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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한 듯 씩씩하게

무심한 듯 씩씩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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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300g | 115*187*17mm
ISBN13 9788932474571
ISBN10 8932474575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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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 거의 없는 골목길에 들어가자 눈앞이 단번에 까매졌다. 전화기를 들어 친구에게 전화하는 척을 했다. 수신자는 주로 미래의 나였다.
“네가 그때 그랬잖아. 힘들다고. 그래도 잘돼서 다행이네.”
너무 유치한 멘트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나치는 사람들이 내가 미친 짓을 하는 걸 알아채면 어쩌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입은 멈추어지지 않았다.
“그래. 마흔이 되더니 철이 들었네. 보기 좋다. 이제 헤어진 그 남자랑은 안 만나지? 잘 헤어졌어.”
나와의 통화 속에서 마흔이 된 나는 철이 들었고, 헤어진 남자와는 다시 만나지 않는다고 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거리에는 술에 취한 사람만 지나다녔다. 나는 내일 출근할 것이다. 모레도 출근해서 가게 문을 열자마자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누르고 화장실로 가서 대걸레를 빨 것이다. 집 현관문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으니 딸깍하고 문이 열렸다. 어느 날 그 소리가 지겨워졌다. 딸깍. 딸깍딸깍딸깍. 마흔이 되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 pp.16~17

비가 오던 날, 유달리 냄새가 많이 나는 방에서 생각했다. 남 탓이라도 하자. 이 공간이 모두 곰팡이로 뒤덮이기 전에, 우울증에 빠지기 전에 모든 일을 내 탓으로 돌리는 일은 그만두자. 그렇게 생각하자 예전에 요가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필영 씨, 필영 씨가 여기에 있는 것도, 이걸 하는 것도 모두 필영 씨의 결정이에요.”
개뿔이다. 더 우울해졌다.
--- p.65

많은 것이 순식간에 바뀌어 버렸지만, 딱히 바뀔 것 없는 가벼운 결혼식이 진행됐다. 집 계단을 내려가는 마음으로 결혼식장에서 신부 입장을 했다. 당연히 울지도 않았다. 오래 사귄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더 행복했을까? 그 답은 모르겠다. 다만 나는 마치 어떤 결정이라는 게 어렸을 적 했던 슈퍼마리오 게임처럼, 동전을 따먹을 수 있는 지하의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냥 그곳으로 가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그건 확실하다. 거기에 맞춰서 그때그때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 p.110

내게 벌어진 그 모든 일을 멀리서 바라보는 심정으로 보고 있으면 어딘가 위로가 되었다.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상황은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러니까 세상이 내 소망과는 다르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연애하고 일했다. 직업이 계속해서 바뀌는 와중에도 꾸준히 미소를 지으며 면접을 보았다. 그래야만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었다. 상황이 스스로 힘을 가지고 있든 없든 어쨌든 나도 그래도 움직였다고.
--- p.113

아이를 키우기 전까지는 모든 일은 혼자서 해야 잘하는 거라고 믿었다. 다른 이에게 덜 의지할수록 더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에 부딪히면 내 의지를 탓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연년생 아이 둘을 낳고 나자 내 힘으로만 살 수는 없음을 깨달았다. 아이들은 너무 힘이 넘쳤고, 나는 밤이 되면 소파에 시체처럼 누워 있기 일쑤였다. 둘째를 낳고는 도저히 답이 없어서 수시로 어머님과 엄마를 집으로 불렀고 남편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지원군이 아무도 없는 날이면 오늘처럼 하느님도 찾고 우주님도 찾으면서 3년을 보냈다. 여러 존재에게 도움을 받았다.

예전의 내가 떠오른다. 손을 내밀 바에는 괴로움을 택했던 사람. 그때의 나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괜찮아, 도움 받으면 돼.
없는 건 빌리면 되고. 그러고 나서 갚는 거야.
--- pp.18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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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에는 묘한 구석이 있다. 간단한 묘사로도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물음표를 띄우게 만든다. 그런 물음표를 발견할 때마다, 마치 무심해 보이던 사람에게서 나만 아는 반짝임을 발견했을 때처럼 기뻤다.
- 백세희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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