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잘 아는 지인들은 나를 “복이 아주 많은 사람”또는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본 사람”이라고 부러워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책 제목을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본 사람”이라고 하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힘들게 학교를 다녔고 대학 때 은행원이 되기 싫어 대학공부를 팽개치고 방황했으며 장사 밑천을 빨리 벌려고 전쟁수당 주는 월남까지 갔다 온 도전과 쟁취의 인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내가 도전과 쟁취의 과정을 잘 관리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 이런 복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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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해방 3년 전 대구 팔공산 밑 산골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6.25 전쟁 당시 나의 고향 동네 북쪽에 있는 모든 마을들은 피난을 갔지만 우리 동네는 운 좋게도 결국 피난을 안 간 마지막 동네였다.
1950년 여름 피난행렬이 한창 절정일 때 우리 시골집 경내에만 모두 75세대가 살았던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400여 평 되는 넓고 큰 농촌 저택이었지만, 그해 따라 여름 장마철 비는 억세게 퍼부었고 장맛비를 피할 만한 공간도 확보 못한 피난민 세대가 75세대 중 절반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전쟁의 참상은 참으로 참혹했다.
--- p.18
당시 내 인생설계는 속히 장사 밑천을 벌어서, 사업전선에 뛰어드는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상과대학(경제학과, 상학과, 무역학과)입학생이 320명이었는데 1966년 가을 졸업생은 20여 명이었다.
그 당시 외국계 은행이 한국에서 지점을 내는 시기였는데, 미국계와 일본계 은행 5곳이 서울에서 다투어 지점을 개설 준비 중이었고, 대학가에 도는 소문으로는 미국계 은행이 신입사원 급료를 미국 기준으로 400달러 정도를 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외국계 은행들의 서울지점 개설 덕에 나는 장사 밑천을 빨리 벌 수 있다고 흥분했으며, 나는 체이스 맨하턴 한국지점에 응시했고 바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 p.34
1987년에 신축한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영국식 전통 양옥으로 잔디밭을 가진 121평 대지에 지하실과 다락방이 딸린 2층 양옥인데, 한강 가에 바로 붙어 있어 앞에 가리는 것이 전혀 없으므로 조망이 아주 좋았다. 영국식 전통 가옥으로 제대로 지은 주택이라 냉난방비도 절약되어 오래 살 생각을 하고 이사를 했고 거기서 두 딸을 모두 결혼시켰다.
서울에서 한강조망이 좋은 집은 대부분 소음이 심한 폐단이 있는데, 이사 갈 때 23㎜ 페어글라스로 방음 문제를 해결하고 들어갔기 때문에 문을 열면 소음이 있지만 문을 닫으면 소음 걱정도 없어 살만 했다.
--- p.69
당시는 선거 와중에 정원식 총리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밀가루사건이 생겨서 표가 한나라당 쪽으로 확 몰렸다. 서울시의원의 총수가 통상 100여 명 되는데, 80% 이상을 한나라당이 차지했다. 서울시의원 선거 4번을 치루면서 늘 겪었던 일이지만 서울시민의 출신분포가 영남과 호남표가 비슷한데 충청표가 영호남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서 서울시의원의 비율은 보통 8:2 이상으로 벌어지게 된다. 그래서 제3대 서울시의원 선거 결과도 한나라당:민주당 비율이 8:2로 된 것이다(서울시의회 1대와 2대는 1960년 지방자치 시 있었고, 1991년 서울시의회는 3대 의회임).
--- p.77
서울시의회에서는 의장과 부의장 2명이 교대로 단장이 되어 자매도시간 상호교환방문을 하기 때문에 제5대 서울시의회에서도 다시 부의장을 맡게 된 이부의장은 직분 수행상 부득이 공무여행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으며, 이는 의원들의 해외여행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으므로 공금으로 해외여행을 하지 않겠다는 본인의 의지와 상충되기 때문에 고민 끝에 공무여행은 하되 여행비용은 일본 동경도의회 의사당에서 연설하고 있는 이성구 의장 (서울시의회와 동경도의회는 상대 의장이 의사당에서 5분 스피치를 하는 관례가 있음) 서울시 금고에 반납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이의장은 2000년 6월에도 북경시를, 2002년에는 동경시를 자매도시 상호 교환방문단장으로 다녀온 후 경비 전액을 반납했다.
