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질병에 대한 생리학적 관점이 지니는 세 가지 특징, 일반성·개인성·관계성은 이 관점이 질병 자체보다는 질병으로 아파하는 인간 개인에 관심을 둔다는 점을 말해 주는 듯하다. 실제로 생리학적 관점의 일반성은 이 관점이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유지해야 하는 항상성을 고려하고, 개인성은 각각의 인간 개인의 고유함을, 관계성은 인간 개인의 총체적인 삶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을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 하에서 의학은 더 이상 질병에 대한 학문이나 실천으로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의학은 총체적인 인간 자체에 대한, 즉 인간 개인에 대한 학문이며 실천이다.
--- p.36
엥겔하르트의 질병과 건강 개념 하에서, 의학은 자연적 사실에 대한 탐구이기 이전에 인간을 가능한 모든 고통이나 불편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즉 건강한 상태로 만들겠다는 목적을 가진 실천적 행위이며, 이론적 탐구는 이러한 실천적 행위를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 요청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학은 결코 생물학으로 환원되지도 않으며, 그것에 종속되지도 않는다. 의학은 다만 생물학을 이용할 뿐이다. 이제 이러한 관점에서 질병은 결코 실험과 관찰을 통해 확인되는 자연적 사실일 수 없으며, 가치독립적인 개념일 수도 없다.
실험과 관찰을 통해 일련의 현상들을 질병으로 규정하는 행위 자체에 이미 인간의 고통과 불편을 치료하겠다는 실천적 의도가 담겨 있다. 질병 개념은 아픔과 불편이라는 인간적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고 조정하기 위해, 다시 말해, 진단하고 예후하고 치료하기 위해 마련된 설명 도식으로서, 그 발생 자체에서부터 가치 함축적이다.
요컨대, 우리는 질병 앞에서 중립적일 수 없다. 치료에 대한 요청은 질병 개념 자체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질병 개념의 외부에서 이루어지는 가치판단에 의해 치료가 유보될 수는 있다. 그러나 부어스의 경우와 달리, 여기서 문제는 치료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라, 치료에 대한 요구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있다.
--- p.64
세계보건기구의 완전한 건강, 부어스의 생물통계적 건강, 노르덴펠트의 전체론적 건강, 후버 등의 긍정적 건강으로 가면서 점점 주관성과 개인적 책임이 강조되고 있다. 전술한 것처럼 이것은 현대사회의 필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으며 국가 단일보험을 통해 빠르게 현대 보건의료 시스템을 완성한 한국에서도 같은 건강 관련 필요가 나타나고 있다.
즉, 노인 인구의 증가, 만성질환의 주도, 정신 질환 관리 필요성의 확대, 의료비 상승, 의료 자원의 지역적 불균형, 면역항암제와 같은 신기술에 맞춰 보험 보장 항목의 조정 필요 등을 마주하고 있는 한국 의료 시스템은 여기에 대응하여 어떤 건강 개념을 추구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것은 건강권, 즉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누릴 권리’의 구체적 확립에 선행되어야 한다.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따라 건강권 실현의 논의는 상당히 달라지며, 따라서 정책 수립에서도 큰 차이가 있음은 추가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 p.98
현동학당, 병인론학회, 형상학회의 진료는, 17세기에 발간된 『동의보감』과 21세기 동의보감학파 사이 교감의 결과물이다. 그 교감을 통해 『동의보감』이라는 텍스트는 여전히 진행형의 역사로 존재한다. 그 역사 속에 몸과 질병을 바라보는 동아시아의 관점이 관류하고 있다. 현동학당의 맥진 강조는 ‘흐름’으로 읽을 수 있는 질병에 대한 동아시아의 관점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한의학에서 질병은 흐름상의 돌출과 이탈, 그리고 변이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병인론학회의 병인을 통해 무형과 유형에 모두 열려 있는 동아시아의학의 질병에 대한 관점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보다 다양한 층위에서 병인을 바라볼 수 있게 허용하는 포괄적 질병에 대한 관점으로 드러난다. 형상학회의 의료 실천은 몸과 항상 연결되어 있는 질병에 대한 관점을 드러낸다.
--- p.138
의(醫)는 인류 보편적인 현상이며, ‘존재와 존재의 만남 속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관계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은 제각각 다르다. 인간의 몸을 분절된 단위로 보고 각 단위가 특정한 기능을 담당한다고 보는 생의학은 개체를 중시하는 서구의 관점에서 비롯되며, 몸에서 발현되는 현상을 몸 내부의, 그리고 외부까지 아우르는 흐름의 일부로 보고 그 흐름이 일어나는 관계성에 주목하는 한의학은 기(氣)라고도 일컬어지는, 존재를 관통하는 흐름에 주목하는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비롯한다.
이와 같은 사유의 차이가 난임이라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에 대한 관점과 접근의 차이로 이어졌으며, 난임 당사자들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의료의 차이는 개개인의 치료 경험뿐만이 아니라 난임 치료 여부에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두 의학의 차이는 같은 목적지에 가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었다. ‘치유’라는 의학 보편적인 가치 안에서 각각의 사유에 걸맞은 목적지가 정해지고, 이에 다다르는 길 또한 해당 사유의 틀 안에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두 의료가 공존할 뿐만 아니라 섞인다.
--- p.179
자폐증은 그간 그 개념과 진단 기준, 그리고 그것을 지닌 인구 집단이 끊임없이 변화해 온 질환이다. 정신의학·심리학·유전학·신경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루어진 자폐증에 관한 연구들과 임상 현장·치료와 교육·복지·법 등 다양한 영역에서의 작업들이 얽히는 가운데 우리 사회에서 어떤 증상들을 자폐증이라는 장애로 문제시할 것인지, 그러한 증상을 지닌 사람을 어떻게 진단하고 치료하고 또 연구할 것인지가 결정되어 왔다.
특히, 현재의 유전학과 신경학 연구들에서는 점점 더 어린 아동들에게서 나타나는 행동·뇌·유전자의 차이점이 발굴되고 있고, 이는 사회적 관계에서 실질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원시적인 행동이나 생물학적 특징을 중심으로 자폐증을 규정하게끔 만든다. 현재의 진단 기준과 각종 도구들, 그리고 유전학과 신경학 중심의 연구들이 내놓는 성과는 계속해서 자폐증 인구와 그들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생산해 낼 것이며, 이렇게 포섭되는 새로운 사람들은 다시금 자폐증에 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할 것이다.
--- p.217
오늘날 치매라는 용어로 집약되는 노년기의 정신적 이상은 다른 질병들이 그러하듯 당사자에게 곤란함이나 불편함으로 느껴지는 변화를 초래하고, 그와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노력을 요구한다. 그들의 세계를 가까이서 관찰하고 기술한 연구들은 그 변화가 이전과의 단절인 만큼 연속이기도 하다는 점을, 이상 혹은 병리가 이른바 정상적이라 여겨지는 삶의 영역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러한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병이라는 사건이 개인의 생애 과정에서 어떻게 길들여질 수 있는지,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어떻게 새로운 균형을 잡아 갈 수 있는지 모색하는 일이다.
--- p.2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