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는 자랑스러운 시간만은 아니다. 공주의 근대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 시간을 지나와서 지금의 한국이 있고 지금의 공주가 있다. 이 사랑스러운 문화도시 공주는 수천 년 역사의 연속선 위에 있지만, 가장 직접적으로는 근대 시간의 위에 서있다.
---「책을 펴내며」중에서
공주는 23부제 당시 호서지역을 3개로 나눈 공주부 시절보다는 조금 더 관할 지역이 늘어났지만1, 3도제가 도입되면서 더 이상 호서지역을 대표하는 도시는 아니게 되었다. 공주는 호서지역의 중심도시에서 충청남도의 중심도시로 바뀌는 것을 수용해야 했다. 이로써 호서지역의 통합성은 사라졌고, 이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는 때로는 협력하지만 때로는 경쟁하는 관계가 되었다. 또한 공주는 이후 행정구역 조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땅을 내어주는 입장이 되었다. 대전과 조치원, 그리고 최근 세종시에 이르기까지 충청권 신흥도시들의 성장과 확장에는 공주의 희생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호서의 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중심도시로」중에서
도청 이전은 근대도시인 대전이 전통도시인 공주를 압도한 사건이었다. 신흥도시 대전이 감격에 빠진 동안 호서의 중심도시에서 충남의 중심도시로, 그리고 이제 그 중심도시 역할을 내려놓은 공주는 차분히 다음을 모색해야 했지만, ‘다음’의 여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도청 소재지로서 위상을 잃은 대신 1933년에 당시 한강 이남에서 가장 긴 ‘철교’인 금강교를 가설했고, 공주여자사범학교와 공주농업학교 등을 비롯해 각종 교육기관을 설립하면서 교육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도청이 옮겨간 바로 그 이유(교통이 불편하고, 도시의 확장 가능성이 낮다)로 말미암아 이후로도 특별한 산업발전이나 도시발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교육도시, 역사도시, 문화도시. 공주는 그 정체성을 잘 발전시키며 근대도시로서 성장해야 했다.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도청 이전」중에서
(공주를 지나는) 경부선 3차 답사 노선안은 기존에 있던 한국의 큰 도시들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또한 이후 건설될 호남선과의 연결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실제로 건설될 가능성이 높았던 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노선안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 금강을 건너는 교량 건설이 쉽지 않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부선 공주역의 가능성이 사라진 진짜 이유는 당시의 긴박한 정세 때문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며 일본과 러시아는 계속 충돌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고, 군부는 일본과 대륙을 철도로 연결하면서 단 1미터라도 단축되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펼쳤다. 지금의 경부선 노선은 그 일본 군부의 입장이 반영된, 결국 전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공주역의 첫 번째 가능성은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진 가능성, 경부선 공주역」중에서
연구자들은 공주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 전하는 이러한 유림이나 지역 유지의 철도 반대 이야기를 일종의 ‘기억된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몇몇 예외적인 사건을 제외하면, 대부분 지역에서 철도 부설을 반겼다는 것이다. 공주 역시 마찬가지여서 철도를 반기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철도를 끌어오고자 했다. 다만 그것이 성사되지 않자, 거꾸로 유림의 반대 때문에 철도가 들어오지 못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것이 지역에서 통용되었다. 철도를 끌어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발적으로 막았다는 말로 바뀐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놈의 철도’라는 표현이 ‘유림’이나 ‘양반’과 대비되면서 한층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공주는 계속 철도를 원했다」중에서
공주는 역사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백제의 고도로서 부여가 더 강조되고 거기에 많은 지원과 관심이 몰리면서 역사도시 공주는 그 자체로는 특별한 강점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공산성이 백제 왕성이나 충청감영의 첫 번째 발상지로서 주목받지 못하고 유락공원으로 개발된 것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이후 공주는 해방에 이를 때까지, 그리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교육도시로서 강한 정체성을 갖고 발전해왔다. 그것이 실제 공주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여부는 철저한 검증이 필요할 테지만, 교육과 역사를 내세운 ‘문화도시’라는 자부심은 근대적 개발에서 소외된 공주시민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교육도시 공주’라는 도시 브랜드」중에서
한국은 이제 막 근대, 혹은 근대서양문명, 근대과학기술과 근대적 사유에 눈을 뜨고 있었다. 서울의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서는 ‘서구 문명’이 관심사 중 하나였다. 하지만 서울이 아닌 한국의 다른 지역에서 바라보면 서울도 문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서울을 외국의 다른 도시들과 비교할 수도 있지만, 그 차이만큼 서울과 한국의 다른 지역의 차이도 컸다. 공주에서 포크는 “이곳 사람들은 편견이 심하고 미신을 믿으며 극단적으로 무지했다.”라고 적고 있다. 그것은 공주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가 그런 말을 할 정도로 공주를 관찰할 여유가 있던 것일 뿐이다. 편견과 미신과 무지는 한국 전체의 일이었다.