--- p.89
반포1동 부녀회의 비빔밥 솜씨
머슴을 잘 먹여야 도둑을 잘 지킨다고
신토불이(身土不二) 농산물로 비빔밥을 지었다네.
팔진미(八珍味) 오후청인들
이 맛에 비길 소냐!
1994년 7월 3일
--- p.116
명문가의 핵심 3가지 기본 조건은 아니지만 명문가가 되자면 사회봉사를 한 실적이 있으면 더 좋을 텐데, 이성구가문에서는 3명(이성구 본인, 부인 최효선, 장남 이상우)이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2020년 12월 31일 현재 1억 이상 개인으로 기부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 2,511명 중 한 가족 3인 이상 아너 회원인 페밀리 아너 숫자는 49가족(172명)이다.
또한 이성구 회장이 경영하는 (주)고뫄스방수는 매년 말에 1,000만원씩을 14년째 이웃돕기성금으로 KBS방송에 기탁해 왔다.
--- p.123
청렴의 표준제시를 위한 저의 행진은 17대 국회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① 17대에서 저는 후원회를 구성하지 않아 정치후원금을 일체 접수하지 않았으며 ② “경조사 축부의금 안 받기국민운동본부”대표로서 저 자신의 부·모상과 장·차남 결혼식 때도 안 받기본부의 구호대로 “알맞게 초대하여 축부의금은 받지 말고 접대만 하자”를 실천하였습니다. ③ 선출직 의원들의 지나친 공무해외여행의 자제를 촉구하고자 저 자신은 공금으로 해외여행을 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부득이 공무해외여행을 해야 할 경우에는 여행경비 전액을 국고에 4차례 반납해 왔습니다.
--- p.135
--- p.명예직 삭제 관련 지방자치법개정안 발의착수 및 공동발의자 확대를 위한 서명징구
2002. 10. 8 당시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 최고위원의 지시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 간사인 이병석 의원 등 30인이 공동발의자로 참여하여 지방의원 명예직 삭제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중개정법률안 발의를 착수하고 협의회에서는 동 사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공동발의자 확대를 결정하고, 각 시·도의회 의장, 운영위원장, 당대표의원 등이 중심이 되어 출신지역 국회의원의 공동발의 서명확대작업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이 결과 총 163인의 공동발의 서명징구를 하였으며 서명받은 서명부 원본은 2003. 4. 19까지 전국 시·도의회 운영위원회에서 수합하여 협의회 사무국으로 제출하였으며, 협의회에서는 이를 4월 21일 대표발의자인 이병석 국회의원 사무실에 제출하였다.
--- p.177
존경하는 이명박 시장님과 오늘 ‘서울경제의 활성화방안’에 대한 주제를 발표해 주실 조명래 교수님을 비롯한 토론자 여러분, 오늘의 행사를 준비하느라 애쓰신 서울시의회 재정경제위원회 안병소 위원장님, 그리고 이 자리에 참석하신 내외귀빈 여러분! 이렇게 뜻깊은 자리에서 만나뵙게 되어서 대단히 반갑습니다.
--- p.216
현재 서울의 녹지공간은 인구 증가와 경제발전으로 토지에 대한 수요 요구가 높아지면서 계속 개발할 수밖에 없는 실정에 있어 그 훼손이 날로 심해지고 있으며 서울의 공원면적은 강남과 강북 지역 간에도 현격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서울시는 이러한 공원녹지의 지역적 불균형을 해소하고 쾌적한 도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서울숲 조성이라든가, 1동 1마을 공동조성, 학교 공원화 계획, ‘서울 트러스트 운동’ 등을 통해 생활권 녹지 100만 평 늘리기 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업이 완료되면 서울의 환경은 크게 나아질 것으로 판단되며 이에 따라 시민여러분의 생활도 좀더 쾌적하고 여유로운 삶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 p.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