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 한 권에 종이가 끼워져 있었는데 대강 접어 넣었는지 밖으로 삐죽 나와 있었다. 선영은 별 생각 없이 그걸 빼서 펼쳤다. 거기에는 한 무희가 있었다. 처음엔 그림으로 여겼는데 자세히 보니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했다. 그것은 두 장인데 현상하기 전 빛이 새어들어 약간 탈색된 것처럼 바탕이 흐린 빛을 띠었고 갈색 반점들이 점점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노인의 얼굴에 피고 있는 검버섯처럼 오랜 세월의 낡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속의 무희는 금방이라도 춤사위를 펼칠 듯 역동적이었다. 카메라 앵글에 잡혀 찰나의 순간 멈췄던 몸짓이 다시 그대로 드러날 것 같았다. 정지되었음에도 바로 눈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는 실재감을 아주 강하게 풍겨냈다. 손가락 마디마디, 근육의 미세한 움직임, 들이쉬고 내뿜는 미세한 호흡마저 느껴질 것처럼 생생하게 와 닿았다.
무희가 날아오르듯 팔을 뻗을 때였다. 고깔에 가렸던 얼굴이 드러나며 눈매가 카메라에 잡혔다. 아이라인과 짙은 속눈썹을 붙인 무대화장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것만이 아닌 어떤 강렬함이 후려치듯다가들었다. 아주 깊고 먼 시원의 중심 같은 검은 눈이 처연하도록 흰 고깔 속에서 빨아들일 듯 빛을 냈다. 1, 2초나 됐을까 싶은 아주 짧은 순간, 그 눈빛이 선영의 가슴으로 확! 와 닿는 느낌이었다. 실제로 뭔가에 접촉된 것처럼 가슴 쪽에 찌릿한 여운 같은 게 번졌다. 이 느낌은 뭐지? 선영은 가슴에 가만히 손을 대보았다.
선영의 시할아버지 허상만은 일제가 조선과 합병을 한 직후인 1913년 강원도 동해의 최북단에 위치한 주 어업기지인 동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전쟁과 분단으로 끊어졌지만 일제강점기하의 동진은 동해북부선 철로역이 있던 교통요지였으며 원산과 부산 간 여객선의 기항지였다. 농산물과 해산물의 집산지여서 물자와 사람들이 모여들어 흥청거렸다. 거리를 어슬렁거리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우스갯말까지 있을 만큼 당시 동진의 경제 실정은 전반적으로 넉넉했다.
하지만 허상만의 집은 부칠 밭 한 뙈기나 바닷가에 살면서 지닐 수 있는 손바닥만 한 전마선도 없이, 찢어지게 가난해 밥 굶기를 밥 먹듯 했다. 움직일 때보다 누워있는 날이 더 많았던 병약한 아비가 어쩌다 남의 허드레 품을 팔아 버는 형편없는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갔다. 이엉 한 번 제대로 갈지 못한 지붕은 무너질 듯 위태로웠고, 엉성하게라도 둘러친 울타리는커녕 콧구멍만한 단칸방에 문짝도 없이 거적때기를 치고 살 정도였다. 명색으로나마 틀 구실을 하는 흙벽은 겨울이면 터지고 갈라져 황소바람이 들이쳤다. 풍찬노숙이나 다름없었다.
기준이 처음 모운희를 만났을 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찾아들던 초기의 여느 조선족과 다를 바 없었다. 지도학생으로 정해져 연구실에 인사를 하러 왔던 모습은 독특했다. 생김새는 곱상했지만 촌스러워서 한국의 70년대 분위기를 풍겼다. 짧은 머리를 빠글하게 펌을 하고 무릎길이의 성장용 치마를 입었는데, 무릎 밑까지만 오는 짧은 판탈롱 스타킹을 신어 알무릎이 그대로 드러났었다. 거기다 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낮고 투박한 신발을 신은 모습은 나이든 시골 여자를 연상시켰다. 어디 외출할 때면 멋을 부리고 치장했어도 세련과는 거리가 먼 차림새였다. 당시 중국과의 수교 초기에 접하던 그곳 일반 여성들 모습이어서 중국, 하면 연상되던 낙후라는 인식처럼 그랬다.
