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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르는 노래

바람이 부르는 노래

세종마루시선-003이동
김영호 | 심지 | 2021년 12월 2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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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60쪽 | 246g | 127*208*10mm
ISBN13 9788966272136
ISBN10 896627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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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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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게 일제 말 면서기시험에 붙고도
오사까로 징용 끌려간 거이
비빌 언덕도 없는 과부 아들이라 그렸다고 혔잖여
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응께 얼굴도 기억이 안 나제
어매가 외할머니를 원망험서 허는 이야기를 들어보믄
아버지는 지게에 소금동이를 지고
사방을 떠돔서 장사하느라
서른 살이 훌쩍 넘도록 장개를 못 갔다만 그려
그려도 연분이 있었는지 중매쟁이 수완 덕에
열세 살 애기를 시커먼 아저씨가 만난 거시여
‘그 어린 거시 머슬 알것냐 참말 도적놈이지 머겄어’
어매는 중매쟁이 말에 넘어간 외할머니를 타박혔어
열세 살이 시집와 열일곱에 딸을 낳았당게 심혔제
딸 둘에 아들을 낳았는디 무정헌 남편은 가버렸지
아버지가 지게를 타고 떠남서 외할머니랑 함께 살었제
외할매가 체수도 크고 화통혀서 사람들이 늘 꼬였어
눈이 겁나게 내리는 겨울밤엔
이야기 보따리가 넘쳐났고
그런디 외할머니가 부안 읍내에 가신 그 밤에
똥 깨나 뀌는 윗말 이서방이 우리 어매를 보쌈해 갔어
거기서 여동생과 남동생을 낳고 껄끄럽게 살었는디
내 앞으로 밭뙈기 하나 주고 헛기침 험서 돌아앉도만
내가 징용 갔다 와서 동상들도 김씨로 호적을 올렸지
그러다 내가 막판에 치매를 한 삼 년 앓느라고
애들헌티 그 밭 야그를 못 허고 떠나왔는디
작년에 우리 큰애헌티 세금고지서가 가는 바람에
그 밭을 팔어서 마침 큰애 임플란트 했당게
허허 그것도 결국 조상님 덕이것지 뭐
암튼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과부 밑이서 괄시받고 삼서
징용도 살었지만 내 심으로 칠남매 자석들을 건사혔응게
험한 인생도 착허게 살면 결국 복이 되는 법여!
---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 2-소금장수 아버지 이야기」 중에서


발자국 눈이 내리고 열흘쯤 뒤여
참말로 끔찍헌 밤이 오고 말았제
초저녁부터 여기저기서 사이렌이 울어도
될 대로 되라며 신발 신고 누워 있었제
갑자기 사이렌이 자지러지게 울어 보챔서
사감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리더랑께
‘대공습이다 대공습 빨리빨리 피하라’
‘공습경보, 공습경보, 적기 대편대 공습 중’
라디오도 공습경보를 숨 가쁘게 외쳐대더니
저만치 B-29 20여 대가 나란히 줄을 지어
서쪽에서 시커먼 상어 떼처럼 날아오더니
도심 상공에서 소낙비처럼 소이탄을 쏟아붓고
육중한 몸을 뒤채더니 동쪽으로 사라지는디
소이탄 뚜껑이 열리는 순간 불꽃이 팍 터지고
국수가닥처럼 불꽃을 늘어뜨리며 떨어지는디
하늘에 하얀 빛줄기가 흘러내려 꽃밭이도만
소이탄에서 찐득헌 액체 묻은 비단천이 쏟아짐서
나무든 건물이든 붙어갖고 오래오래 타는 것이여
소이탄 편대가 지나가면 또 폭탄 편대가 날아오고
이렇게 한 사십 분 번갈아 폭격기가 날아댕깅게
오매 하늘이 깨져불고 땅이 폭삭 무너지는 것이여
불바다가 된 오사까는 차츰차츰 잿더미가 되아가고
기왓장과 돌조각이 탕탕 총소리로 솟아오르고
커다란 대들보가 우지끈 쾅 허고 무너지는디
뚝딱 뚝딱 투두두 퉁 불 튀기는 소리가 요란혀
네로 황제가 보았다면 날뛰다가 발광혔을 것이고만
---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 26-공습으로 불타는 오사까」 중에서


