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MCA필름앤비디오는 20세기 이후 시각문화에서 미술과 영화 그리고 비디오 아트를 가로지르는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21년 첫 프로그램으로 MMCA필름앤비디오는 20세기 초 아방가르드의 전통 속에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했던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들에 주목했다. 지난 2019년에도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를 소개하는 상영 프로그램을 《텍스 에이버리의 이상한 세계》이라는 제목으로 개최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루니 툰〉(1930년부터 워너 브라더스에서 제작된 단편 애니메이션의 총칭)의 전성기를 이끌고 드루피, 다람쥐 스크루이와 칠리 윌리, 벅스 버니 등 우리에게 잘 알려진 캐릭터를 만든 미국의 애니메이터 텍스 에이버리(Frederick Bean Avery)(1908~1980)를 소개하며 그의 대표작을 모았다. 올해 MMCA필름앤비디오에서는 이와 같은 맥락을 이어가되, 상영관과 전시 공간이 공존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특성과 강점을 활용한다. 상영 프로그램과 전시, 그리고 교육 프로그램까지 어우러진다면 영상에 대한 더욱 심도 있는 이해가 가능할 것이라는 취지로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을 기획했다.
--- p.17-18, 「기획의도: 움직임을 만드는 움직임: 창조적 사고와 과정_이수정(학예연구사)」 중에서
로테 라이니거(1899~1981)는 예술에 조예가 깊은 집안에서 성장했다. 라이니거는 베를린에 위치한 혁신 교육 학교인 발트슐레 시절부터 연극에 관심을 보였다. 그녀는 “셰익스피어에 대한 열정으로 작품 속 장면들을 공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기초적인 형태의 그림자극을 구상하게 되었다.” 고 언급했다. 그리고 라이니거는 이를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공연했다. 이후, 당시에 매우 유명했던 배우이자 영화 연출가인 파울 베게너와의 만남은 그녀의 삶의 여정에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녀는 “베게너는 강연에서 애니메이션의 환상적인 가능성을 강조했고, 바로 그것이 나의 미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 p.37, 「로테 라이니거와 그녀의 영화_크리스텔 슈트로벨」 중에서
피싱거의 영화는 확실히 그가 살고 있던 시대를 훨씬 앞섰고, 대부분의 작품은 피싱거 혼자 제작한 것이었다. 작품 활동을 하는 내내 그는 조수를 거의, 혹은 전혀 둔 적이 없으며 재정적 지원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의 혹독한 현실과 베를린에서의 나치 정권, 그리고 지원이 없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피싱거는 추상 영화라는 새로운 언어를 개발하여 혁신적인 작품을 만들어냈고, 이후 세대의 영화 제작자들과 아티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피싱거는 (그와 동시대에 살았던 발터 루트만과 바이킹 에겔링과 함께) 1920년대 독일의 절대영화 운동으로부터 벗어나, 프랑크푸르트, 뮌헨, 베를린, 로스앤젤레스 등지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시각적 음악의 아버지”로 인정받는 그는 음악과 공학을 공부했는데, 두 분야는 피싱거 작품 전체에 영감을 주었다.
--- p.57, 「오스카 피싱거: 창조적인 영혼_신디 키퍼」 중에서
예술가 렌 라이의 업적은 그가 필름메이커로서 애니메이션을 직접 제작하는 혁신적 방식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있다. 카메라 없이 필름 위에 바로 이미지를 생성하는 작업 방식은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렌 라이는 이 기술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1975년, 라이는 이 기술에 대해 레이 소번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것은 바늘로 긁어서 셀룰로이드에 직접 새기거나 채색하는 방식이다. 애니메이션을 아는 사람이라면 셀룰로이드 필름의 디자인을 조정할 수 있고 이를 조정함으로써 최종적으로 꽤 그럴듯해 보이는 연속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또한 시각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음악 사운드?예를 들어 리드미컬한 비트?의 악센트와 동기화면 음악을 들으면서 바라볼 것이 있게 된다.”
--- p.79, 「색채의 시네마: 렌 라이의 실험 영화들_폴 브로벨」 중에서
‘체코의 멜리에스’라고 불리기도 하는 카렐 제만은 그의 고국인 체코 및 해외 관객, 어른과 아이, 애니메이션 영화와 실사 촬영 팬 등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있다. 그를 조르주 멜리에스에 비유하는 것은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잘못된 것일 수도 있고, 사실 잘못된 것이 맞다. 이 두 영화 제작자가 모험적인 공상 과학 장르에 관심을 갖고 쥘 베른의 풍부한 세계로부터 영감을 받아 탐험, 기술적 진보, 현대 사회의 발명 등의 주제에 집중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스톱 트릭 같은 마술적 기술을 사용한 최초의 영화계 마술사에게서 제만이 영감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만의 혁신적인 기법들은 어떤 면에서는 멜리에스를 능가했으며, 이야기 전개에 대한 그의 창의적인 접근법도 멜리에스와는 차이가 있다.
--- p.99, 「카렐 제만: 기발한 애니메이션 모험가_나탈리아 뉴다치나」 중에서
1941년부터 1984년까지 캐나다 국립영화위원회(NFB, 이하 NFB)에서 일했던 노먼 매클래런(1914~1987)은 필름메이커로도 유명했다. 스코틀랜드에서 학교를 다니던 초보 필름메이커 매클래런을 발견한 사람은 NFB를 창설한 존 그리어슨이었다. 그는 캐나다의 대표 수출품이 밀과 노먼 매클래런이라 말하기도 했다. 나는 매클래런의 작품을 195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처음 봤는데, 완전한 추상 작품인 4분짜리 애니메이션 〈세레날〉(1959)을 본 후 “영화는 내러티브의 매체”라는 나의 생각은 통째로 뒤집혔다. 그 안에는 어떤 묘사나 암시도 없었고, 오직 음악의 정신 즉, 트리니다드 스틸 밴드의 정신을 담고 있었다. 그 후 30년에 걸쳐 나는 매클래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웠다. 그의 마지막 영화인 〈나르시스〉(1983) 작업을 함께 했고, 나중에는 내 어깨 너머로 나를 지켜보는 듯한 그의 정신과 함께 다큐멘터리 〈창작 과정: 노먼 매클래런〉(1990)을 만들기도 했다.
--- p.117, 「노먼 매클래런: 내일의 필름메이커_도널드 매퀼리엄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