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거리는 뜨거웠다. 민주화의 함성이 거리의 아스팔트와 상아탑을 달구었다. 대학가 곳곳에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고, 급기야 화이트칼라까지 나서 넥타이를 풀어 던진 채 민주화 시위에 동참했다. 군부독재는 항복선언을 통해 시위의 종지부를 끊으려 애썼다. 이듬해 대한민국은 서울올림픽을 열고 한층 성숙한 나라로 거듭나는 듯했다.
--- p.14
“큰일 났습니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습니다.”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급했다. 응급실로 빨리 올라와 달라는 요구였다.
모두가 믿기지 않았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신흥 부의 상징이었던 강남의 명품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는 것을 믿을 사람은 없었다.
--- p.30
지훈상이 외과 전문의이자 응급실장을 하고 있었던 1980년대 후반이었다. 트럭이 길을 건너던 여고생을 그대로 밀고 들어갔다. 이 여학생은 골반골절을 비롯한 복강 내 장기들이 파열된 다발성 손상 환자로 출혈성 쇼크로 인해 의식이 없었다. 보호자는 인근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죽는다는 말만 듣고 돌아왔다. 살 가능성이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호자들은 딸을 강남세브란스병원으로 데려갔다.
--- p.56
심전도 모니터에는 가끔 ‘삐익’ 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심장이 잘 움직이지 않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이가 들면 죽는 이유가 자연스럽지만, 젊은 사람은 분명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이동필은 레지던트에게 물었다.
“병력이 어떠냐?”
--- pp.72~73
당시 병원들의 응급의료 상황은 열악했다. 환자를 실어나르는 수단은 운송기능만 있는 단순 구급차가 전부였다. 구급차에는 의료조치를 할 수 있는 시설은커녕 약도 구비되어있지 않았다. 단지 환자만 이송할 뿐이었다. 응급환자가 발생했을 때 신속하게 실어나르는 것이 전부였다.
--- p. 83
1993년 겨울, 서울에 몰아친 강추위로 한강 물은 꽁꽁 얼어붙었고 날씨는 차가웠다. 하지만 강추위에도 서울 용산구 이촌동 대한의학회 건물에서 열린 의학회 임원회의의 열기는 뜨거웠다. 응급의학을 전문과목으로 인정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 p. 100
‘탕, 탕, 탕, 탕!’
1993년 4월 19일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대낮에 총소리가 간헐적으로 울려 퍼졌다. 영문도 모르는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상황을 주시했고, TV 뉴스에서는 긴급속보가 흘러나왔다.
--- p. 116
다음 날 박재황은 유인술에게 물었다.
“어제 무슨 일 있었냐? 왜 사라졌어?”
“응급의학과에서 죽도록 고생해도 누가 알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누가 알아줘서 일하냐? 제대로 하려고 하면 여기 붙어있고, 아니면 너 알아서 해!”
--- pp. 137~138
주삿바늘 자국으로 인한 궤양이 흑인의 피부를 난도질하고 있었고, 한눈에 봐도 마약을 상습적으로 했던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얼마나 주사를 많이 맞았으면 정맥주사를 놓을 자리조차 없을까? 고영관은 이해할 수 없었다.
--- p. 147
김승호는 제자들을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는 1997년부터 전문의 훈련을 마친 제자들에게 손수 제작한 ‘김의 컬렉션(Kim’s Collection)’이라는 작은 소책자를 주었다.
--- p. 172
정제명은 농부의 복부를 재빠르게 십자 모양으로 갈랐다. 배를 가르자 쌓여 있는 피와 뒤섞인 끈끈한 액체가 콸콸 흘러내렸다. 마취도 하지 않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의식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선홍색 핏빛은 하얀 시트를 순식간에 붉게 물들였고, 이내 정제명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 p. 181
이길여는 이근에게 물었다.
“그래? 응급실을 활성화해 대한민국에서 1등 할 자신 있어?”
“네! 자신 있습니다.”
“내가 미국에 가서 보니까 응급의학이 인기가 많더라. 미국은 응급진료를 잘하던데. 1등 할 자신 없으면 아예 시작도 하지 마!”
