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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정고무신

검정고무신

이영일 | 황매 | 2021년 12월 17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1건 | 판매지수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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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7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340g | 128*188*16mm
ISBN13 9791196762261
ISBN10 1196762260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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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야. 아니, 저분이셔. 나의 여신님!”
찬은 한 여학생을 가리키며 크게 외쳤다. 나는 찬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으로 눈길이 따라갔다. 찬의 손가락은 사라지고 여학생이 나타났다.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미소 짓는 그 여학생. 무엇이 즐거운지 활짝 웃었다. 한낮을 지나 저녁으로 기울어가는 붉은 해가 그녀의 뒤를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까만 그녀의 단발머리가 황금빛으로 반짝였다.
나는 그때 알았다. 내가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을. 지난밤, 엄마를 장미에 비유해서 몇 자 끄적거렸다. 하지만 저 여학생은 세상 무엇에도 비유될 수 없이 스스로 아름다웠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영일도 놀랐는지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지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우와, 편지 술술 써지겠는데.”
--- p.24

담임이 지휘봉으로 교탁을 쳐 대니, 떠들던 애들이 조용해졌다.
“숙제 펴.”
한 바퀴 돌아본 담임은 참담한 심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째 떠먹여 주는 밥도 못 먹냐, 너희들은.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이 문제들만 풀어도 이번 시험 잘 볼 수 있다고 했잖아.”
반장 학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너무너무 슬퍼요. 선생님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져요.”
선생님은 예상치 않은 반장의 발언에 망치로 맞은 듯했다.
“어? 뭐?”
반장은 거침없이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을 생각하니 아이들의 아픔도 생생히 느껴져요.”
아이들은 그다지 아픔을 느끼지 않는지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반장을 쳐다보았다.
“선생님, 얘들이 왜 공부를 잘하고 싶지 않겠어요. 안되니까 못하는 거지요. 다행히 저는 토끼표 총명환을 먹어서 총기가 넘쳐요. 제 아버지께서 이 명약을 파시거든요. 공부하는 아이들이라면 꼭 필요한 거예요. 둔한 머리를 깨우는 토끼표 총명환! 기꺼이 너희들과 나눌게.”
반장은 가방에서 토끼표 총명환 상자를 꺼내 받쳐 들고는 교실에 보여 주었다.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지 아직 머리에서 처리되지 않은 선생님을 그대로 두고 반장은 벌떡 일어나 1분단부터 세 알씩 나누어 주었다.
“물도 필요 없어. 그냥 꼭꼭 씹어 먹으면 돼.”
반장은 진지하게 덧붙였다.
“더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정말 좋은 가격으로 주실 거야. 우리는 같은 반! 한 형제들이나 다름없어.”
반장은 감격에 차오르는 듯 목소리가 떨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거 진짜 먹어도 되는 걸까?”
영일은 내게 속삭였다.
“글쎄.”
나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장.”
영일이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 반장을 부르자, 반 아이들이 일제히 영일을 쳐다봤다.
영일은 연필을 거꾸로 쥐더니 닐 다이아몬드의 노래를 한 소절 부르고는 반장에게 토스했다. 이 노래는 요즘 라디오에서 매일같이 나왔다. 여인들의 영혼을 흔든 위대한 형의 노래라며 영일이 영어사전을 뒤적이며 외웠던 노래였다. 이 노래를 반장이 알까? 잠시 망설이던 반장은 놀랍게도 이 노래를 이어서 불렀고, 곧 후렴이 시작되며 둘이 입을 모아 불렀다.
“스윗 캐롤라인 굿 타임즈 네버 씸 소 굿.”
갑작스레 벌어진 뮤지컬 같은 광경에 아이들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영일은 환희에 차올라 외쳤다. 침방울이 여기저기로 튀었다.
“이제 난 네 말을 믿을 수 있어. 이렇게 예술을 사랑하는 너의 말이라면!”
영일은 책상에 놓인 세 알의 환을 입에 쓸어 넣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담임이 꿈에서 깨어난 듯 고개를 마구 흔들다가 멈췄다.
“너희 둘 복도에 손들고 서 있어.”
“선생님, 저는 그냥 순수한 마음에…….”
반장이 애원하는데 선생님이 말을 끊고 화를 눌러 가며 말했다.
“그냥 조용히 나가.”
영일과 반장은 주춤주춤 움직이며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선생님이 막대를 들고 흔들자 둘은 교실에서 뛰어나갔다.
나는 손을 들었다.
“넌 또 뭐야?”
담임이 피곤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 약은 어떻게 해요?”
담임은 반장 아버지가 파는 이 약을 버리라고도 먹으라고도 하기 어려운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 p.95-96

“어쨌든 네 피는 금방 멈췄어. 걱정 마, 기철아.”
걱정 마, 기철아? 소혜가 내 이름을 다정히 불러 주었다. 너무 좋아서 이 초원에 영원히 있고 싶었다. 그래, 걱정하지 않을게. 이렇게 달콤한 기분에 젖어 있자니 나는 영원히 시간이 멈추었으면 했다.
〈무지개 너머〉 노래가 뚝 멈췄다. 아줌마가 실내 불을 하나씩 껐다.
“이젠 가야지.”
소혜가 일어서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소혜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잡고 일어섰다. 약간 어지러운 듯한데 그것이 다친 것 때문인지, 오래 누웠다가 일어나서인지, 아니면 소혜의 손을 잡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이 차네?”
나는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물었다.
“응, 엄마가 보약 지어 주셔서 먹는데 안 따뜻해지네.”
소혜가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말했다.
참 좋다, 그치?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응, 좋아.”
소혜는 내 마음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나 보다.
“너희들, 제발 가라. 나, 집에 좀 가자.”
아줌마가 고함을 질렀다. 우리 둘은 서로를 보고 웃으며 밖으로 나왔다. 손을 잡고 걸었다. 어두워진 하늘에 달이 빛났다. 저벅저벅 걷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들리는 밤이었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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