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하늘이 더 높아지고 바람이 내 몸을 파고들 때쯤, 나는 걷기 시작했다. 나는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는 앞다리와 뒷다리를 번갈아 뗐다. 나의 첫걸음은 그렇게 시작됐다. 내 첫걸음은 엄마를 조용히 웃게 했다. 엄마는 한 번도 큰 소리로 웃지 않았다. 바깥의 소리가 엄마의 웃음에 묻히면 안 된다고, 우리가 내는 소리가 바깥의 소리를 덮으면 안 된다고 했다. 엄마는 언제나 소리 없이 웃었다. 엄마는 늘 이렇게 말했다. “소리를 담아야 한다. 대나무를 타고 흐르는 소리, 끼이익 문 여는 소리, 툭툭 돌 깨는 소리, 그리고 야오옹 유혹하는 소리. 귀에 방문하는 모든 소리를 기억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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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 씨, 아침에 마당에 나가 봤어?” “아니. 왜? 마당에 또 쓰레기가 버려졌어?” “우리 마당에 또 종량제 봉투가 뜯긴 채로 쓰레기가 온 마당에 다 흩어져 있어. 마치 종량제 봉투가 토한 것처럼 봉투는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에서 나온 쓰레기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 빨리 마당으로 가 봐.” 느긋하게 메이저리그 중계를 더 보고 싶었지만, 되살아난 아내의 호기심을 지켜 주기 위해 나는 아내를 따라 마당으로 나갔다. 종량제 봉투는 처참할 정도로 심하게 찢어진 채였다. 종량제 봉투는 칼로 매끈하게 잘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이빨로 물어뜯기라도 한 것처럼 너덜너덜 찢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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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소리가 멈추었다. 엄마가 돌아왔다. 내 꼬리는 꼿꼿하게 세워졌다. 엄마가 좋아서 나는 코를 엄마 코에 대고 문질렀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그러고 나는 다시 앞발을 들어 엄마의 얼굴을 가볍게 톡톡 쳤다. 우리를 두고 떠나지 않은 엄마가 좋아서 엄마의 옆구리에 스치듯 내 몸을 비볐다. 엄마의 냄새가 내게로 넘어왔고, 내 몸의 냄새가 엄마에게로 넘어갔다. 엄마는 나의 눈을 핥고, 등을 핥고, 엉덩이를 핥고, 내 꼬리를 살짝 물었다. 엄마의 모든 냄새가 내게로 넘어왔다. 엄마가 내 곁에 있다. 나는 앉아서 코를 킁킁거리며 미끌미끌한 엄마의 젖을 찾아 빨았다. 엄마의 체온이 내 안으로 넘어왔다. 엄마는 내게 젖을 물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엄마는 젖을 빠는 나를 핥고, 때때로 먼 곳을 응시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와 얼마쯤 떨어진 곳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배가 차자 나는 엄마의 젖에서 입을 뗐다. “엄마, 엄마, 어디 갔었어? 얼마나 엄마가 보고 싶었는데….” “먹이를 구하러 갔지. 오늘은 제법 먼 곳까지 다녀왔어. 이제 너도 자야지. 엄마도 좀 쉬어야겠다. 춥다. 엄마한테 꼭 붙어라.” 나는 엄마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짙은 피로감이 담긴 엄마의 숨소리에 말을 멈추었다. 엄마 배에 머리를 대고 누웠다. 엄마의 숨소리에 맞춰 나도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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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의 털을 가진 고양이는 고양이 간식을 챙겨 오지 않은 내게로 와서 몸을 비볐다. 털을 만지니 부드러웠다. 아내는 고양이 털을 쓰다듬었고, 나는 의자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수 옆에는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고, 화단 가운데에는 일렬로 선 관목과 억새가 있었다. 그리고 관목 사이에는 벌써 고양이의 겨울 집이 마련돼 있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계절을 타는 사람들은 고양이들도 살찌우고 있었다. 서늘한 바람과 따뜻한 온기가 그곳에 함께했다. 아내와 나는 그곳을 벗어나 다시 길을 걸었다. 선암호수공원 곳곳에 고양이 급식소가 있었다. 그리고 현수막도 내걸려 있었다. ‘길고양이 학대는 범죄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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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언제나 집 밖에서 추위와 함께 있었다. 밖에 있는 엄마가 걱정되어 나는 집 입구에 쳐진 막을 머리로 밀어내고, 밖으로 나갔다. 엄마는 추위 한가운데 우뚝 동상처럼 앉아 있었다. 그리고 엄마는 언제나처럼 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기억은 여기를 떠나 어떤 먼 곳으로 떠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다급하게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엄마는 먼 곳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나를 바라봤다. 내 외침으로 엄마를 붙들어 둘 수 있어 다행이었다. “추운데 왜 나왔니? 어서 들어가. 춥다. 어서.” “엄마, 엄마도 춥잖아. 엄마도 집 안으로 들어와.” “그래, 그래. 어서 들어가. 엄마도 들어갈게.”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 누워서 엄마를 생각하며, 엄마를 기다렸다. 기다려도 엄마는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하나에서 열까지 셀 때까지도 엄마는 집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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