--- pp. 204~205
복벽의 안쪽 내벽과 복부 장기 사이의 공간에 피가 쌓여 복부 통증과 저혈압 등 다양한 증상이 생기고 있었고, 대규모의 출혈이 일어나면 지혈이 쉽지 않아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간이 손상된 것 같았고, 쇼크 상태가 이어졌다.
--- p. 222
잘려져 나간 여아의 다리는 피를 계속 내뿜었다. 여아는 의식이 없었고, 맥박도 겨우 만져졌으며, 혈압은 측정되지도 않았다. 응급실장이자 외과전문의인 임경수 교수는 피를 막는 것이 급선무였다. 혈관을 먼저 묶은 뒤 나머지 응급조치나 다른 부위도 검사할 생각이었다.
--- p. 238
1995년 경기도 한 건설현장 공사장에서 일하던 인부가 추락하면서 현장에 있던 철근이 그대로 이 사람의 오른쪽 옆구리에 들이박혔다. 성인 남자 손가락 한 개 정도의 두께와 사람 키 정도 되는 길이의 철근이 인부의 오른쪽 옆구리부터 몸 한가운데를 지나 왼쪽 얼굴까지 관통했다.
--- p. 262
전신이 아닌 머리만 선택적으로 택해 저체온 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방법을 고민하던 중 민용일은 전공의들에게 주문했다.
“키스모 비닐 4~5개를 준비해!”
전공의들은 키스모 비닐이 무엇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 p. 291
백광제의 진단은 들어맞았다. 심장은 찢어져 있었고 그 속에서 피가 내뿜어졌다. 그는 찢어진 심장 부위를 재빨리 손으로 틀어막았다. 한 손으로는 손바닥으로 심장을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심장을 쥐어짜는 마사지를 했다.
--- pp. 300~301
당시 응급실의 상황은 열악했다. 각 과에서 인턴들이 보고 난 뒤 후속 진료를 하는 곳이 응급실이었다. 응급환자 진료 경험이 적은 인턴이 진료를 하다 보니 환자 상태를 판단해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지 결정도 늦어졌다. 의료진은 환자들의 응급상황을 보고 응급처치를 신속하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우선 해야 할 일이었다.
--- p. 320
도병수는 순간적으로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이 환자를 옮긴 구급대원들에게 곧바로 호통치듯 말했다.
“아니, 이렇게 화상이 심한 환자를 응급실에 데려오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분은 이미 돌아가셨는데…… 임시영안실로 모셨어야죠…….”
--- p. 347
11번째 심장마비 환자가 구급차로 긴급 후송됐다. 이번에도 마지못해 심폐소생술을 해나갔을 무렵 안무업은 깜짝 놀랐다. 20~30분을 했을 때 멈췄던 심장이 갑자기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어어~ 시체인데 심장이 뛰다니!’
--- p. 357
잠시 후, 공군의 유도를 받으며 한 대의 환자 이송 전용기(에어 앰뷸런스)가 사뿐히 서울공항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그 안에는 아덴만 여명 작전 때 해적의 총탄을 그대로 복부에 맞은 석해균 선장과 직접 오만으로 날아가 석 선장을 한국으로 이송하고 수술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가 타고 있었다.
--- p. 374
응급실에 전문의는 없고 인턴들만 있다 보니 발생한 현상이었다. 인턴들은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줄도 몰랐고 환자가 오는 걸 귀찮게 여긴 것이다. 전원을 많이 해야만 능력이 있는 것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 전원이 횡횡하고 있었다.
--- p. 399
최세민은 곧바로 박규남에게 전화했다.
“교수님! 환자가 움직여요”
“아니 무슨 소리야?”
“박지영 환자가 움직여요!”
“어, 그래? 알았다. 곧 가마.”
--- pp. 417~418
2012년 12월 2일 낮 12시 10분경 강원도 홍천군 두촌면 국도 44호선에서 카니발 승용차가 도로 우측 과속카메라 기둥을 들이받았다. 승용차 안에 타고 있던 박근혜 대통령 후보 보좌관이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겼지만, 보좌관은 사망했다.
--- p. 449
1993년 봄 어느 날 오후, 전남 지역 한 병원 응급실에 119구급대가 갓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를 스트레처카로 급하게 밀며 우르르 달려왔다. 아이는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교통사고로 얼굴이 함몰됐고 갈비뼈가 으깨어졌다.
--- p. 4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