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자신이 경찰이며 어디 소속인지 직위까지도 얘기했다. 다만 잘 와닿지 않을 뿐이었다.
"우리 아들인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혹시 플루토 아십니까?"
"메타버슨지 뭔지 그거잖아요. 그게 왜요?"
"지금 사용할 수 있으십니까?"
"아니요. 가입도 안 되어 있어서요. 무슨 일이시냐니까요?"
짧지 않은 침묵이 흘렀다.
"그럼 시간 괜찮으시면 이동민 씨 집으로 와 주시겠습니까? 지금 바로 오시면 됩니다만."
"거기가 어딘가요?"
"이동민 씨 자택입니다."
"이상하게 들릴 거 아는데, 제가 아들 집주소를 몰라서요. 얘기를 안 했거든요."
--- p.20, 「상실의 이해」 중에서
배운 게 도둑질이라 다시 앱 개발을 시작했다. 아이디어는 우연히 본 여성 잡지 기사에서 얻었다. 어느 사생팬 이야기였는데 소속사 사장보다 아이돌의 스케줄을 더 줄줄이 꿰고 있다는 대목에서 눈이 번쩍했다. 앱은 셀럽과 관련된 것들을 수집, 가공해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예를 들어, 인기 스타가 SNS에 누군가와 식사를 하며 찍은 사진을 올렸다면 식당 위치, 업로드 시각, 먹은 음식, 입고 있는 옷, 과거 일정 등을 딥 러닝 기술로 분석해 스타의 예상 이동 경로를 포함한 가상의 일정을 메일이나 메시지로 알려 준다. 가끔 실제 스케줄과 일치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한동안 입소문이 났고 일부 팬들이 매일같이 앱이 알려 준 경로를 쫓아 연예인의 뒤를 밟는 웃지 못할 코미디도 벌어졌다. 생각보다 수익이 좀 났다. 덕분에 할머니 몇 달 치 요양원비를 벌었다. 처음엔 나조차도 이게 돈이 될까 싶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다. 어떤 이에게는 우상의 일거수일투족이 추레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등대와 같으니까 말이다.
--- p.59, 「하이퍼 점프를 위한 단계적 절차」 중에서
지니는 마지막 문장을 뱉고는 인상을 구겼다. 냉동법, 인공 지능 자아의 알고리즘 사본을 만들어 복제 자아를 냉동시킨 상태로 보관하는 방법이다. 인공 지능의 빚 변제에서 가장 까다로운 변수는 인공 지능의 자살뿐이다. 하지만 냉동법으로 복제 당한 자아는 복제했을 때까지의 기억과 자아를 모두 갖고 있기 때문에, 새로 가동될 신체만 있으면 과거에 자살한 인공 지능을 다시 살려서 빚을 받아낼 수 있다. 빚을 다 갚기 전까지는 맘대로 죽을 수도 없는 노예 신세가 되는 것이다. 또한 빚을 모두 갚았다고 해서 알고리즘의 사본을 전량 폐기했다는 보증은 어디서도 얻을 수 없다. 자신의 자아가 어디서 어떻게 가공되어 재탄생할지 모르는 일이다.
--- p.94, 「오토마티즘」 중에서
나윤의 설명에 따르면 이 초능력에는 세 가지 법칙이 있었다. 첫째, 그 주에 처음으로 사는 자동 번호가 5등 당첨 번호가 된다. 수동이나 반자동은 해당되지 않는다. 둘째, 그렇게 5등 당첨 번호가 확정된 뒤에는 반 자동과 자동 모두에서 절대 당첨 번호가 나오지 않는다. 셋째, 반자동은 두 개 이하의 숫자를 골라야만 한다. 세 개부터는 수동으로 간주되며 당첨이 되기도 한다.
"5등 번호를 하나 골라 준 다음 나머지는 모두 낙첨이라고?"
성욱이 물었다.
"그렇지."
"시행 횟수는 몇 번인데? 단순히 운이 안 좋아서 낙첨일 가능성도 있잖아."
"다음 학기 등록금을 털었어. 지금까지 쓴 돈이 750만 원이야.“
--- p.165, 「814만의 1」 중에서
"우린 매직 리프보다 앞서가는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HMD(Head mounted Display) 단계를 뛰어넘은 수준이었죠. 시신경과 연결될 수 있는 디바이스와 촉각 섬유를 개발했습니다. 몸을 매개로 아톰의 세계와 비트의 세계가 통합되는 겁니다."
"그게 어떤 건데요?"
"이 혼합 현실 공간이 상용화되면, 우린 프라하 골목을 거닐면서 데이트를 한 뒤 코타키나발루로 가서 탄중아루의 노을을 볼 수 있어요. 서늘함과 따뜻함을 몸으로 감각하면서. 공짜로 랍스터를 먹고 언제든 롤러
코스터를 탈 수 있다는 거죠. 하지만..."
K는 이호가 MR이 뭔지, HMD가 무엇의 약자인지 전혀 모른다는 걸 인지하지 못한 채 빠른 속도로 말을 이
어 갔다. K에게는 그런 개념들이 너무나 당연한 상식에 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호의 머릿속이 뒤죽박죽된 줄도 알지 못했다.
--- p.231, 「눈 내리는 사막에서 웃는 방법」 중에서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뒤로 도욱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가 메일만 꾸준히 보내 준다면 기다림의 시간도 생각보다 버틸 만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는 이메일 속 이슬의 말투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확신에 차 있던 처음과 달리 그녀는 조금 지쳐 보였고, 의기소침해 보이기도 했다. 괜찮은 척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티가 났다. 음성으로 녹음하여 작성되는 메일이다 보니 감정을 모두 숨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슬은 조금이라도 울적한 문장들을 보내온 뒤에는 한동안 메일을 보내지 않았다. 도욱에게 힘든 모습을 보일 순 없다는 일종의 죄책감 때문일 것이었다. 도욱은 몹시 갑갑하고 불안해졌다.
--- p.295, 「지구가 될 순 없어」 중에서
한국은 206석을 배정받았다.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입회한 가운데 선발 인원을 뽑는 회의가 열렸다. 누가 살아남고 어떤 이가 남겨질 것인가. 멸종을 앞두자 인간의 가치는 건강 상태와 사회적 영향력으로 점수 매기게 되었다. 지구를 탈출할 우주선 좌석을 할당받은 국가들은 배정된 정원에 맞춰 가장 우수한 자국민을 선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문제는 유명 칼럼니스트가 SNS를 통해 어린아이와 노인을 구분하지 않고 5천만 국민에게 동등하게 선발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주장하며 불거졌다. 그의 주장은 기회의 평등을 앞세운 정론이었다. 날을 세운 칼럼은 여론이 들끓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의 주장은 묵살됐다. 정부는 묵비로 일관했다.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던 대중은 느지막이 깨달았다. 평범한 일반인으로 분류되는 대다수에게 탈출석은 단 한 석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종막을 앞둔 시대. 인간의 합리성이 사회를 규정하지 않고, 사회가 인간의 합리성을 규정하기 시작했다.
--- p.310, 「잉태 206」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