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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처럼 승부하라

태종처럼 승부하라

: 권력의 화신에서 공론정치가로

군주 평전 시리즈-01이동
리뷰 총점7.9 리뷰 7건 | 판매지수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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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580쪽 | 832g | 152*224*35mm
ISBN13 9791156122067
ISBN10 1156122066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프롤로그
태종 연보

1부 권력을 쟁취하다[잠저기: 1367~1400]

1장 변방 무장의 아들로 태어나다
근거지는 함경도│무장 이성계의 화려한 등장│아버지가 바란 문사의 길
2장 혁명가 이방원
새 왕조 개창의 변곡점, 위화도 회군│혁명의 시간을 맞이하다│세 명의 사상가에게 묻다
3장 시련의 시간
건국 이후의 반전│명분도 놓치고 세도 꺾이고
4장 무인정변의 지침서, 『한비자』
또다시 폭력│정도전 대 이방원│『한비자』의 흔적

2부 야누의 정치를 구사하다[집권 전반기: 1401~1410]

5장 정변이 초래한 이중구조
한비자적 상황 관리│태종의 이데올로그, 권근│유교적 군주의 길
6장 유교국가의 기틀을 만들다
하륜, 권력을 향한 정치적 여정│조선왕조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다│유교적 정치 운영의 제도적 기반
7장 한비자의 술치를 구사하다
한비자의 양권의 정치술│사돈 이거이, 첫 번째 가지치기│처남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처단하다
8장 중화공동체 전략을 추진하다
정도전, 국가 전략을 세우다│태종, 정도전 노선을 계승하다│소중화의 위상을 확보하다

3부 유교적 군주로 거듭나다[집권 후반기: 1410~1418]

9장 수성의 시대를 열다
소멸된 정변 구조│유신의 교화를 선언하다│이색 비명 사건이 터지다
10장 성군을 꿈꾸다
태평성대가 도래하다│태종이 변하다│성군의 모습으로
11장 공론정치를 실행하다
공론정치란 무엇인가?│다시 시행되는 저화법│노비 문제를 종결짓다, 노비중분법
12장 술치의 잔재, 아픈 상처들
‘일탈’하는 양녕│이양우, 사지에서 살아나다│민무회·민무휼, 불충에 빠지다

4부 권위를 창출하다[상왕기: 1418~1422]

13장 세자를 교체하고 전위하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파국으로 향하다│왕위를 승계하다
14장 상왕정치 체제를 구축하다
병권은 내가 가진다│상왕정치의 장치들│나이 어린 세종을 훈육하다
15장 소중화 조선, 대마도를 정벌하다
정벌의 목적은 무엇일까?│조선의 국가 전략과 대 일본 정책│소중화 질서를 구축하다
16장 정치적 영광을 실현하다
권력정치의 유산을 정리하다│태상왕의 존호를 받다│수문태평의 시대를 열다

에필로그
저자 후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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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방원은 1367년(공민왕 16) 이성계의 본거지인 동북면 함주 귀주동(함흥시)에서 태어났다.
--- p.32

1382년 16세에 진사과에 급제했다. 한 마을에 사는 길재와 함께 성균관에서 수학해, 이듬해 문과에서 7등으로 급제한다. 같은 동기의 급제자보다 매우 이른 나이였다.
--- p.36

진사시에 합격한 1382년에 16세 이방원은 결혼했다. 그의 처가 민제의 민씨 일족은 대체로 문반직을 역임해 문반 사대부 가문으로 위상을 점하고 있었다. …… 민씨 부인은 장인과 처남인 민씨 형제들을 이방원의 정치적 후원세력으로 만드는 데 가교 역할을 했으며, 그들은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p.37

회군 당시 전리정랑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22세의 이방원은 개경에 남아있었다. …… 아버지가 위화도에서 회군을 단행해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그는 퇴궐하면서 집으로 가지 않고 곧바로 포천을 향해 말을 달렸다. 그때 친모 한씨는 경기도 포천 재벽동의 한 농장에 있었고 계모 강씨는 같은 포천의 철현에 있는 농장에서 지내고 있었다. …… 이방원은 두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이끌고 이씨 집안의 오랜 군사적 근거지가 있는 동북면의 함흥 쪽을 향해 출발했다.
--- p.44

