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타이포그래피는 대체로 여러 가능한 방법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서 비롯한다. 이런 선택에는 오랫동안 쌓인 경험이 필요하고, 나아가 올바른 선택을 하는 데는 그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이 중요하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는 얄팍하거나 기발하지 않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는 모험과는 정확히 반대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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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물의 내용이 가치 있고 중요할수록, 그리고 그 내용을 더 오랫동안 지속해야 한다면 타이포그래피는 더 세심하고 더 조화롭고 더 완벽해야 한다. 가차 없이 날카로운 검토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낱말 사이공간이나 글줄 사이공간만이 아니다. 낱 여백의 균형, 작업에 쓰인 모든 활자 크기, 제목 글줄을 짜서 배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아름답게 어우러져야 하고 더는 손댈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상을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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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디자이너는 주어진 글을 충실하고 섬세히 다루는 봉사자가 되어야 하며, 그 형태가 글의 내용을 압도하지도, 그렇다고 무작정 따르지도 않는 적절한 표현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 p.15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내려놓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책 디자이너의 책임과 의무에서 비롯한 사명이다. 따라서 책 디자인 분야는 ‘?이 시대의 표현을 각인시킬 무엇?’이나 어떤 ‘?새로운 것?’을 만들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책을 위한 타이포그래피에서 새로운 것이란 없다.
--- p.15
완벽함, 즉 타이포그래피의 표현을 책의 내용에 완벽하게 맞추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책 디자인의 목적이다.
--- p.15
책임감 있는 책 디자이너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의무는 바로 책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책 디자이너는 글을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글을 존중해 받들어 사용해야 할 봉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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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결함투성이의 책과 인쇄물이 난무하는 진정한 원인은 바로 전통(?Tradition?)의 결여 또는 철저한 무시 그리고 오만함에서 비롯해 규약(?Konvention?)을 업신여기는 데 있다.
--- p.37
옛 책의 타이포그래피는 우리가 앞으로도 활용할 수 있는 정말 가치 있는 유산이다. […] 전각 들여쓰기처럼 지난 몇백 년의 세월을 통해 올바르고 유용하다고 증명된 것 중, 과연 무엇이 이른바 ‘?실험적인 타이포그래피’에 밀려 사라질 수 있겠는가. 이보다 이론의 여지없이 확실하게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의미를 찾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실질적이고 참된 실험은 연구의 밑거름이 되고 진실한 것을 찾아 증명으로 이끌기는 하지만, 그 자체로 예술이 되진 않는다.
--- p.43
타이포그래피는 예술이자 동시에 지식을 생산하고 담는 그릇이다. 한 학생이 다른 누군가가 실수투성이로 써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 적는다면 원래 배워야 할 것을 놓치게 됨은 물론이고 가치 있는 지식을 생산해낼 수 없다. 타이포그래피는 기술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만, 기술 하나에만 기대서 예술을 만들어낼 수 는 없다.
--- p.44
우리는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 책의 위대한 전통을 뿌리부터 연구해서 다시 생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허점투성이의 책을 바로잡으려는 방법적 연구는 모두 이를 잣대 삼아 올바른 방향을 찾아야 한다.
--- p.44
오직 옛날의 완벽한 작품을 끊임없이 분석하고 연구하는 것만이 우리를 발전의 길로 이끌 수 있다. 오늘날 중요한 인쇄 활자체가 옛 활자체 자모에 대한 더할 수 없을 정도의 면밀한 연구가 있었기에 존재하듯, 옛 책의 판형과 글상자의 비밀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책 예술의 진실한 면모를 일깨워줄 것이다.
--- p.74
무언가가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은 언뜻 불필요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일단 책의 모습이 편안하게 다가오고 일상용품으로서도 더할 나위 없어 보일 때, 기꺼이 그 책을 사서 집에 가져오고픈 마음이 생긴다. 이런 책이야말로 진정한 서적 예술의 작품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p.209
모든 책 디자이너는 얀 치홀트의 지침을 비평적 시각으로 되돌아보고 시험과 확인을 통해 받아들임이 바람직하다. 즉 이 지침을 스스로 만든 책 펼침면에 적용해보고 그 아름다움과 가독성을 비교하고 분석하는 토대로 삼아야 한다. 그의 글은 특히 일상의 타이포그래피 작업에 도움이 되는 지침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영향력이 있기 때문이다.
--- 별책 p.5
타이포그래피에는 보는 것 이상, 즉 읽는 것이 필요하다. 읽기 위해서는 또 다른 실행이 필요하다. 적어도 여러 줄로 된 글을 읽는 것은 그냥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의식적으로 원하고 실행해야 한다. 오로지 보는 것과 읽는 것, 그리고 이 두 필수 요소의 정확하고 비판적인 이해를 통해서만 좋은 타이포그래피가 나올 수 있다.
--- 별책 p.6
얀 치홀트의 글에 녹아 있는 확신은 전통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 당시의 기술적, 예술적, 문화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 작가와 독자, 그리고 무엇보다 글 자체와 독서 문화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존중에서 비롯한다. 휩쓸릴 정도로 많이 생산하고 그에 쫓기듯 빨리 소비하는 것이 일상이 된 오늘날, 이 책에 담긴 그의 목소리는 언어와 시대, 국경을 넘어 그 가치를 더욱 발할 것이라 확신한다.
--- 별책 p.13