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일부터 7일까지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2018 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에 참가했다. 한반도 평화에 관한 글을 발표하기 위해서였다. 전체 회의 주제는 통합(inclusion), 사랑(love), 이해(understanding), 화해(reconciliation), 변화(change) 등이었다.
수천 명의 종교인과 종교 학자들이 모인 토론토 컨벤션센터 복도에 대형 게시판들이 걸려 있었다. 각 종교의 가장 큰 특징을 홍보했다. 그 가운데 ‘평화’와 ‘비폭력’을 강조하지 않는 종교는 없었다. 종교 전체를 홍보하는 첫 번째 게시판엔 폭력은 남들과의 차이를 조정하거나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는 문구가 담겨 있었다. 살생하지 말고 생명을 존중하라는 글귀도 있었다.
유대교 게시판은 살생 금지를 포함한 모세의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평화를 추구하고 따르라는 「시편」 34장 14절 등을 앞세웠다.
기독교 게시판은 예수의 ‘산상설교’ 가운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축복받을 것이라는 「마태복음」 5장 9절,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치게 하고 저고리를 원하면 외투도 주라는 「마태복음」 5장 40절,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마태복음」 5장 44절 등을 내세웠다. 이슬람 게시판은 신의 이름으로 자비와 동정을 강조하는 경전 『코란』 및 ‘회교도 의무사항(The Muslim Code of Duties)’을 내걸었다.
불교 게시판은 맨 앞에 생물의 살생을 금지하는 ‘불교 5계(五戒, The Five Precepts of Buddhism)’들 강조했다. 남을 해치지 않으려는 등 바른 의지를 갖고, 거친 말을 삼가는 등 바른말을 하며, 생물을 살생하지 않는 등 바른 행동을 하라는 지침을 포함한 ‘8정도(八正道, The Eightfold Path)’도 포함했다. 힌두교 게시판은 ‘요가의 길(The Yoga Way)’ 첫 번째 덕목으로 비폭력(a-himsa)을 강조했다.
--- p.17~18
여성은 인구의 절반이다. 절반의 인구가 상습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있다. 개인의 능력이나 자질에 관계없이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당하고 있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이에 따른 사회적 불평등은 동서고금을 통해 나타난 현상이다. 절반의 인구가 차별을 당하는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는 사회의 발전과 평화를 불러오기 어렵다.
종교는 대체로 인간 평등의 사상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오래전부터 남녀 불평등의 교리와 성차별주의적 제도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일반적으로 신도들은 남성보다 여성이 많지만, 신도들에게 직접 ‘말씀’을 전달하며 인도하는 교역자는 대부분 남성이다.
기독교에서는 『성서』의 하나님을 남성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남편 아담에게 아내 하와가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여성은 온전한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사람 숫자를 셀 때 제외되기도 했다. 당연히 제사장이 될 수 없었고, 성전 활동에 제한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대개 족보 계승은 남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도 여성에게는 성직을 제한하며 보조적 또는 이차적 역할만 맡게 하는 등 교회를 가부장적 체제와 질서로 운영하고 있다.
이슬람교의 경전 『꾸란 (Quran/Koran)』은 3장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동등하다고 했지만, 4장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골적으로 여성을 차별하고 있다. “남성은 여성의 보호자라 이는 하나님께서 여성들보다 강한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 남성은 여성을 그들의 모든 수단으로써 부양하나니 건전한 여성은 헌신적으로 남성을 따를 것이며 남성 부재 시 남편의 명예와 자신의 순결을 보호할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고 품행이 단정치 못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에게는 먼저 충고를 하고 그다음으로는 잠자리를 같이하지 말 것이며 셋째로는 때려 줄 것이라.”
불교에서는 여성이 부처가 될 수 없다거나 성불하더라도 남성의 몸으로 변해 부처가 된다는 사상을 확산시킨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에서는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이나 다름없었지만, 석가모니 붓다는 제한적으로나마 여성의 출가와 수행을 허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이가 적은 비구(남자)에게도 비구니(여자)가 먼저 예를 올려야 한다든지 무슨 이유로든 비구를 비판하지 말라는 등의 출가 여성에 대한 계율을 일컫는 팔경법(八敬法) 또는 팔불가월법(八不可越法)으로 여성을 차별해 왔다.
한국 4대 종교에 속하는 원불교는 남녀평등 문제와 관련해 매우 주목할 만하다. 교리에서 평등과 화합을 중시하며, 삼종지도(三從之道)에 따른 남녀차별을 불합리하다고 명시하고 있다.
--- p.21~23
이재봉: 대개 목사 하면 교회와 목회가 떠오르는데, 목사님은 지금까지 목회보다 시민운동에 더 힘써 오신 것 같습니다. 무슨 이유인가요?