1392년 3월 17일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명나라 황제를 만나고 귀국하는 세자를 황주에서 맞이한 뒤 해주로 가서 사냥을 하던 중이었다. …… 정몽주는 간관 김진양 등을 불러 이성계 무리들을 탄핵할 것을 사주했다. ……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친모의 상중에 있던 이방원은 4월 2일 이성계를 찾아가 설득해 함께 개경으로 돌아왔다. ……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여야 한다고 이성계에게 청했다.
--- p.50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서라도 정몽주를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결심한 이방원은 …… 4월 4일 이방원은 심복인 조영규, 조영무, 고여, 이부 등 45명을 보내 선죽교를 건너던 정몽주를 철퇴로 쳐서 무참하게 살해했다.
--- p.51

정몽주를 격살한 이방원은 신속하게 조준, 남은 등 유배에 처해진 이성계파 인물들을 불러들이도록 조치했고, 공양왕을 압박해 정몽주를 따르는 인물들을 조정에서 몰아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7월 17일 마침내 이방원이 주도해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했다.
--- p.53

이방원의 정몽주 살해에는 과격한 폭력적 방법이 구사되었지만 공공선의 관점에서 용인될 만한 여지가 있다. 이방원은 새로운 왕조의 설립이라는 시대의 요구(네체시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방원은 도덕적 비난을 무릅쓰더라도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망해가는 고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이다.
--- p.61

왕자들에 대한 봉군 조치가 취해진 다음 날인 8월 8일 이방원을 동북면으로 보내 이성계의 4대 선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묘지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묘지 이름을 짓게 했다. 물론 동북면 절제사에게 맡겨진 당연한 임무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상황은 이방원이 바라는 방향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 p.68

8월 20일 공신 배극렴·조준·정도전이 세자를 세울 것을 청하면서, 나이와 공적을 기준으로 정하기를 주장했다.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면 장자가 우선 대상이 되고, 공적을 기준으로 한다면 개국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자가 선정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남 이방우는 이미 사망했으니 차남 이방과이거나, 비록 행위 자체에는 도덕적인 문제가 있으나 건국의 공으로 본다면 이방원이 세자로 선정되는 것이 합당하다고 개국공신들은 의견을 모았다.
--- p.70

8월 26일 태조의 병이 위중해지자 …… 저녁 8시경 이방원은 셋째 형인 이방의와 넷째 형인 이방간, 상당군 이백경과 함께 대궐을 빠져나와 집으로 말을 달렸고 대기하고 있던 사병을 이끌고 정변에 나섰다. 이때 이방원을 따르는 자는 처남인 민무구·민무질 형제를 비롯해 이거이·조영무·신극례·서익·문빈·심귀령 등 측근들과, 사병 혁파를 피해 숨겨둔 기병 10명, 보병 9명, 그리고 몽둥이를 든 하인 10명 등 총 29명이었다. 여기에 정릉 경비를 위해 파견 나온 안산군수 이숙번의 군사가 합류했다.
--- p.84

그 결과 세자와 정도전 등이 죽고, 10일 후 태조 이성계는 체념한 상태에서 왕위를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이렇게 이성계와 정도전의 나라는 끝났다. …… 이방원은 정몽주를 격살하고 고려를 무너뜨렸듯이, 이번에는 정도전을 참살하고 이성계와 정도전의 나라를 끝장냈다. 이 두 사건에서 그가 구사한 방식은 동일했다. 그는 냉혹하게 폭력을 사용해 처참하게 정적을 살해하고 정국을 반전시켰다.
--- p.86

태조와의 부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정성을 다했으며(친친親親의 시행), 공신들과의 삽혈동맹(굳은 약속의 표시로 동물의 피를 서로 나누어 마시거나 입에 바르던 일), 정몽주와 길재의 복권, 신관료의 충원(세 가지는 존현尊賢의 시행) 등을 통해 의합체제의 복원을 기도했다. 나아가 유교적 프로그램에 입각한 정치·사회의 제도화에 매진했으며, 백성을 위한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인정仁政의 실현을 추구했다. 표면적으로 태종은 유교적 군주였다.
--- p.110

이방원의 정변 행위는 계합적 시각을 현실화시켰다. 권력은 누구의 전유물도 아닌 강자가 쟁취, 장악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방원은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 실제로 얼마 후 이방간에 의한 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고, 태종 2년에는 조사의의 난이 일어났다. 따라서 태종으로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회복·유지에 노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초래한 한비자적 상황을 관리·극복해야만 하는 이중구조에 처하게 되었다. 이중구조 속에서 정국을 운영하는 태종은 두 얼굴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한편에서 바라보면 유교적 군주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른 편에서 바라보면 한비자적 군주의 얼굴이 보였다.
--- p.111

