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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풍해장국

미풍해장국

솔시선-33이동
오성일 | | 2021년 12월 15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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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5일
쪽수, 무게, 크기 116쪽 | 178g | 124*210*8mm
ISBN13 9791160201680
ISBN10 1160201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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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시적 대상들은 대부분 산책을 하다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거나 사물들이고, 그는 이러한 대상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자신의 사유의 보폭 안으로 끌어들여서 선명한 언어의 발자국을 찍어낸다. […] 그가 산책을 하면서 생각하고 생각을 하면서 마주하는 대상들은 어딘가 소외되어 있거나 그늘져 있어서 시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것들이다. 그의 시에는 “꾸고 싶지 않은 꿈이 자주 찾아오는 새벽”(「겨울 저녁의노래」)이 도처에 존재하지만, 그는 어긋났을지도 모르는 자신의 신념이나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 해설 「두 개의 거울 속을 걷는 열린 산책자의 시학」 중에서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겠습니다 고요히 나에게만 묻겠습니다 하늘의 별빛에도 마음 흔들릴 수 있으니 우러르지 않겠습니다 눈 감겠습니다 도처에서 나를 노리는 파행과 봉착, 눈을 뜨면 꿈꾸지 않은 길 위에 서 있을 수도 있으나 가장 위독했던 순간의 기억으로 길을 되물어 가겠습니다 이 외로움이 나의 방향 감각입니다
--- 「밤에 쓴 말」 중에서


사무실 앞 미풍해장국이 문을 닫았습니다
그제 밤부터 불이 꺼져 있더니
오늘 낮까지 문이 잠겨 있습니다
문 닫힌 한낮의 식당 안을 들여다보는 건
왠지 섭섭하고 걱정이 드는 일입니다
해장국의 뜨뜻하고 뿌연 김이 가라앉은 식당에선
유리문 사이로 서러운 비린내 같은 게 새 나옵니다
옆 건물 콜센터의 상담원 처녀들이
늦은 밤 소주 댓 병과 함께 뱉어낸
고객님들의 악다구니와 욕지거리들도
식당 바닥 찬물 위에 굳은 기름으로 떠 있습니다
의자와 정수기와 도마와 탁자와 계산대는 다들
앞길이 막막하다는 표정으로
그늘 속에 반쯤 얼굴을 묻고 있습니다
나는 젊은 주인 내외가 무슨 상이라도 당했으려니
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너무 슬픈 나머지
쪽지 하나 붙이고 가는 일 깜빡했으려니 짐작하면서
하루 이틀 더 기다려보자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초여름인데 벌써 공기가 후줄근합니다
미풍이 좀 불었으면 좋겠습니다
콜센터 아가씨들에게도 해장국집 착한 부부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바람이 좀…….
--- 「미풍해장국」 중에서


2016년 추석 연휴 끝 남쪽 지방에 큰비가 왔다
― 자녀들이 추석 쇠고 떠난 시골집엔 빗물이 방문 앞까지 들이닥쳐 겨울을 날 연탄까지 쓸어갔습니다
KBS 기자의 물난리 소식에 어딘가 기사 같지 않은 아린 맛이 있어 ‘겨울을 날 연탄’, 이 대목에서 마음은 한번 삐끗했는데,

이어지는 전봉덕 할머니(전남 담양군, 78세)의 인터뷰는 이랬다
― 하도 비 오는 소리가 짜락짜락 나. 그래서 인자 요리 와서 문을 열어보니께 넘실넘실혀 그냥. 죽겄어 깐딱하면…….

세상은 아직 황톳빛 난리가 그치지 않았는데, 나는 참 철이 없게도
남도 여자의 육자배기 대목이나 얻어들은 듯 짜락짜락 빗소리가 하도 넘실넘실 가슴 문턱을 넘쳐 들어와 깐딱하면 이쁜 시 한 줄을 토할 뻔했다
--- 「전봉덕 할머니의 인터뷰」 중에서


스물 두엇쯤 됐을까
그는 말을 제대로 꺼내지도 잇지도 못했다
자동차 보험 만기가 가까워 안내드렸다,
우리 보험으로 옮기면 뭘 더 챙겨드릴 수 있다, 대충 그러한 얘기
아주 무심하고 차갑게 대꾸하는 나에게
끈질기게 뭘 더 물어보지도 않고
고객님 그래도, 하고 매달리지도 않고
그냥 숨죽이듯 전화를 끊었다
그의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와 나의 메마른 대답으로
쉽게 끝난 전화가 하루 종일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분명 저 일을 오래 못 할 것 같은 청년을 생각하고
사는 일의 위태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목소리를 떨며 하루를 사는 그를 뿌리치고
보험 재계약 사은품으로 나는
삼만 원짜리 주유권을 받았다
--- 「숨을 죽이고」 중에서


나는 남에게 걱정을 끼치는 게 싫어서 걱정이 많다 나를 걱정시키는 사람이 있어 잠 못 드는 밤이 있으나, 또 그런 나의 불면을 걱정하는 오랜 사람이 있어 나는 걱정이 많다 그래, 걱정은 몰래 하는 일이 되었다 주머니 속의 걱정을 만지작거리는 습관, 먼 데를 바라보며 그러는 습성이 병처럼 깊었다 지치도록 봄날도 깊었다 해 저무는 마음의 골짜기로 저녁바람이 분다 바람의 뒤편에는 발끝 저린 노을, 걱정
말라고 발등을 쓸며 어둠이 온다 잠시 무심하고 적막하고 따스하다 그 사이를 바람이 불고 또 걱정이 보챈다 너무 오래 집을 비웠다 해찰이 길었다 걱정을 데리고 집으로 갈 시간이다 오늘 밤도 나는 나 혼자가 아니어서 밤이 더디게, 지날 것이다
--- 「우화憂話」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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