사당패는 춤과 노래, 곡예 등 연희를 펼치며 떠돌던 유랑예인들이었다. 여자로만 모인 무리를 사당패라 하고 남자들만 모인 무리를 남사당패라고 하지만, 이제는 그런 구별도 없이 남자 여자가 뒤섞인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도 환대받던 호시절이 있었으나 19세기 들어 점차 힘을 잃어갔고, 한일 병합 이후부터는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으로 옹색하게 이름만 남았다. 기량도 못 미치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섞이면서 명성도 무색해졌다. 그들은 패를 이끌어 가는 모갑이가 주선한 곳에서 판을 벌렸고, 그에 대한 사례와 사당(여자)들이 매음을 하고 받은 해우채로 먹고 살기로 했다. 그나마도 수요가 없어지자 다른 살 길을 찾아 흩어지는 경우가 흔했다.
동네로 들어선 패거리는 평소처럼 풍악도 울리지 못하고 조용히 동구 길을 잡아들었다.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돈거리나 본정통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심하게 됐다. 그들은 내안 근동에서 제일 부자인 강근언의 집을 찾아드는 중이었다. 선영의 시어머니 강경분의 친정 작은집이었고 인정의 친가였다. 강근언은 어린 허상만을 원산으로 불러 취직시켜준 인정의 친할아버지였다.
진표에겐 전쟁통에 행방불명되어 얼굴은커녕 존재조차도 제대로 몰랐던 큰 누이가 친어머니로, 형 내외인 허재표와 강경분은 사돈이 되었다. 허재표에게는 누이가 처형으로, 동생 진표는 사돈이 되었다. 강경분에게는 얼굴도 본 적 없이 얘기만 들어 알던 시누이가 사촌언니로, 시동생인 진표는 친정 조카가 되었다. 기준에게는 존재가 있는지도 몰랐던 고모가 이모로, 삼촌 진표는 외재종형이 되었다. 인정에게 진표는 내외종 간이며, 사돈이었던 진표의 생모는 실상 친 고모였다. 진해식이 전하는 말대로라면.
진표는 인쇄물을 책상 위에 놓고 서랍에서 상자 하나를 꺼냈다. 뚜껑을 열자 고서적 같은 책 몇 권과 탈, 흑백사진 두 장이 들어 있다. 책들은 오래 되어 제목마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 만큼 흐릿했고 표지도 누렇다 못해 갈색으로 변해 있다. 사진들도 오래되어 귀퉁이가 찢어졌고 군데군데 빗물에 젖은 것처럼 얼룩이 번져 조금만 힘을 주어도 바싹 마른 낙엽처럼 으스러질 것 같다.
사진 중 하나는 학예회였는지 초립동이 복장인 열두세 살쯤의 소녀가 찍혀 있다. 전반적으로 선명도가 없는데도 이목구비만은 단정하게 눈에 들어왔다. 홑꺼풀의 커다란 눈에 시원스레 뻗은 콧날과 또렷한 입매였다. 서글해 보이는 그 모습에 진표의 모습이 판에 찍은 듯 겹쳤다.
딸은 허상만과의 관계로 그 나이가 가질 수 있는 이성에 대한 설레는 감정도 갖지 못 했다. 그러나 진이상에게만은 달랐다. 문득 문득 여자로서 모든 걸 걸어도 좋을 거라는 생각도 했다. 함께 평생을 살 수 있다면 바랄 게 없었다. 진이상은 딸을 욕정의 대상으로가 아닌 진정으로 존중해 주며 인간의 존엄에 대해 말할 때는 힘이 실렸다. 그와 가까웠던 이유도 그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처한 처지로는 감히 그런 생각조차 뻔뻔할 뿐이었다.
딸은 소학교를 다니며 학예회에서 무용을 시작했던 후부터 무용가가 되고 싶은 열망도 품었다. 지도했던 무용교사도 무용에 적절한 신체조건과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 권유했다. 그러나 허상만은 사당년이나 하는 천한 짓거리라며 단호하게 눌러버렸다. 딸은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만 했다.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었다.
하지만 몸을 통해 터져 나오는 수많은 갈구를 맘껏 표출해내지 못 하는 현실은 늘 안타까웠다. 진이상은 그런 딸의 열망을 다독이며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거라는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진이상을 향한 딸의 마음은 점점 피어올랐다. 그럴수록 그 마음을 눌러 접어야 했다. 허상만과의 관계를 떠올리면 안 될 일이었다. 언감생심 꿈도 꾸어선 안 되는 자신의 처지만 되새겨지며 환멸스러웠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