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석은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 가족사회학, 농촌사회학, 한국 사회사, 한국 가족사, 한국 사회학사, 한국 고대사, 고대 한일관계사 등 사회학과 역사학을 넘나들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친 사회학자다. 그는 오로지 아카데미즘의 정신으로 학문 생활에만 전념하면서 오로지 학문적 기준만으로 선배, 동료, 후배 학자들을 가감 없이 평가하는 학자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 결과 그는 한국 사회학계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가르쳤던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도 비주류 아웃사이더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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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까지 일본식 교육을 받은 최재석은 한국 가족과 농촌을 연구하면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과 조선인 학자들에 의해 축적된 연구 성과를 감추지 않고 계승했다. 그렇다고 그가 서구 사회학 연구에 무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버드대학에 교환교수로 다녀오기도 했고 영어로 된 사회인류학 책을 번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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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에서 석사학위를,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의 가족제도와 농촌사회를 연구한 ‘토종’ 사회학자 최재석은 외국 이론이나 연구방법론 수용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연구 대상이 먼저 있고 그것을 제대로 연구하기 위해 적절한 연구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학자들은 외국에서 만들어진 이론부터 일단 수용하고 나서 그것을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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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은 ‘효’라는 가치를 핵심으로 하는 가족주의는 서열의식, 감투 지향의식, 친소 구분의식,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미분화라는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진단했다. 최재석의 가족주의 비판은 1980년대 박영신의 일련의 작업을 거쳐 2000년대 정수복에 의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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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석은 대학 밖의 사회적 활동을 자제하고 홀로 연구실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지만 동료 학자들의 글을 꼼꼼하게 읽고 잘못된 부분이 발견되었을 경우에는 구체적인 증거와 일관된 논리로 비판하는 비평문을 썼다. 최재석은 강준만이 수행한 이른바 ‘성역 없는 실명 비판’을 학계 차원에서 일찍부터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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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에게 최문환과 이상백이 대학에서 만난 스승이라면 홀로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된 스승이 두 사람 있다. 신채호와 김구가 그가 사숙한 스승들이다. 그는 신채호와 김구의 정신적 유산을 이어받아 민족주의 정신과 독립운동사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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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귀국한 신용하는 1975년 2월 서울대학교에서 「독립협회의 사회사상의 사회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자로서 신용하의 정체성 구성에 자주적 학문 추구가 중요하다고 할 때 하버드대학 박사를 거부하고 서울대학교 박사가 되었다는 점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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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는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사이비 학설’을 사실을 바탕으로 검증하고 ‘사회학적 가치평가와 판단’에 의거하여 강도 높게 비판하는 작업에 나섰다. “일본제국주의가 1910~1945년의 식민지 강점기에 수행한 식민지정책이 한국을 ‘근대화’시키고 ‘개발’시켜주었다는 소위 ‘식민지근대화론’은 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과거 일제 조선총독부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 강점기에 선전하던 거짓된 ‘식민지 홍보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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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세대에 속하는 신용하는 1960년대에는 비판적 지식인 역할을 담당했고 …… 그러나 그 이후에는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하고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래서 197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와 19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이 급진화하는 시기에도 정치권력 비판이나 현실 사회운동권과는 거리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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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는 “가용 자료원의 망라적이고 체계적인 이용”을 통해 사실을 밝히는 “철저하게 실증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 “서구 사회사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한국 사회사 방법론으로 재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사회사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로서 이론적 사유를 촉진하기 위해 1980년대에 …… 『사회사와 사회학』, 루이스 코저의 『사회사상사』와 필립 아브람스의 『역사사회학』 등을 편집하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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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과에서 사회사를 전공하는 길이 열리자 …… 신용하의 지도를 받으면서 하나의 학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한국의 사회사 연구는 1세대의 최문환과 이상백에 이어 2세대의 신용하, 3세대의 박명규, 김필동, 정진성, 지승종, 김영범, 정근식, 정일균, 김경일, 공제욱 등을 거쳐 김백영, 서호철, 정준영, 강성현, 김민환 등 4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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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는 교육학을 전공했지만 독학으로 사회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박영신은 1966년 미국에 유학하여 로버트 벨라를 통해 탈코트 파슨스를 거쳐 베버, 뒤르켐, 마르크스 등 고전사회학자들의 이론 세계와 이어졌다. 그가 …… 한국 사회학계와 거리를 둔 상태에서 자기 나름의 학문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 사회학의 근본 뿌리와 이어져 있다는 자의식과 자부심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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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은 학창시절 외솔 최현배와 한결 김윤경에게 겨레사상과 한글의 중요성을 배웠다. …… 사회학자 박영신의 지적 형성 과정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은 미국 유학시절 만난 지도교수 로버트 벨라다. …… 박영신은 벨라에게 도덕과학으로서의 사회(과)학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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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연세대학교 교직원 수양회에서 박영신은 ‘예언적 과학’으로서의 사회주의가 아니라 ‘실천적 도덕성’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 박영신이 볼 때 ‘사회주의 이전의 사회주의’는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에도 꺼지지 않는 이상적 사회에 대한 청사진이 될 수 있다.
--- p.304
억압적인 권위주의 시절 지식인들이 정치권력의 하수인이 되거나 재벌기업을 옹호하는 ‘전문가’가 된 것을 비판한 박영신은 민주화 이후 지식인들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자리로 들어가는 이른바 ‘폴리페서’ 현상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 지식인의 임무는 권력의 자리로 이동하여 개혁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개혁을 비판하고 그 개혁의 세계를 넘어서는 ‘자유로운’ 영역”을 확보하는 일이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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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이 볼 때 한국의 주류 사회학은 “자연과학을 사회과학의 이론적 모형으로 삼은 나머지 그 목적이 무엇이든 미리 정해진 목표에 무조건 봉사하는 수단의 자리로” 떨어졌다. 그는 그런 주류 사회학의 흐름에서 벗어나 마르크스, 뒤르켐, 베버, 토크빌 등 고전사회학자들의 저작에 나타나 있는 ‘바람직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이론체계의 연관성에 주목하면서 ‘바람직한 사회’에 대해 논의하는 사회윤리적 사회학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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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의 사회학은 전근대 전통사회를 넘어 근대사회에 어울리는 가치관과 윤리의식의 형성을 기본 과제로 삼고 있다. 그것은 베버, 파슨스, 벨라로 이어지는 문제의식의 한국적 음미이자 심화이다. 우리 사회의 근본 문제를 따지기 위해 서구 이론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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