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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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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24쪽 | 184g | 125*204*8mm
ISBN13 9791158965365
ISBN10 1158965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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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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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가 데크 난간에 붙어 물을 내려다본다
물속으로 구름이 흘러간다
세모난 머리가 햇살을 이고 갸웃거린다
한 아이가 돌을 던지자
놀란 버마제비가 몸이 찢어지며 떨어진다
이건 연못의 일이다

순간, 버마제비의 몸을 찢고 나온
연가시가 물속으로 힘차게 헤엄쳐 간다
발레리나 치마처럼 찢어진 버마제비의 몸은
바람에 흔들리며 물 위를 떠다닌다
이 또한 연못의 일이다

남아 있는 버마제비들의 눈빛이 갸웃거린다
뛰어내려, 뛰어내려
버마제비의 도리질은
연가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다
수면 위에 펼쳐지는 필생의 춤을 바라보며
시선을 거두고 귀를 닫는다
이것은 연못의 일이다

물속에 돌들이 달그락, 달그락
노란 어리연꽃이 구름을 타고 흘러간다
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또한 연못의 일이다
--- 「연못의 일」 중에서


눈송이를 털며 자리에 앉자
한 남자가 외투를 펄럭이며 창가 쪽에 앉는다
기차는 눈송이에 부딪치며 달리고
남자는 뭉툭한 손으로 그림을 펼쳐든다
눈송이를 따라가던 눈이
정물과 밀도의 깊이를 곁눈질한다

구름이 반쯤 열린 문 사이를 흘러간다
열리는 중인지 닫히는 순간인지
문과 벽이 벌어져 있다

그림 속에는 개미만 한 나무들이 있고
새가 날개를 펼친 채 정지되어 있다
초록 사과는 누군가의 머리에서 나와 허공에 떠 있고
허공에 떠 있는 바위의 무게를
종이 한 장이 받치고 있다

남자는 그림을 말아 쥐고 묵호역에서 내린다
르네는 눈송이 사이로 사라지고 빈자리만 남는다

눈송이마다 한 여자가 태어나고 죽는다
바위 하나가 눈송이에 덮일 때
여자는 돌처럼 일어선다

기차역에선 누군가는 내리고 누군가는 탄다
눈송이는 계속 달리고
--- 「눈이 내려서」 중에서


뱀은 처음 운 개구리 울음을 기억한다고 한다

개구리가 첫울음 운다 개굴
개구리가 두 번째 운다 개굴 개굴
개구리가 개굴 개굴 개굴 운다
개구리가 개굴개굴개굴개굴개굴개굴
삼태산에서 삼태산만 한 소리로 운다
삼태산만 한 덩어리가 되어 운다

뱀은 처음 운 개구리 울음만을 기억하고
뱀은 처음 운 개구리를 찾아다닌다
뱀은 처음 운 개구리를 통째로 삼킨다
뱀은 처음 운 개구리에 감사한다
뱀은 두 번째 세 번째 운 개구리를 먹지 않는다

새벽 4시
처음 운 개구리는 울음으로 죽음을 부르고
다른 개구리들은 삼태산이 떠나가라 운다

그리고 새매가 뱀을 낚아채 날아갔다
새매는 닥치는 대로 먹는다
--- 「죽음을 부르는 노래」 중에서


호리꽃등애가 꽃 주변을 서성인다
날개가 보이지 않고
몸만 떠 있다

퉁퉁
벙어리 뻐꾹새가 낮게 운다
꽃등애와 바람과 꽃잎 사이로
애벌레 한 마리가 줄을 타고 내려온다

달팽이가 댕댕이 잎에
죽은 듯 몸을 움츠린다
꽃향기에 달팽이 더듬이가 덮인다

왜가리 한 마리가
저수지 수면을 찢고 갈지자로 날아오른다
산허리를 지나
구름 속으로 빠르게 숨는다

꽃과 밥 사이에
슬며시 발을 집어넣는
저녁노을
--- 「꽃과 밥 사이」 중에서


거울이 무섭다
내가 거울을 두려워했었나
거울 볼 시간도 없이 날짜들이 지나간다
그 무수한 나를 거울은 기억하고 있을까
열 살의 안나 스무 살의 순영이 서른 살의 누구 엄마
아픈 허리를 끌고 내가 거울 속으로 지나간다
그 무수한 나, 들은 다 어디에 있을까

거울 놀이를 한다
거울마다 무언가 오버랩 된다
한쪽 눈을 찡긋하는 내가
입을 크게 벌려 웃는 내가
입속이 캄캄한 내가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지나간다

거울 속에서
사라진 나, 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올 것 같다
낯익은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 「고해」 중에서


나를 온전하게 기억하는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기억하는 척하던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가르쳤다고 큰소리치던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일으켜 세운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나의 반쪽을 뽑아간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한쪽으로 기울게 하던 아버지

나의 온전한 순종을
사랑하던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모르던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팽개치고 간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잘라낸 반쪽의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남겨두고 간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슬프게 한 아버지
나를 온전하게 미치게 한 아버지
― 「나의 온전한 순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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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복은 축복받은 시인이다. 그녀는 사물에 언어의 옷을 입히기도 전에 이미 그것의 속내와 생생하게 내통하고 있는 감성의 소유자이다. 그녀의 시들을 읽다 보면, 모든 것이 새로움과 신비와 공포로 가득 차 있던 유년의 감성이 저절로 소환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온갖 실험을 이미 다 거쳐 온 이 시대에, 작가나 독자들의 감성이 갈수록 닳고 닳아 노회해지고 있는 이즈음에, 이현복 시인은 정반대의 길로 치고 나간다. 그녀는 장식과 해석을 최대한 배제함으로써, 세계를 경험되거나 훼손되지 않은 최초의 장면처럼 제시한다.
- 오민석 (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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