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대안에 대한 반대투쟁이 심해지자 …… 이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상백은 …… 1947년 7월 19일 여운형이 암살당한 후 정치 활동을 접고 사회학과의 창설에 집중했다. …… 김필동에 따르면 “상백의 진단학회 활동은 해방 후 상백이 경성대학 및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고, 서울대학교에 사회학과를 창설하는 데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다. 왜냐하면 진단학회 출신들이 문리과대학 문학부의 교수진 구성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 p.34
그는 제자들을 격려하고 장학금을 마련해주고 유학을 주선하면서 출중한 후속 세대 학자들을 양성했다. …… 이상백의 제자들 가운데 최재석, 김채윤, 한완상, 김경동, 강신표, 신용하, 김진균 등이 개인적으로 그를 회고하는 글을 남겼다.
--- p.103
그가 남긴 사회사 연구는 최재석, 신용하, 김영모 등 2세대 학자를 거쳐 박명규, 김필동, 정근식, 안호용 등 3세대 학자로 이어졌으며 그 연구의 흐름은 ‘한국사회사학회’라는 독자적인 흐름으로 계속되고 있다.
--- p.106
1954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대학에 사회학과를 설립하는 데 기여한 배용광이다. …… 배용광은 이만갑과 똑같이 1921년생으로 1948년 같은 해에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1950년 6월 『학풍』 사회학 특집호에 함께 논문을 실었으며 1957년 한국사회학회 창립에도 함께 참여했다. 그는 경북대학교 사회학과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초창기 사회학자로서 지식사회학, 산업사회학, 종교사회학, 법사회학, 범죄사회학, 여성사회학, 체육사회학 등 사회학의 여러 영역에 두루 관심을 기울였고 대구·경북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적 조사 연구에서도 나름의 성과를 축적했으며 일찍이 사회학 개론서를 펴냈다.
--- p.111
배용광의 지적 관심의 넓이는 경북대학교 도서관에 배용광의 기증도서로 설치된 ‘배용광 라이브러리’를 보면 알 수 있다. 1999년에 설치된 이 문고에는 …… 영어 저서, 일본어 저서, 프랑스어 저서, 미국과 유럽 사회학 저서들의 일본어 번역본과 한글 번역본, 우리말 저서 등 3,856권이 수록되어 있다. ……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일본에서 발간된 사회학 관련 도서들이 그의 학문 세계의 중추를 구성하고 있는 듯하지만 미국과 유럽의 사회학에 관심을 기울여 원서를 구해 읽었던 것도 확인할 수 있다.
--- p.140
이만갑은 도쿄제국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 1955년과 1956년 사이에 미국 코넬대학에서 1년 동안 조사방법론과 농촌사회학을 공부했다. …… 귀국 직후 195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 ‘사회조사방법론’ 과목을 개설했고 1957년 9월에는 사회학과 교수로 임명되었다.
…… 1958년 이후 이만갑은 한국의 농촌 현장에 조사방법론을 적용하여 ‘사변적 사회학’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작업에 몰두했다. …… 니콜라스 티마셰프의 『사회학 이론』을 1961년에 번역 출간했고 1964년에는 고영복과 함께 미국 대학의 사회학 개론 교재였던 킹슬리 데이비스의 『사회학』을 번역하여 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은 1963년에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사회조사방법론』과 함께 초창기 한국 사회학계에 미국 사회학을 전파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 p.209
이만갑은 ‘과학적 사회학’을 내세워 가치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는데 …… 해방 후 반공체제의 성립과 자유당 정부의 부패, 5·16 후의 권위주의적 정부와 1972년 유신체제의 수립이라는 역사적 과정에서 그는 기존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에 선 적이 없다. 적당한 선에서 기존 체제를 수용하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미국 연수, 국내외 연구기관의 연구비 지원 등의 특권과 특혜를 누렸다. …… 그의 사회학에는 거시적 차원의 권력관계나 계급관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다.
--- p.277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초창기에 학문적으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은 이상백과 최문환이었다. 경성제대 예과를 마치고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해영은 그 두 사람의 수제자였다. 1949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이해영은 1952년 부산 피란시절 모교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1955년과 1956년 사이에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공부했다. 귀국 후 1958년에 모교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사회학과 교수가 되었다.
--- p.283
1954년 백령도, 덕적도, 흑산도 등 서해의 여러 섬 지역의 현장 연구에서 시작된 그의 조사 연구 …… 1964년에는 ‘미국인구협회Population Council’에서 재정 지원을 받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안에 ‘인구 및 발전문제연구소’를 창설했다. …… 그는 연구소 설립, 연구원 훈련, 연구 기획, 조사 연구 실시, 연구 결과 출판 등을 효과적으로 조직한 탁월한 ‘연구기획자’였다.
--- p.284
이해영은 인구학과 사회조사, 가족사회학과 인류학 분야의 후속 세대 양성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면서 미국 유학을 권장하고 주선하는 데 헌신적이었다. 이해영의 학맥은 인구학 분야에서 권태환, 박상태, 도흥렬, 김두섭, 김익기, 최진호, 전광희, 박경숙 등으로 이어지고, 문화인류학 분야에서는 강신표, 한상복, 이문웅으로 연결되었다.
--- p.335
이해영은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정책 형성에 관여하는 정책사회학자였다. 그는 1970년대 말에 사회복지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세상을 떠났다. ……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학자들은 이해영의 문제의식을 이어 한국 사회의 불평등 해소와 사회복지의 증진을 위한 연구를 강화하고 실현 가능한 창조적 정책을 제시하는 정책사회학을 발전시켜야 한다.
--- p.356
해직 교수가 되어 한때 강단을 떠나야 했던 한완상과 김진균 등 동료교수들과 달리 김경동은 계속 학계에 머무르면서 연구와 강의 그리고 나름의 사회 활동을 계속했다. 이상백과 이만갑에 이어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됨으로써 ‘아카데믹 사회학’ 또는 ‘강단사회학’을 대표하는 공인된 학자가 되었다.
--- p.362
‘한국을 대표한다’는 규정은 연구 업적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수월하다는 것이며 ‘세계적이다’라는 찬사는 국제학술지와 국제학술대회에 가장 많은 논문을 게재, 발표하였을 뿐만 아니라, 연구 내용이 ‘한국적 고유성과 세계적 보편성’을 융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학의 토착화와 세계화를 동시에 달성하고 있기 때문에 부여된다. 요컨대 김경동은 …… 위대한 사회학자의 한 사람으로 분명히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 p.368
그가 1978년에 출간한 『현대의 사회학』은 지금까지 한국의 사회학자가 쓴 개론서 가운데 인간주의라는 일관된 관점을 유지하면서 한국적인 사례가 가미된 가장 종합적인 사회학 개론서이다.
--- p.431
김경동의 사회학이 갖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그의 사회학적 분석에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의식과 역사적 관점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결여되고 엘리트주의적 관점을 취하게 되며 결국 보수적 사회학으로 기울어지기 쉽다는 지적도 있다.
--- p.432
한완상이 권력, 부, 명예 등 사회적 희소 자원의 소유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갈등적인 사회적 관계를 설정하고 그 세 가지 차원에서의 결핍으로 인해 억압받고 고통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정의하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사회를 개혁하는 사회운동에 관심을 가졌다면, 김경동은 ‘인간’이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애매한” 개념을 내세우면서 경제성장 위주의 물질적 성장을 비판하고 유연성의 원리를 발휘하여 ‘문화로 다듬은 발전’이라는 발전 모델을 제시했다.
--- p.4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