---「화륜선으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중에서
베버 신부가 한국 민중들을 연민과 공감의 시선으로 대했던 것은 그들이 순교자들의 후손, 바로 ‘영웅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을 떠나는 베버 신부의 마음은 애통함으로 가득했다. 베버 신부는 배를 타고 부산을 떠나면서 몰락해가는 한국 민족의 운명을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안타깝고 연민에 가득 찬 마음을 이렇게 적었다. “마치 한 민족을 묘지로 끌고 가는 장례 행렬을 떠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라고. 그는 배 위에서 한국을 돌아보며 진심을 다해 이렇게 외쳤다. “대한만세Taihan mansa!” 한국에 처음 왔던 서양인 신부가 넉 달의 여행을 마치고 떠나며 마지막 남긴 말은 ‘대한만세’였다. 베버 신부는 순례자로 와서 한국 민중의 친구가 되어 돌아갔다. ‘대한만세’는 그 친구가 남긴, 기억해둘 만한 우정의 말이었다.
---「순례자로 온 사람, 공주를 만나다」중에서
유관순은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신교육’ ‘근대교육’을 받으며 민족적 자각을 깨우쳤을 것이다. 3.1운동이 시작된 이후 서울에서 내려와 비폭력 운동의 유일한 ‘무기’였던 ‘태극기’를 인쇄한 곳도 공주였고, 1심 재판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기구인 사법 시스템에 맞서 당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민족의식을 한층 더 단련시킨 곳도 공주였다. 3.1중앙공원의 유관순열사상, 그리고 영명학교 안과 학교 뒤 영명동산에 세워진 유관순 동상들과 안내문, 그리고 공주제일교회 역사관에 만들어진 유관순 초상 조각과 안내문 등은 바로 그 공주와 유관순의 깊은 인연을 전해주는 증거들이다.
---「17세 소녀 혹은 한 독립운동가의 죽음」중에서
6일간의 동맹휴학으로 공주경찰서 유치장은 고보 학생들로 꽉 차고 말았다. 당시 학교와 일제 당국도 강경하게 대응을 계속해 재학생의 절반 이상이 퇴학을 당하면서, 공주고보 4회부터 8회까지 졸업생 숫자가 급감하는 일도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공립학교 교육은 한국 사람을 일본 천황의 신민으로 개조, 양성하기 위한 식민지 노예교육이었다. 또한 같은 학생이라고 해도 일본인 학생과 한국인 학생 사이에는 차별이 존재해서 언제나 갈등 요소가 잠재되어 있었다. 어느 때든 계기만 주어지면 그에 대한 반대운동이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식민지는 차별과 억압에 기반하고 있었고, 아무리 세련된 문화통치를 내세운다고 해도 그 본질은 가려지지 않았다.
---「갈등과 위기의 식민지 현실」중에서
공주는 백제와 조선 그 이상이다. 찬찬히 도시를 들여다보면 백제와 조선의 공주만이 아닌, 다른 시간의 공주들도 만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근대의 공주다. 조선 왕조 말기와 대한제국,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공주가 지나온 시간들의 사연은 또 각별하다. 앞에서 보았듯 공주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호서지역을 대표하는 도시에서 충남의 행정중심으로, 그리고 결국 그것마저 놓치고 평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는 시간들을 거쳤다. 인생처럼 도시도 씁쓸한 성장통을 겪는데, 공주는 근대 시기에 마주한 그 성장통을 겪으며 특색 있고 스토리 많은 도시가 되었다. ‘흥미진진 공주’라는 도시 슬로건처럼 지금은 공주가 지나온 시간들이 흥미진진한 사연이 되었다.
---「책을 나가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