기생 오라비 일행을 어렵게 따돌리고
부두 한쪽에서 노숙이나 하려 하는디
사이렌 소리가 숨 가쁘게 우는 거여
크고 길게 작고 짧게 사면팔방이 온통
처절하게 울부짖는 사이렌 소리 뿐여
우리는 얼른 주변 산으로 뛰어들었제
찢어질 듯 고사포 소리가 울어쌓더니
당황한 일본군들 고함소리가 들리는겨
어둠 속을 가만히 봉게 고사포 진지여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든 셈이제
앗 뜨거라 산길을 더듬어 내려오니까
그제야 공습 해제 사이렌이 울리도만
저만치 희미한 남폿불 아래 어렴풋이
대문 사이로 한복 입은 여인이 보이는겨
용기를 내 기침을 하며 안으로 들어선게
놀란 여인이 물러서며 우리를 경계허는디
무례함을 사과하며 먹을 걸 사정헝게
아무것도 대접할 게 없다며 미안해함서
장독대에 있는 밥을 아끼다 상해버려서
풀이나 쑤어야겠다기에 그거라도 달랬더니
얼른 치마폭에 상헌 밥을 감추는 것이여
만리타국에서 남의 밥을 뺏을 순 없다며
마음을 달래보았지만 팔이 먼저 나가도만
상한 밥그릇을 빼앗아 바닥에 눈꼽만큼 붙은
밥을 셋이서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우고서
찬물을 벌컥벌컥 마셨더니 참말 꿀맛이더만
그제야 정신 차려 백배사죄하고 문을 나서는디
벽시계가 새벽 두 시를 가리키며 지켜보더만
그 여인은 손을 흔들며 무사귀국을 빌어주었어
--- 「한 농투산이의 넋두리 38-달콤한 상한 밥 한 그릇」 중에서


평생 땅을 훑으며 사는 농투성이든
옹이 박힌 손에 기름 마를 날 없는 테바치든
파리한 손가락으로 글을 짓는 샌님이든
내남없이 고루 웃음 짓는
맑고 곧은 그런 세상 그려보겠노라
밤새 골목길을 숨죽이고 헤매다
문득 안경알 반짝이며 멋쩍게 미소 짓던 임이여

어둠 속에서도 아침을 움켜쥐고
푸른 하늘을 굳게 간직한 채
할퀴며 덤벼드는 미친 파도에
수없이 뒹굴고 엎어져 자맥질해도
그예 무릎 세우고 곧추 허리 펴고
매운 바람결에 쫓긴 작은 새들 보듬으며
순순히 꽃그늘을 내어주던 임이여

갈라진 가슴밭에 흥겹게 물을 대고
맨발로 첨벙대며 얼싸절싸 써래질하며
신새벽의 카랑한 풍경소리를
흙고무래로 곱게 빗질하던 임이여
그 고운 마음씨 마침내 생채기 되어
시샘 많은 뻐꾸기에 둥지를 빼앗긴 채
소쩍새 핏빛 울음 마른침으로 삼키며
가슴 속 풀무질 숯덩이 되어 차마 잠들지 못하는 임이여
어둑새벽이면 맑은 이슬로 내리고
햇살 펼치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며
손가락 끝에 노오란 민들레 꽃반지로 찾아와
함께 어깨 겯고 부둥켜안고 무동 태우며
결코 시들지 않는 함성으로 하얗게 풍매화로 날아올라
온 들판에 꽃덤불로 끝내 살아나시라 끝끝내 살아나시라
--- 「꽃그늘로 오시는 임-산내 뼈잿골에서」 중에서

늘 쳇바퀴 돌듯 빼꼼한 날들이지만
이지가지 허덕이다 겨우 숨을 고르면
손톱이 드센 차꼬처럼 손끝을 짓누른다
성큼 자라는 게 하냥 보람만은 아니어서
지름길로 와서 그늘처럼 웃자란 손톱을
눈에 보이는 만큼은 도려내야만 한다
때에 물드는 만큼은 잘라내야만 한다
여린 본심은 속살로 말갛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곤댓짓으로 고개 드는 손톱 잘라내면
아침이면 몽당비처럼 닳아지면서도
별빛받아 지렁이처럼 자라나는 머리털처럼
뾰족한 촉수를 뻗대던 성깔 넉넉해졌으면
겨우내 들판을 쏘다니며 허허롭던 허리가
느긋한 군살로 허리를 에워싼 뱃살처럼
메마른 눈망울 치뜨던 마음 푸근해졌으면
사소한 집착으로 속살로만 파고드는 내향성 손톱처럼
넉넉하게 팔 벌려 보듬지 못하는 너를 보며
코를 찌르는 하얀 코털을 그예 뽑아내듯
드세고 뻗서던 너를 오롯이 깎아내리라
--- 「손톱을 깍으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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