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까지 ‘있음’을 위해, 오로지 ‘있음’의 둥지에서 행복을 추구하기 바쁜 삶을 살아왔다. 나를 사르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그리고 아마, 불행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런 중에라도 간혹 내가 나를 깨우려는 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이 소리는 없는 곳에서 나오는 소리다.
--- p.28
하늘을 이고 땅을 디디고 살면서, 완전함은 하늘에 있는 것에, 불완전함은 땅에 있는 것들에 투사했다. 이는 인간이 하늘과 땅에 비해 미약한 존재임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뜻이며, 땅을 디디고 사는 인간이 하늘을 동경하며, 곧 현실을 살면서 이상을 추구하며 살아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연에 투사된 인간 또는 인간에 비춰 본 자연을 살피는 일은 인간 삶의 현실과 이상을 살피는 일에 다름 아니게 된다.
--- p.31
스스로 운동 원리를 갖는 상태로서의 자연은 물론, 근대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환경으로서의 자연을 새삼 되새겨보려는 시도는 그동안 우리가 잊고 있었거나 고의로 제쳐두었던 신심信心의 회복을 방법론 삼아 생명과 평화의 정신에 가 닿기를 소망한 결과이다.
--- p.60
글의 서두에서 자연과 사회는 대립되는 말이라고 언급했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구분은 실생활에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연에 대한 사회의 역습을 제어하며, 자연과 사회가 공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철저하고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하는 ‘생태학적 사고’가 오히려 필요하기 때문이다.
--- p.70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이 우리에게 말 건네는 ‘검은 언어’이다. 그 언어는 우리에게 침묵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지금 대량 생산 체제에 살고 있다. 즉 상품의 대량 생산, 밝음의 대량 생산, 언어의 대량 생산, 욕망의 대량 생산, 지식의 대량 생산…….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모든 것을 대량으로 소유하고 있으면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심지어 가난마저 대량 생산으로 인해 비참이 되고 말았다. 코로나는 이제 그것을 그만두라고 한다. 자연이 말하는 침묵은 너무도 큰 언어여서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모른다. 그 큰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고 살아온 미증유의 결과가 기후위기 사태가 아니겠는가.
--- p.84
근대 산업문명의 이러한 파괴적 결과를 내다본 선구자들도 물론 있었다. 세계문학의 대작 『파우스트』는 근대 이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성장 제일주의와 맹목적 개발의 위험성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작품이다. 예컨대 자신의 오랜 보금자리를 지키려던 노부부가 거침없는 개발주의자인 파우스트와 그 하수인인 철거 대행업자 메피스토펠레스의 폭력에 의해 불태워져 죽는다. 우리의 용산참사와도 다르지 않다. 눈먼 파우스트는 제방 공사장의 삽질 소리를 듣고 있지만, 알고 보니 그것은 파우스트를 파묻을 무덤을 파는 악령들의 삽질 소리였다. 저돌적인 건설의 현장에서 문명의 무덤을 보는 괴테의 혜안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 p.94
여백은 이 찰나에 무한을 연다. 그 아득한 무한이 찰나 속에 있는 우리를, 우리의 흐름을 껴안는다. 형상과 무가 서로를 껴안으며 서로를 생성한다. 그 여백의 깊이는 배를 타고 흘러가는 늙은 선비, 아니 김홍도가 겪었을 숱한 영욕의 구비들과 삶의 상처들이 고요히 삭여진 그늘의 깊이이며, 장자와 동아시아 예술정신의 아득한 심도이며, 분류표를 해체시키는 접힌 질서의 열림이다. 그리고 그 위로 솟는 빛, 황홀한 깨달음 같이 매화꽃이 핀다. 그 꽃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로 와서 피는 꽃이면서 동시에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지는 꽃이다.
--- p.115
‘도 道 ’를 본받는 ‘스스로움’의 일상은 간단하다. 자연이라는 존재 자체는 이미 스스로 생성하고 발전하며 쇠퇴하고 사망하는 ‘스스로움’의 패턴을 춘하추동 사계절의 교체를 통해 무한 반복해왔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도 ‘생로병사’라는 생명주기적 ‘스스로움’의 패턴으로 살아왔다. 이제는 그 패턴을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나’를 포함한 만물의 존재 및 ‘스스로움’의 존재 상태를 발견하고 행동하며 습관화하고 전환하는 패턴을 ‘지금, 여기’에서 실천하면서 스스로 그렇게 이뤄지도록 해야 할 때이다.
--- p.127
일본은 편지나 엽서를 쓸 때 지켜야 하는 집필 방식이 있다. 바로 자연과 계절에 대한 언급부터 써 내려가는 것이다. 매월 상순, 중순, 하순으로 나뉘어 정리된, 예를 들어 ‘맑고 차가운 공기에, 바람에 날리는 눈이 반짝이는 이 시기’ 등 정해진 문구들을 사용하여 편지를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이를 지키지 않으면 그 편지는 멋이 없는 정도가 아닌 예의상 좀 부족한 편지가 되어 버린다. 인터넷에 찾아보면 이런 문구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 p.131
갯벌은 공존의 공간이다. 바닷물이 들고 나며 강이 바다로 흐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래서 칠게와 낙지와 인간과 도요새가 같은 갯벌에서 공존하는 것이다. 부리가 긴 알락꼬리마도요와 부리가 짧은 검은머리물떼새가 갯벌에서 공존한다. 바닷가 윗마을 주민들은 작은 새우를 잡고 아랫마을에서는 꽃게를 잡았다.
이 공존의 경험은 수백 년 동안 갯벌과 함께 ‘갯살림’으로 쌓여 있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으로 존재하는 갯벌을 획일화된 시공간으로 바꾸어서도 안 된다. 우리 갯벌은 자연이면서 문화 원형질이기도 하다. 갯벌이 선사시대부터 현세까지 그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이 생명을 품고 물새에게 먹이를, 인간에게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공존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다.
--- p.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