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 ‘~되기’의 표를 오로지 연극에 적용시킨다면 연극에 대해 몇 가지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극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곧바로 마주치게 되는 여러 표상들, 즉 욕망의 장에서 펼쳐지는 대화들, 사건들, 이야기와 질문들, 그리고 배우라는 극 속의 인물들과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이라는 두 개의 직접적인 응시의 지점, 상상을 통해 발현되는 무대 장치들, 이야기라는 구조 안에서 인물들의 실제의 삶과 환상 안에서의 삶, 결국 언어와 신체, 무대장치, 이 모든 표상들을 시작으로 마침내 다시 삶을 보여주는 일련의 과정인 연극의 모든 구성요소들은, 전복되는 것들에 대해 던지게 되는 실재의 질문들과 답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의 단계들, ‘~되기’는 삶의 보편적이고 우연적이고 과잉된 제스처로 이루어진 하나의 ‘원본-되기’이며, 즉 또한 이 원본을 통해 하나의 복사물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 그러나 과연 그 복사물이 필요한 것일까. 혹은 그 복사물은 어떤 삶을 복사하고 있는가. 과연 실제의 삶을 복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마침내 그 복사물들이 실제의 삶으로부터 실재의 삶까지도 발화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먼저 질문할 것은 연극이 그 오래된 응시로부터 삶의 어떤 것들을 가져왔는지, 그리고 삶으로부터 어떤 응시를 발화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하지만 연극이, 그 안에서 보여지는 삶에 대한 과잉된 제스처가 그 특유의 속성이 아니라 무언가 여전히 과잉되어 있다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텍스트, 무대, 배우, 관객,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혹은 연극이니까, 연극에서 허용되는, 아니 허용된다고 믿어지는 것들, 즉 연극에서 응시해야 하는 지점이 여전히 그 숨을 전혀 바꾸지 않고, 애초에 생성된 그대로도 아닌, 뭔가 파괴한 후에 그것을 통해 새롭게 재구성된 것도 아닌, 생성된 것도 아닌, 단지 유래된 형태에서 무엇을 바꾸고 무엇을 뒤집어야 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인 것들을 지금도 여전히 보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왜일까. 소위 연극적이라고 말하는 이상한 무대 위에, 소위 연극적이라고 말하는 괴상한 몸들이 서 있으며, 소위 연극적이라고 말하는 어색한 톤들이 텍스트를 뿌리고 있다면 이것들도 여전히 연극적인 것일까. 그러므로 왜일까. 연극은 삶과 인간, 모방과 계열들 사이에서 아주 오랫동안 그 의미, 형식, 양태와 그것이 이루어야하는 카타르시스라는 관점까지도 정해진 채로 그 오랜 숨을 쉬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연극이 그 자체로 전복하는 것은, 여전히 발화해 왔던 것들로부터, 즉 늘 삶이라는 반복에서 차이라는 낯선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었나. 다른 의미에서 연극은 이제 복사물조차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적어도 삶 자체에 대해 말할 때는 더욱 그렇다. 물론 어쩌면 이제 원본의 가치도 지나간 시대일 것이다. 더욱더 빠르게 그 가치들은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연극의 원본성과 고유한 공간이란 삶과 이야기이며 삶의 병리적인 장치들을 무대로 열어놓은 바로 이러한 간극과 틈새들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지금 연극은 그 간극과 틈새를 무엇으로 메우고 있는가. 연극이 과거의 영광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즉 연극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실제를 반영하는, 혹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특유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않고 그저 자극적인 소재, 뻔뻔한 웃음, 존재하지 않는 희망을 텍스트로 메우고 있다면, 이것이 지금 연극의 과잉된 제스처이다. 즉 삶이라고 꾸며놓은 무대 위에서 대사를 통해 말해지는 이런 텍스트들, 이런 텍스트들을 꾸민 듯한 연기와 과잉된 감정으로 말하는 배우들, 그림으로 대충 그려놓은 무대 배경과 의미 없는 조명과 단지 관객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은, 지금 연극이 과잉된 제스처에 대해 오해하고 있으며 또한 지금까지도 여전히, 발화해 왔던 것들로부터 아무것도 찾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조악한 무대, 연극적인 톤, 말도 안 되는 복선과 자극적인 내용이란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고민의 문제이다. 연극이 그저 그럴싸한 톤과 음성으로 대사라고 불리는 텍스트들을 내뱉고 있을 때 관객은 거기서 어떤 공감이나 어떤 삶을 바라봐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거기에 공감이란 없다. 그저 연극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관객은 그저 ‘아, 이것은 연극이구나’ 하면서 바라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 시대에, 바로 지금, 수많은 가치들이 지나간 바로 이 시대에 내가 왜 저런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모든 연극들이다. 즉 의식이 날조하는 삶의 질서를 여전히 의식의 환상 안에서 보여준다면 당장에는 연극을 보고 웃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을 삶이라고 느끼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물론 삶이란 때로 그저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부동의 질서인 것이다. 그러나 이 질서들을 다시 구성하는, 즉 경험하고, 실제적인 것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욕망과 억압, 프로그램, 그리고 기표와 기의들의 횡단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이 되지 않는다면, 정말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그렇게 볼 수밖에 없도록 그물망을 쳐놓고 누군가 걸려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걸 보러 올 것이라고 믿으면서. 무엇보다 가장 불편한 지점은 이런 삶의 보편적이고 우연적인 부분이 만들어내는 가짜 삶, 가짜 원본, 더군다나 가짜의 복사물을 통한 발화가 그것이 연극이라는 장르로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극에서 발화하는 삶의 보편적이고 우연적인, 즉 삶의 과잉된 제스처란 그런 것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이 과잉된 제스처는 삶에서의 낯섦, 반복과 차이, 즉 삶에서 늘 반복되는 그러나 그 안에서 가끔 섬뜩하게 느끼는 현실에 있다. 연극에서는 말해지지도 못할 일들이 실제의 삶에서 과잉된 제스처를 만들고 있다. 매일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드라마가 생겨나는가. 매 순간 얼마나 새로운 가치들이 생겨나고 있는가. 얼마나 수많은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둔감해져 있는가. 그것도 아주 쉽고 빠르게. 그저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에 의해. 연극이 현실의 실체와 문제들을 재창조하지도 못하고 어떤 이상이나 보다 가치 있는 것들이라는 초월적인 지평을 드러내지도 않는다면(오히려 연극이 이것들만을 다루더라도 문제는 달라진다), 연극은 이제 더 이상 삶을 발화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연극은 때로 도피처이기도 했다(물론 너무 초라한 도피처이기는 하지만). 그리고 한편으로 보고 싶지 않은 삶까지도 보여주면서 거기에는 거부할 수 없는, 바로, 그, 삶이 있었다. 연극의 발화는 그런 보편성과 우연성으로부터의 헛디딤이다. 연극은 그런 헛디딤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무릎을 세운다. 그러나 삶은, 억압된 채로, 억압된 그 순간들을, 즉 바로 이 억압된 삶으로 인해 다시 무릎을 세운다 하더라도 그것이 아직 어색하다. 그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억압된 삶이라는 그 어색한 무게감을 이겨내기 위해 다른 쪽 무릎을 더 곧게 세우지만 한쪽으로 치우친 무게 중심은 척추를 휘게 만든다. 그리고 이내 또 다른 억압이 드러난다. 팔을 들어본다. 그리고 한참을. 그렇게 뭔가 어색한 것들을 제자리로 놓기 위해. 그래서 어쩌면 필연적으로 연극은 과잉된 제스처로 움직일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잉된 제스처는 실제의 삶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그런 제스처이다.
--- 「연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