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냈다고 하여 저절로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고통을 겪었다 하여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중요한 과업이라 여겨지는 결혼이나 양육을 이루었다고 하여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잘 안다. 그러지 못한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나왔고 나 또한 여전히 어렵고 어려우니까.
--- p.16, 「서른에는 다 알 줄 알았지」 중에서
서른을 목전에 두었을 뿐인데 지금 ‘모험’을 떠나는 건 철없고 한심한 일이 되어버린다. 원하는 것을 야금야금 시도해보고 새로운 것에 슬쩍 기웃거리고 눈앞에 주어진 것만이 아니라 더 넓고 많이 보려고 애쓰는 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이십 대에는 부족하다고 했고 삼십 대가 되려니 과하다고 한다.
--- p.22, 「나이, 그게 뭐라고」 중에서
여러 좌절과 실망이 있었고 결국 나는 의심할 줄 알게 되었다. 꿈이라는 신화는 무얼 위해 생겨난 걸까? 사회는 왜 우리가 꿈에 집착하도록 만드는 걸까? 우리는 무엇에 속고 있는 걸까? 꿈이란 단어는 기만이 아닐까?
--- p.40, 「원앤온리, 나만의 꿈을 좇아야 한다는 강박」 중에서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지도 못하게 내가 또렷해졌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전까지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뭘 원하긴 하는 건지, 모든 게 애매모호하고 흐릿했는데 원하지 않는 상대와 함께하면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알게 되다니.
--- p.70, 「불편한 신발은 신지 않아」 중에서
강렬한 사랑을 주고받을 존재가 생겨 내 사랑의 총량을 가뿐히 늘려버리고, 타인에게 에너지를 어마어마하게 쏟는 몰입의 경험을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격렬하게 흔들린다. 임신하는 순간부터 출산과 양육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인간, 하나의 생명, 하나의 존재가 나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부담감에 거의 기절할 것 같지만, 생존을 위한 의존이 나를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가는 걸 상상하면 누군가 심장을 꽉 쥐어짜는 것 같다.
--- p.101, 「포기할 수 없는 것을 위해 포기하기」 중에서
나는 사람이 변한다고 믿고 싶다. 내가 변하고 싶으니까. 변할 수 없는 부분과 변할 수 있는 부분이 나뉘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모르겠다. 사람의 변화에 있어서 바뀔 수 있는지보다 상대가 고통스러워하는지 여부를 기준으로 삼고 싶다. 상대를 힘들게 하는 나의 어떤 점을 바꾸려 하지 않은 채, 나를 사랑한다면 네가 감수하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하고 싶은 사랑이 아니다.
--- p.125, 「너를 위해 변하려 노력할 거야」 중에서
내가 나를 내 친구처럼 대할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은 발걸음에도 박수쳐 줄 것이고 부족함을 비난하는 대신 위로할 것이다. 잘했어, 수고했어, 대단해, 멋져, 응원해, 믿어 같은 말들을 내가 친구들에게 하는 만큼의 절반만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해 준다면. 조금 더 나에게 관대해질 수 있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만큼 나를 믿어줄 수만 있다면 나는 훨씬 더 행복해질 텐데.
--- p.138, 「너무 아픈 독립은 독립이 아니었음을」 중에서
드라마를 보고 또 봤다. 멋진 사람들처럼 살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사는 게 지겨워졌다. 지하철역에 내려 걷다가 멀리 보이는 우리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볼 때면 모든 게 피로해졌다. 가장 지겨운 건 나로 사는 것이었다. 나는 왜 하필 나로 태어나서.
--- p.155, 「우울을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중에서
자신을 성적인 존재로만 취급하는 건 나조차 마찬가지였다. 여자에게 성적 매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너무 오래 내면화했다. 남자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게 중요해서, 그러려면 여자로서의 매력이 중요해서, 내가 나를 이용했다. 결국 아무 쓸모 없는 남자들의 관심을 얻겠다고 내가 나를 지웠다.
--- p.190, 「욕망 당하기를 욕망하다」 중에서
남자들은 내가 다른 생각을 가지면 똑똑하다고 한다. 그리고 똑똑하다는 말은 금방 고집 있다는 말로 바뀐다. 나는 고집 있는 신입사원이 되었고 고집 있는 며느리가 되었고 고집 있는 여자가 되었다. 남자들이 하면 대화인데 내가 하면 공격적인 주장으로 받아들인다. 나는 내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의견을 밝히며 말을 흐리지 않고 온전한 문장으로 말했을 뿐인데 내가 무섭다고 한다.
--- p.206, 「똑똑한 여자에 대한 적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