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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사
임후 | 파란 | 2022년 01월 10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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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1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98g | 128*208*8mm
ISBN13 9791191897135
ISBN10 1191897133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옷을 사러 가서

미안함과 싸우고 왔다 옷을 입어 봐도 되냐고 물을 때의 미안함 다른 사이즈는 없냐고 물을 때의 미안함 답을 알면서도 이 색깔이 맞냐고 물을 때의 미안함 잘나가는 제품이냐고 세일은 하지 않느냐고 물을 때의 미안함 실컷 물어 놓고 살까 말까 고민할 때의 미안함 그래 놓고 결국 사지 않을 때의 미안함 다시 사기로 결정하고 카드를 긁으면서 이 노고를 선사한 데에 대한 미안함 노고를 선사하고도 한 벌만 살 때의 미안함 멋쩍게 다른 옷을 둘러보며 가게 문을 나설 때의 미안함 등 뒤에 꽂히지도 않는데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의식하며 미안함 옷을 사러 가서 미안함을 사고 왔다 돈을 내고 미안함을 사고 왔다 돈이 줄어들었는데 미안함이 늘었다 미안함을 들고 있다 주머니에 지갑에 겨드랑이에 구두 속에 미안함이 늘고 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가에 서 있다 길가에 널려 있다 길가를 서성이다 다른 가게의 문을 연다 미안함을 사러 미안함을 팔러 미안함을 빌리러 미안함을 과시하러 미안함을 은폐하러 미안함에 중독된 듯이 미안함을 숨길 수 없는 표정으로 문을 연다 미안함을 문고리에 묻히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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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사

개를 키우는 일이 개를 죽이는 일이라면. 개에게 먹이를 주는 길이 독을 먹이는 길이라면. 그런 사육에서. 그런 살육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이. 헤어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그는 손에 개를 묻히지 않는다. 아무것도 묻히지 않은 손으로 개를 묻으러 간다. 혼자 빈손으로 걸어간다. 빈손으로 걸어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길. 비가 내린다. 비에서는 항상 흙냄새가 나고 흙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르지. 아무것도 묻지 않은 손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비린내가 난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를 쓸어 넘긴다. 고개를 들어 문을 두드린다. 두드리고 두드리고 두드린다. 굳게 닫힌 철문 너머.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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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었다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느낄 수 있다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네가 말했다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내가 물었고

그런 사람을 위해 하나님이 있다고 했다 바로 그런 사람이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좋은 자질을 가졌다고 했다

나는 좋은 자질을 가졌구나 좋은 자질은 유익한 것이겠구나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 나는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고

하얗게 빛나는 손등을 쓰다듬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너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파르르 떨리는 나뭇잎을 바라보고 있다

너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고개도 돌리지 않고 네가 말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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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후 시의 화자는 지난 십 년간 우리 시단을 첨예하게 이끌었던 선한 의지의 화자들과는 여러모로 성격을 달리한다. 좋은 것 내지 좋은 곳에 대한 믿음을 간직하거나 장착하고자 했던 이들의 목소리가 지난 십 년간의 시단 풍경을 압축한다면, 임후의 시는 그러한 압축 파일에 묶일 수 없는 자의 내면 풍경으로 조각된다. 조각은 둥글둥글하지 않다. 그것은 선하고자 하는 의지의 이면에서 짝패처럼 따라붙는 맹목이나 위선을 불편하게 긁어 댄다. 맹목이 될 바에야 무심(無心)을 택하고 위선이 될 바에야 비선(非善)을 택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의 속물성을 들추어내는 것이 임후 시의 일면을 이룬다면, 속물성의 끝 간 데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삶의 공허함은 그의 시의 바닥을 이룬다. 그의 시는 깨달음의 언어가 아니라 불가지의 언어로써 세계의 맨바닥과 부딪친다. 알 수 없음, 알 수 없음, 끝내 알 수 없음의 세계는 단 하나의 정답만을 허용하는 듯하다. 무엇을 붙잡고 늘어지든 삶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한 인간의 죽음이자 한 세계의 종말과 파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없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포장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의 시는 흘러나온다. 일상을 비집고 나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덤덤하면서도 시니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직설적이고, 달콤하면서도 차가운 어조와 어울리는 이유도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그의 시에 내장된 어떤 자화상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풍요 가운데 쓸쓸함이 묻어나는 그 자화상은 한 사람의 자화상에 그치지 않는다. “근거 없는 믿음과 불안감”으로(「가위바위보」) 가득 차 있는 동시에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으로 텅 비어 있”는(「전부는 없다」) 얼굴이 어디 한 사람의 얼굴뿐일까.
- 김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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