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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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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1월 23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8*205*20mm
ISBN13 9788966551446
ISBN10 8966551440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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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가 움푹하다
하늘을 닮았다

서쪽 끝에서 시작된 걸음마는
고단한 보행을 지나
지금은 천기를 읽을 나이

으르렁대는 천둥 뚫고
각질 더덕한 걸음으로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중이다

시끌벅적 물장구치는 아이들
돌부리에 차이며 졸졸대는 시냇물
물 등에 얹힌 시간의 주름들

돌이켜보니 아버지는 언제나
맨발이었다
몸을 지탱하며 앞만 보던 엄지발가락이
한풀 꺾여 하늘 향해 있다

--- 「발바닥의 생」 중에서


이제 그만 놓아주세요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태엽을 감던
아버지 떠나신 후로
멈춰버린 시계

감아도 더디 가는 녹슨 태엽처럼
아버지 모습도 흐릿하다

이제는 녹슨 시간을 지나
남은 시간을 살아내야 할 때
시계를 바꿔 달았다
밤에도 잘 보이는 전자시계다

시계 뒤로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벽시계 떼어낸 자리
하얗게 멈춰 있다

네모반듯 관짝 같다

--- 「벽시계」 중에서


장수원 치매 노인들과 전통 놀이 한다

영도 할아버지는 복자 할머니 뒤만 따라다닌다
할아버지는 간식을 받으면 주머니에 숨겼다가
몰래 복자 할머니 손에 쥐여준다
연애편지나 휘파람 따윈 잊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는 몸이 기억한다

장수원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몰던 내 손에
할머니가 내리시며 무엇인가를 쥐여준다
간식 시간에 나눠준 사탕이다

이후로 영도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아
복지사에게 물었더니,
할머니가 내게 사탕 주시는 걸 보셨단다
그 사탕이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주신 거였단다
그날 이후로 영도 할아버지는
말씀도 줄고 할머니를 피해 다닌다고 한다

복자 할머니에게 편지를 썼다
복자 씨, 내 사랑은 사탕 하나로는 택도 없어요
요즘 밥 먹자는 할머니가 있어요
사탕보다 밥이 좋은 절 용서하세요

--- 「삼각관계」 중에서


가족처럼 잘 지내보자
열심히 일하면 분점도 내줄게
어부의 손은 장밋빛이다

동해에서 서해에서
꿈꾸는 생선들이 모여드는 어시장
수족관은 푸른 꿈으로 넘실대는
마지막 바다다

몇 푼의 지폐와 꿈이 거래되고
검은 예복 입고 도시로 간다
파도 소리 대신 끓는 물소리 들으며
도마에 올라 돌아보는 바다
자장가 한 소절 아련히 뒤척인다

섣불리 도시를 꿈꾼 죄
요동치는 냄비 속으로 바다를 게워낸다
--- 「도시로 간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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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인들은 새로운 문장을 기다린다. 한 소식 얻는 일이 필생의 바람이다. 그러나 이현조 시인은 오래전에 도착한 문장을 발굴한다. 새로이 흙을 빚는 게 아니라, 주꾸미가 웅크리고 있는 바닷속 청자를 꺼내어 펄흙을 벗겨낸다. 수만 년 전부터 떨어져 내린 벚꽃 잎에서 집 나간 딸의 편지를 읽는다. 죽은 이의 흰 옷자락을 불러내어 허공에 춤사위를 풀어놓는다. 꽃잎 하나 지는 일이 곧 사람의 일이다. 그의 시는 떠난 자들을 다시 불러내는 제문이다. 최초의 시간과 공간을 빚는 게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우리네 삶의 살강이나 마루 밑에서 동행해온 질그릇을 찾아내어 밥상을 차리는 일이다. 그의 시에는 눈을 비비고 다시 떴을 때, 깜짝 현기증이 이는 오래된 풍경과 눈꺼풀의 떨림이 있다. 잿물로 닦은 놋그릇, 거기에 비친 노을의 초경이 있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살겠다고 헛소리 쳤던, 수컷 곰의 첫날밤이 있다.
- 이정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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