김영주: 일반적으로 목회는 목사의 전반적인 활동을 말합니다.목회를 분야별로 구분하면 개체 교회,교단과 연합 기구,시민 사회 단체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신학적인 관점으로 구분하면 개인 구원을 통한 사회 구원과 사회 구원을 통한 개인 구원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 관점을 현재의 저에게 적용하면 분야별로는 개체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가 아니라 교회와 사회를 목회의 영역으로 삼고 일하고 있으며, 신학적으로 보면 사회 구원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지요. 물론 저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을 동시적 과제로 보고 있어 어느 하나 등한히 할 수 없는 과제라는 생각을 가지고 목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서 질문하신 말에 적절한 대답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제가 시민운동에 더 힘쓰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제 활동 영역이 개체 교회 영역에 있지 않고, 주로 연합 기구에서 일하다 보니 사회 구원을 위한 활동이 사람들에게 노출된 결과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에게 시민 사회 영역에서 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었으며, 저 또한 그 일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민 사회 활동 역시 목회 활동의 한 영역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신분과 활동 영역에 전혀 갈등이 없습니다. 단지 항상 생각하는데, 늘 부족해서 부끄럽습니다.
이재봉: 제가 처음부터 무식한 질문을 드렸군요. 시민운동은 목회에 포함되는 게 아니라 별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신학 박사가 아니라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것도 왜 그랬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목사가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으신 특별한 계기나 이유는?
김영주: 앞의 질문과 연관성이 있지요. 목사의 목회 활동을 굳이 구분하자면 전통적인 의미에서 제사장적 직분과 예언자적 직분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p.37~38
* 지난주까지의 대담은 화상으로 진행했는데 이 대담은 남원 실상사에서 대면으로 이루어졌다. 상대적으로 긴 시간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재봉: 실상사를 직접 찾아와보니 좀 특이한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절은 깊은 산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실상사는 평지에 있잖아요. 먼저 실상사 소개부터 해주시겠습니까?
도법: 실상사는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절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지요. 경전에는 ‘사찰의 위치를 마을에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자리 잡는 것이 좋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세속과 너무 가까이 있으면 세속에 휘말려 출가 수행자들이 자기 삶을 가꾸기에 어려움이 많기 때문이고, 너무 멀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찾아와 법을 배우고 수행을 하는 것이 어려우면 안 되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불교 역사가 전개된 이래 시대마다 지역마다 다양한 변천이 일어납니다. 기본적으로 대중과 함께 할 수 있도록 도시에 자리 잡은 사찰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자취가 끊긴 깊고 높고 청정하고 고요한 곳에서 수행을 해야 된다는 신앙심에 따라 산악에 자리 잡은 절도 있습니다. 그런데 역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도시에 있는 사찰은 세상 풍파에 휩쓸려 많이 사라진 반면, 산악에 자리 잡은 절은 많이 남아있게 된 셈이죠. 사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절은 세상과 떨어진 깊은 산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산악에 있는 사찰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것은 산악신앙과 사회적 상황이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중국에서 탄생한 선종 불교는 무위자연의 노장 철학과 만나면서 완전히 중국화한 불교의 대표적인 예인데, 그런 관계로 산악에 자리 잡는 것을 선호하고 오래 유지되도록 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마음이 모아진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실상사는 얼핏 보기에 평지 사찰입니다. 하지만 잘 보십시오. 지리산 자락에 골짜기도 넓습니다. 넓은 골짜기 한복판에 위치하기 때문에 바깥에서 보면 평지 사찰, 들판절로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사 마당에서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실상사를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봉우리들은 대략 해발 1천m 이상입니다. 높은 봉우리들이 거대한 연꽃송이를 이루고 있고, 그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대단히 깊은 산중절입니다. 그러므로 바깥에서 보면 들판절, 안에서 보면 산속절이죠. 풍수학상으로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물 위에 떠있는 연꽃과 같은 모양의 터라는 의미입니다.
이재봉: 스님께서는 이 절에서만 30년 정도 계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회주 스님이란 직함이 좀 생소합니다.
도법: 공적인 종단 체계에서 사찰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소임은 주지입니다. 회주라는 소임은 전통적으로는 없었습니다. 이 직함이 만들어진 것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냐면 위인설관(爲人設官), 즉 사람을 위해 만든 자리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요새 현상으로 보면 공식적으로는 은퇴한 사람인데, 어떻게든 예우를 해야 해서 권한은 없지만, 상징적으로는 어른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셈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가진 풍부한 경험을 잘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는 의도도 담긴 문제의식의 결과물이죠.
--- p.8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