태종 2년 11월 5일 안변부사 조사의가 그의 아들 전 장군 조홍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다. ‘조사의의 난’으로 불리는 사건이다. 거병의 이유를 실록은 아주 짧게 말한다. “조사의는 곧 현비顯妃 강씨의 족속인데 강씨를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한 것이었다.” …… 자신의 거병은 반역이 아니고, 불의에 짓밟힌 정의를 복원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무인정변은 정당성이 없고, 무인정변으로 왕위를 차지한 태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p.117

태종 1년 2월 12일 태종은 공신들과 함께 신명께 제사하고 굳게 맹세하며 우호를 맺었다. 그들은 맹세를 통해 의합적 군신관계로 굳게 결속할 것을 다짐했다. 맹약을 깨고 배신하는 경우 받아야 할 징벌까지도 거론하며 영원히 지킬 것을 맹세했다. 이렇게 유교적 군신으로 새롭게 관계를 설정하는 한편 그들이 따라야 할 모델로서 길재·정몽주·김약항과 같은 전조에 충성을 바친 신하들을 불러오고자 했다. 태종의 목적은 분명했다. 자신의 신하들이 이들과 같은 충신이 되어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의합체제가 복원되기를 기대했다.
--- p.132

태조 7년 8월 26일 이방원은 정변을 일으키고, 하륜은 반역에 참여한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 하륜은 충청도 관찰사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도달한 하륜은 사람들이 병사를 이끌고 와 협조하도록 독려했다.
--- p.143

태종 초기의 통치 기구는 정치의 의정부, 재정의 사평부, 군사의 승추부로 이루어진 3부 구조가 되었다. 정치의 문하부, 재정의 삼사, 군사의 중추원이 함께 참여해 국정 현안을 논의하던 도평의사사가 해체되고 3부 구조로 개편되었다는 것은 신하들의 권한이 약화되고 국왕의 권한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49

태종 1년 개국 이래 처음으로 동·서 양계의 토지를 양전해 1만여 결의 수세지를 추가로 확보했다. 태종 5년부터 6년까지는 양계를 제외한 6도에 대한 토지 측량을 대대적으로 실시해 당시까지 왜구로 인해 양전하지 못한 연해의 진황전과 개간전 등 30여 만 결을 추가로 확보했다. 나아가 태종 11년부터 13년에 걸쳐 평안도·함경도의 양전을 본격적으로 실시했고, 태종 13년에 제주도의 토지를 양전했다. 이렇게 해 전국의 모든 토지에 대한 양전·개량이 완료되었다. 그 결과 고려 말의 80여 만 결에 비해 40여 만 결이 증대되어 120여 만결에 달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 p.156

태종 7년부터 집권 말기까지 태종은 경연에서 한 번도 강독하지 않고 태종 18년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태종의 경연 횟수는 집권 18년 동안 기록상으로 보면 15회 정도에 불과하다. 경연에서 가장 친근하던 강독관은 김과였는데 그와 강독한 책은 『대학연의』, 『상서』, 『십팔사략』, 『중용』 등 4종뿐이었다.
--- p.162

태종의 왕권 강화는 자의적·전제적 권력 추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만약 태종이 그럴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아마도 사찰기관이나 첩보기구를 강화했을 것이다. 실제로 중국의 황제들은 환관과 같은 친위조직이나 강력한 첩보조직, 그리고 대량숙청을 통해 황제권을 강화한 바 있다. …… 태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제도화한 자문·보좌 기구와 6조의 기능 확대는 왕의 절대적 권력 강화를 위한 것이 아닌, 강화된 왕권으로 권신세력을 억제함으로써 의정부와 권신들로 대표되는 소수의 중신들에게만 열려 있던 정치적 논의 공간에 다양한 소장파 관료들과 사대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p.166

태종 1년 7월 13일 문하부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치할 때, 문하부의 낭사가 사간원으로 독립해 비로소 최초의 독립된 간쟁기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간원의 독립은 정무기관인 문하부에 포함되어 있던 간쟁 기능이 제도적으로 보장된 것으로 유교 정치를 운영하고자 하는 태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p.168

직소제도는 신원자가 직접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제도로 신문고제도와 대가大駕 앞 상소를 들 수 있다. 신문고제도는 처음 등문고라는 이름으로 태종 1년 7월에 설치되었다가 태종 2년 1월 26일 이름을 바꿔 신문고를 설치하는 교서를 반포했다.
--- p.169

