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후 형성된 한국의 비판사회학은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와 민중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웠고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사회적 소외, 문화적 가부장제, 분단의 지속 등을 해결해야 할 문제로 제시했으며 민중,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 지식인 등을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설정했다. 흔히 비판사회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한완상과 김진균을 떠올리지만 이효재의 독특한 위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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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1957년에 귀국한 후 이효재는 농촌과 도시 가족을 주제로 하는 조사 연구에 참여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한국 사회의 심층을 파고들지 못하는 조사 연구의 피상적 성격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970년대와 1980년대 권위주의 체제를 거치면서 이효재의 사회학은 가부장제의 철폐, 민주화, 그리고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이념적 지향과 실천적 목표를 가진 비판사회학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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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성학 세례를 받은 제자들은 1990년대와 2000년대에 여성학자, 여성운동가, 여성부 장관, 국회의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해 기여했다. …… 여성운동의 활동가로 한명숙, 지은희, 장하진, 최영희, 신혜수, 이미경, 이경숙, 이옥경, 정강자, 김금래, 인재근, 고은광순, 김상희, 이형랑, 강명순, 김희은, 오한숙희 등이 있고 사회학과 여성학 분야의 학자로는 이재경, 조순경, 강인순, 김영화, 함인희, 조주현, 김은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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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재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모범적으로 실천했다. …… 1970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사회학회 회장으로 활동했고, 1978년에는 한국가족학회 초대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비판사회학을 발전시키면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동료, 후배들과 더불어 여성평우회, 여성한국사연구회, 여성민우회 등을 만들고 회장을 역임했다. “이효재에 있어서 학문과 실천은 한 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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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한국 비판사회학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1946년 이상백의 주도로 제도화된 한국 사회학은 1970년대에 들어서 두 갈래로 분화되었다. 한 줄기는 이상백에서 이만갑과 이해영을 거쳐 김경동으로 이어지는 아카데믹 사회학이고 다른 한 줄기는 이상백에서 이효재와 황성모를 거쳐 한완상으로 이어지는 비판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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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은 고등학생 때 …… 신학과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질문들을 던졌다. “도대체 사회라는 이 거창한 것이 병이 났을 때 왜 고치는 의사는 없는가? 왜 전쟁이 터지며 왜 부패가 생기는가?” …… 대학 진학을 앞두고 전공을 선택해야 했다. …… 한완상은 “인간의 영과 육만이 아니라 사회의 영과 육을 고칠 수 있는” ‘사회의사social doctor’가 되기 위해 사회학과에 진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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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의 비판사회학은 ‘민중사회학’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완상의 민중사회학은 그가 1976년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1차 해직되어 대학 밖의 지식인 생활을 하던 과정에서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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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 한완상은 한국 사회를 총체적?거시적?객관적?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지배세력, 민중, 지식인 등의 주요 행위자들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논하면서 민중사회학의 네 가지 연구 영역을 제시했다. 민중사회학은 첫째, 한국의 즉자적 민중을 이해하고 둘째, 대자적 민중의 발생과 전개를 연구하며, 셋째 지배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넷째,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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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서관모를 비롯한 소장학자들은 사회계급론과 사회구성체론으로 나아가면서 노동계급과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 이들은 사회구성체 논쟁이라는 이름으로 한국 사회의 성격을 논의하면서 계급해방과 민족해방 사이의 관계와 우선순위에 대한 논쟁을 전개했다. ……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는 1984년 김진균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산업사회연구회에 속하는 젊은 사회학자들이 있었다. ……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론이 등장했고 한완상은 아카데믹 사회학과 비판사회학을 아우르며 시민사회론이라는 새로운 연구 지향성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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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의 민중사회학은 1970년대 중후반 한국 비판사회학의 태동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의 민주주의, 사회적 불평등, 민족분단에 대한 문제의식은 1980년대 급진화한 사회과학도들과 사회운동권으로 연결되었으며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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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1990년대에는 김진균이 한국 비판사회학을 대표하는 학자로 활동했다. …… 김진균은 자본주의 체제분석과 계급분석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분단 상황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했으며 노동운동과 지식인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를 지속적으로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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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의 조직력은 1980년대에 들어 그 빛을 발휘했다. 1983년 해직교수협의회, 1984년 산업사회연구회, 1987년 학술단체협의회, 1989년 민주화를 위한 교수협의회, 1994년 민주와 진보를 위한 지식인연대(약칭 진보지식인연대) 등의 조직 결성에 기여하고 전교조, 전노협, 민노총, 민주노동당 건설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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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은 노동운동을 확대 강화하고 진보적 정치세력을 성장시키기 위해 학문적 활동과 실천적 활동을 결합시켰다. …… 전노협 지도위원 역임 시절 어려운 상황에 있던 민주노총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후학들이 민주노총에 이론적?실천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여기에는 1994년 6월 결성된 한국산업노동학회가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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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균의 해직교수 시절인 1983년 8월 임영일과 조희연이 적극적으로 나서 김진균을 위한 소박한 연구실을 마련하고 ‘상도연구실’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창고를 개조해 만든 이 연구실은 ‘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라는 한국비판사회학회의 산실이 되었다. 이 연구실에서 임영일, 조희연, 서관모, 허석렬, 정근식, 김준, 조형제, 공제욱, 윤수종, 노중기, 정이환, 조효래 등의 제자들이 모여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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