 무더기 들여다보면 어른거리는 것이 있다
처녀귀신이 산다
붉은 꽃술에 입 맞추면
상사로 꽃이 된 처자
그 꽃 입술 여닫으며 더,더,더, 떤다
청천에 날벼락 치고
붉으락푸르락 꽃이 진다
꽃밭에는 비수를 문 처녀귀신이 산다
나는 오래된 꽃나무 구멍 속 부러진 날개로
꽃이파리 더불어 웅크려 있다
--- 「복사꽃」 중에서
오동꽃 핀 산에
뻐꾸기 우네
오동꽃은 보여도
뻐꾸기는 보이지 않는데
오동꽃 흐려져도
뻐꾸기는 우네
오동꽃 우러르면
청산도 새소리도 지워지는데
질끈 눈 감아야 끼치는 향기
환하고 서늘한 오동꽃
--- 「오동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