7월 10일 영의정부사 이화가 상소해 민무구·민무질의 반역죄를 청했고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화의 상소문에서 드러난 민씨 형제의 죄목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태종이 지난해 전위하고자 할 때 기뻐하는 빛이 얼굴에 나타났으며 복위한 뒤에는 이를 슬프게 여겼다는 것이고, 둘째는 “세자 이외에 왕자 가운데 영기英氣 있는 자는 없어도 좋다”라고 하여 왕실의 종지를 제거하고자 하는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다.
--- p.195

소국주의 전략을 택한 조선의 태종은 왕가인의 사례에서 드러났듯이 사대정책을 성실히 유지하는 동시에 여진에 대한 조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명나라의 정책이 조선이 감내할 수 있는 일정 선을 넘어서자 태종은 조선의 입장을 전달하고 시정을 요구한 것이다. 만약 십처인원을 조선에 귀속시켜 달라는 태종의 요청에 영락제가 긍정적으로 응하지 않았다면 태종은 어떤 대책을 취했을까?
--- p.223

부묘가 끝나고 정전으로 돌아온 태종은 신료들에게 준비된 교서를 반포했다. …… 이 시점에서 태종은 ‘유신의 교화(維新之化)’라는 표현을 통해 나라를 새롭게 하겠다는 각오를 선언했다.
--- p.248

유신의 교화 선언 이후 태종은 전반기와 전혀 다른 차원의 정치세계를 지향했다. ‘공론정치’다. 그는 전반기의 이중구조 속에서 이루어진 유교적 군주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조선 정치의 중요한 특징인 공론정치를 집권 후반기에 시작했다. 세종 대에 펼쳐지는 공론정치는 그 연장 선상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 p.250

태종 10년 7월 10일 태종은 명했다. “균름??을 넓히고 사고瀉庫를 짓도록 명했는데, 서울과 외방에 저축이 많기 때문이었다.” 균름이란 각 지방의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들었던 창고로 …… 사고란 쥐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위에 물을 빙 두른 창고로 경상도에서 처음 실시하고 다른 도에도 권장했다. 백성들로부터 수취해 사용하고도 남은 곡물을 저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 p.273

태종은 신하들과 성학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군신관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태종이 『대학연의』를 인쇄하겠다고 한 점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군신관계가 무엇인지를 아는 데 그치지 않고 ‘실행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p.284

태종 11년에 굶주리는 백성에 대해 유달리 애틋한 마음을 표출한 태종은 그해의 마지막 절기인 겨울에 들어선 10월 15일 ‘큰 교화의 정치’를 하겠노라고 대사면을 취했다. 그리고 겨울이 깊어진 11월 5일 정부와 6조에 일렀다.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항상 「무일無逸」을 읽어야 한다’라고 했으니, 내가 안일함이 없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병이 없으면 항상 이와 같이 하여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해 애쓰는 도리를 다하겠다.”
--- p.296

저화법의 회복에는 저화법에 대한 최종 결정권자인 태종 자신의 의지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태종의 의지가 자신의 독단이나 측근과의 비밀스런 논의가 아닌, 신료들과의 공개적인 논의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은 유신의 교화를 전후해 본격화한 공론정치의 한 측면을 잘 보여준다.
--- p.316

태종 13년 9월 1일 태종이 편전에 나아가서 하륜 등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소송한 자가 대개 2천 명이니, 내가 생각하건대 만약 당시 한 사람에게 모두 준다면 다른 한 사람은 반드시 원망할 것이오, 만약 중분中分해 두 사람에게 준다면 본시 동종同宗인지라 반드시 큰 원망은 없을 것이다. 대저 골육상잔은 이러한 까닭에서 생기니, 중분하는 것이 어떨까?” 함께 있던 모두가 찬성했다.
--- p.322

태종 14년 6월 27일 노비인지 양인인지 신분을 변정하는 원칙으로 종부법從父法이 확정되었다. 양인과 천민 사이에서 낳은 자녀들 중 아비가 양인일 경우 노비가 아닌 양인으로 삼는다는 원칙이다. …… 종부법의 시행으로 양인이 확대되어 국역 부담자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노비중분법과 종부법의 시행으로 신분제가 확립되어 사회갈등이 해소되고, 민심이 안정되었으며, 국고 수입이 증대해 태종 집권 후반기 태평성대를 구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p.323

세자의 여색 문제가 처음 등장한 것은 태종 10년 양녕 17세 때이다. …… 11월 3일 세자가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던 날 기생 봉지련이 마음에 들었다. 곧바로 소친시 두 사람에게 명해 그 집까지 뒤따라가 사통하고 마침내 궁중에 불러들였다. 이를 알게 된 태종은 소친시에게 곤장을 때리고 봉지련을 가두었다. …… 봉지련 사건을 도식화하면 이렇다. 세자의 일탈→태종의 분노→세자의 단식→태종의 용서. 이후 이 패턴이 반복된다. 게다가 반복하는 사이에 태종의 분노 강도가 증가하고 세자의 일탈 정도가 심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 p.355

태종 17년 2월 15일 마침내 최후를 장식할 사건이 터진다.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궁으로 몰래 들여온 일이 발각되었다. 세자가 이렇게 된 것은 자신들의 잘못이라는 세자 빈객들의 주장에 태종은 말한다. “이것은 경들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올바른 길로써 가르치지 못했는데 하물며 경들이 말해서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그 실상을 말하면 경들의 과실도 아니요 또한 내 과실도 아니다.”
--- p.429

태종 18년 6월 2일 태종은 여러 신료들을 부른 자리에서 지침을 하달했다. “세자가 간신의 말을 듣고 함부로 여색에 빠져 불의를 자행했다. 만약 후일에 생살여탈의 권력을 마음대로 한다면 형세를 예측하기가 어려우니, 여러 재상들은 이를 자세히 살펴서 나라에서 바르게 시행해야 할 것이다.” 이에 따라 의정부·삼공신·6조·삼군도총제부·각사의 신료들이 세자를 폐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6월 3일 세자를 폐해 광주로 내치고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삼았다.
--- p.437

태종은 왜 충녕이 아닌 어린 양녕의 아들을 먼저 지목했을까? 이 시점에서 그는 공론정치를 실행하는 유교적 군주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입을 통해 변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말하는 태종은 이제 자신의 생각과 뜻을 권력에 의지해 강행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세자 교체와 같은 국가 중대사의 경우, 비록 자신의 생각이 있더라도 조정의 논의 절차를 밟아 공론을 모아 시행하고자 했다.
--- p.441

태종 18년 6월 3일 세자 양녕을 폐위하고 충녕으로 교체한 지 두 달 쯤 지난 8월 8일 왕위를 세자 충녕에게 물려주었다. 태종이 52세이고 세종은 22세였다.
--- p.452

태종은 …… 금상이 실무적인 행정을 담당하지만 실질적인 정치적 결정은 상왕이 주관하는 정치체제를 태종은 구상했다. 이러한 체제를 ‘상왕정치 체제’라고 부르겠다. 이 체제를 적어도 10년은 유지하겠다는 것이 태종의 기획이었다. …… 세종 1년 2월 3일에는 구체적으로 세종이 30세가 될 때까지라고 말한다.
--- p.454

상왕정치 체제를 구축해 10년 권력을 유지하려는 상왕은 ‘간사한’ 강상인의 배신 행위와 ‘드높아진’ 심온의 위상을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낄 만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상왕은 어느 순간 결심했다. ‘싹이 자라 화란을 일으키기 전에 미리 뿌리를 뽑자.’ 시나리오는 짜였다. 강상인은 반역자, 반역의 수괴는 심온, 나머지 연루자는 당여.
--- p.462

상왕이 지시한 대마도 정벌의 정치적 목적은 왜구의 조선 침략에 대한 합당한 응징을 한 후 대마도주인 도도웅와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철수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 지역은 대마도에 한정시켰다. 일본 본토의 지방 영주나 중앙 정부로 연계되어 전면전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면서 그들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나아가 명나라와 연계되지 않도록 대마도 정벌에 관해서는 황제에게 시종 보고하지 않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 p.495

5월 14일 대마도 정벌에 반대하는 대다수 신료들에게 “한나라가 흉노에게 지속적으로 욕을 당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반박하며 대마도 정벌을 결연히 밀어붙였다. …… 상왕은 왜구의 근거지 대마도를 습격해 왜구를 응징하고,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아내서 손상된 대 일본 기미정책을 관철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정벌을 단행했다고 본다.
--- p.519

세종 즉위년 8월 18일 세종이 상왕전에 나아가 종친과 대신을 모시고 연회를 베풀었다. 세종이 상왕 앞에 나아가 꿇고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올리니, 상왕이 말했다. “내가 왕위에서 물러난 것은 복을 남겨두기 위함이었더니, 이제 도리어 더욱 높아지는구나(今反益尊矣).”
--- p.548

세종 4년 4월 22일 세종과 함께 동교에 나가 매사냥을 구경한 후 환궁한 태상왕은 몸이 불편해졌다. 병세가 깊어지다가 다음 달 10일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 p.560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내면을 파고든 인물 평가

이방원의 정체성을 파악한 견해가 탁견이다. 지은이에 따르면 변방 무장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활쏘기와 말 달리기를 즐긴 ‘무인’이면서 고려 우왕 때인 16세에 진사과에 7등으로 합격한 유자儒者이기도 했다(37쪽). 이런 사실에 주목하면 태종 치세 후반기를 다시 보게 된다. 이뿐 아니다. 힘으로 얻은 왕좌는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정변을 연출할 수 있다. 태종으로서는 유교적 국가 정체성의 유지에 노력하면서 한비자적 상황을 극복해야 하는 이중구조에 처했다(111쪽). 이는 유교적 인정仁政과 과감한 정치적 숙청이 병존한 태종 치세를 이해하는 열쇠로 작용한다.

냉혹한 승부사 결단의 정치가

이방원은 1392년 정몽주를 격살한다. 1398년엔 무인정변을 일으켜 정도전 등을 죽이고, 세자인 이복동생 방석을 몰아낸다. 모두 부친 이성계의 뜻을 어긴 행위였다. 권력의지를 드러낸 결단이었지만 새로운 왕조의 설립이라는 시대의 요구(네체시타)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 승부사라 할 수 있다(61쪽). 그런가 하면 누이(경신공주)의 시부이자 개국공신인 이거이, 처남이자 정치적 후원세력이던 민무구?무질 형제, 세종의 장인이자 떠오르던 실세 심온 등 외척을 가차 없이 쳐내 왕조의 권력 기반을 정비하는 정치력을 행사한다.

현실에 바탕한 ‘빅 픽처’를 그리다

왕권을 튼튼히 한 태종은 집권 후반기 들어 이상적 유교국가를 꿈꾼다. 1410년 ‘유신의 교화(維新之化)’를 추구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하고는 ‘공론정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유교국가를 지향한다. 대사면을 취하고(296쪽), 논란과 실패를 거듭한 저화법의 회복을 두고도 자신의 독단이나 측근과의 비밀스런 논의가 아니라 신료들과의 공개적 논의를 통해 추진하는 등이 좋은 예다. 1418년 3남 충녕에게 전위하고도 “군국의 중요한 일은 친히 청단하겠다”며 상왕정치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10년 동안 유지하려 한 것(454쪽) 역시 태종의 ‘빅 픽처’에 든다 하겠다.

색다른 시각 놓쳤던 사실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을 태종, 나아가서는 역사를 읽는 새로운 틀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정치학자의 저술이기에 가능한 측면이라 하겠는데, 의합義合과 계합計合, 술치術治와 양권揚權, 네체시타와 비르투, ‘성군 프로젝트’ 등 학술 용어, 신조어가 책 곳곳에 등장해 설명을 돕는 것이 그렇다. 여기에 위화도 회군 당시 이방원이 경기도 포천으로 달려가 모친 등 가족을 이끌고 함흥 쪽으로 도피하려 했다든가 양녕을 세자위에서 내친 후 당초 세종이 아니라 양녕의 아들을 후계로 삼으려 논의한 사실, 세종 대 치적으로 꼽히는 대마도 정벌이 실은 태상왕이던 이방원의 주도로 이뤄진 사실 등 그리 알려지지 않을 사실들을 접할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이 책은 태종~성종으로 이어지는 ‘군주 평전 시리즈’의 첫 권이다. 당연히 권력투쟁만 다루는 데 그치지 않는다. 손실답험법, 노비중분법, 신문고 등 직소제도 등 제도개혁, 정도전에 이어 추진한 ‘소중화주의’ 외교정책 등 ‘정치’도 꼼꼼히 살핀다. 또한 태종의 이데올로그 권근, 뛰어난 이재吏才로 태종을 보필한 하륜 등 주변 인물사도 녹여내 읽는 재미를 더한다. 한마디로 일반 독자에게는 역사 읽는 재미를, 정치인을 꿈꾸는 이들에겐 어떤 의미에서든 ‘교훈’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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